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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튼애플 Jan 20. 2024

<노 베어스> 국경을 넘지 못하는 감독 자신의 이야기

영화 <노 베어스> 줄거리 및 자파르 파나히 감독에 대해

영화 노 베어스 줄거리


자파르 파나히는 영화 촬영이 현장이 한창인 곳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는 점차 뒤로 빠지고 맥북으로 상황을 보고 있는 감독이 나온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옮기는 연출자가 현장에서 그의 역할을 대신한다. 아쉬운 점에 대해 절절히 토하던 중 인터넷이 끊겨 영상 회의가 끊기고 만다. 아쉬움에 방을 빌려준 간바르에게 물어보지만 그동안 연결된 게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해줄 뿐이다.


간바르는 마을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지만 자파르는 거부한다. 대신 카메라를 쥐여주며 자기를 대신해 결혼식 영상을 찍어달라고 전한다. 저녁이 되자 간바르가 돌아오고 자파르는 영상을 확인한다. 하지만 녹화를 눌러야 할 타이밍이 아닌 순간에 잘못 눌려 영상이 촬영된 순간이 있다. 그 속에는 자파르를 의심하는 마을 사람들의 악의 담긴 말들이 들어있다. 굳이 국경 마을인 이곳에 몸을 담은 것부터 수상하다는 이야기에서부터 그의 모든 행동이 의심스럽다는 이야기까지 말이다.


촬영이 계속되던 중 사라와 박티아르가 프랑스로 넘어가기 위한 여권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처음에는 이 설정이 자파르의 영화에 나오는 내용이었지만 실제로도 이란을 떠나 다른 나라로 도망가려 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자신을 대신한 연출자에게 영화 촬영 외에도 사라와 박티아르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으라고 지시한다. 이 또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거라 믿으며.


한편, 그가 머무는 곳에도 사건이 벌어진다. 고잘이라는 마을의 여자를 둘러싸고 야굽과 솔두즈가 대립하게 된 것이다. 고잘은 솔두즈와 사귀는 걸 의심받고 있다. 하지만 야굽은 이미 탯줄을 자를 때부터 결정된 운명이라며 마을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고잘과 결혼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들은 마을의 규율을 어기고 교제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의 사진을 자파르가 찍었다고 믿는다. 그를 찾아와 사진을 달라고 어르고 협박을 하기도 하지만 그는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고 한다.


자파르 파나히 자신의 이야기


작품은 영화 속 이야기가 또 다른 영화 속 이야기와 겹치며 복잡한 구성을 띠고 있다. 자파르가 이란 국경 지대에 머물며 영화를 지도하는 메인 이야기, 그 마을에서 벌어지는 고잘, 솔두즈, 야굽 간의 서브 이야기, 그리고 그가 연출한 사라, 박티아르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또 하나의 서브 이야기. 그리고 서브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실제로 프랑스 망명을 준비하는 서브 이야기 속 또 다른 이야기. 이야기는 켜켜이 쌓이고 어떤 부분은 영화와 영화의 경계마저 희미하다. 사라와 박티아르의 망명 시도조차 영화 속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속 이야기와 가장 많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다름 아닌 자파르 파나히 감독 자기 자신이다. 자파르는 이란의 사회 문제를 다루는 뛰어난 영화감독이다. 하지만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과정에서 이란 정부와 여러 차례 마찰을 빚었고 출국 금지를 당하거나 투옥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어왔다. 이 작품의 공개를 앞두고도 이란 정부에 한차례 더 투옥되며 이 이야기가 단순히 허구의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는 메인 이야기에 머물며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한다. 한 발짝만 넘어서면 국경을 벗어나 튀르키예로 갈 수 있음에도 그는 황급히 발걸음을 돌린다. 자파르를 데리러 왔던 연출자는 이미 국경을 넘어설 계획을 마치고 온 것이니 안심해도 좋다고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다. 마음만 먹으면 이란을 벗어나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단 선택지가 있음에도 그가 투옥을 견디며 이란에서 지내는 것을 표현하는 부분이다.


또한 사회 문제를 찍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감독이지만 가장 결정적인 상황을 놓쳤다. 고잘을 둘러싼 삼각관계에서 증거가 될 사진을 그는 담지 못했다. 그는 메모리 카드를 마을 이장에게 넘기며 결백을 주장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가 사진을 빼돌렸으리라 생각한다. 억울하게도 그는 인민재판에 몰리고 만다.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찍지 않았단 걸 찍지 않았다고 하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았음에도 그는 피고로 몰리고 마는데 이 역시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고 정부를 비판해왔던 그가 얼마나 석연찮은 이유로 법정에 섰는지, 그리고 징역형을 받았는지를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부분이다.


영화 제목 노 베어스의 의미와 전통의 굴레


영화는 제목처럼 곰이 등장하지 않는다. 곰은 존재하지 않지만 곰이 있다는 미신 같은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퍼져 있었기에 사람들은 곰을 피해 길을 넘어야 했다. 이는 이 마을에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려고 만들어진 이야기다. 곰이 나온다는 이야기로 사람들의 통행을 제한하거나 한곳에 머무르게 하며 이장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파악한다. 이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인하고 통제하려는 검은 속내가 내비치는 공포 선전인 것이다.


미신이라는 과거의 전통, 혹은 이와 비슷한 것들이 마을에는 여러 번 목격된다. 자파르가 참석하지 않은 결혼식 영상에서 발을 씻겨주는 장면을 보고 그는 의문을 가진다. 왜 여자가 왼쪽에 서야 하는가 하는. 영상을 찍어온 간바르에게도 묻지만 그는 별 거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저 의식의 한 과정일 뿐 이상할 것 없다는 말뿐이다. 자파르는 찜찜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이해해 보기로 한다. 하지만 그 찜찜함은 곧 현실 속 불행으로 나타난다.


고잘과 솔두즈, 그리고 야곱. 이 세 남녀를 둘러싼 사랑 이야기가 주요 서브 이야기 중 하나라 볼 수 있는데 야곱의 행동을 우리의 상식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가위로 고잘의 탯줄을 잘랐고 이는 정략결혼처럼 운명이 결정된 과정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전통이고 당연한 것이라 이야기한다. 마을 원로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도 동조를 하지 않자 그는 억울해한다. 당신들 때문에 내가 옥살이도 대신하고 전통을 지켜가며 살아왔는데 왜 아무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냐며 화를 내기도 한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야곱은 또 한 마디를 덧붙인다.


왜 다들 말이 없어요?
곰에게 혀라도 잘렸어요?

이 이야기가 나오자 장내는 일순간 술렁인다. 혀를 자를 곰이 없다는 것 정도는 마을 원로들도 알고 있다. 곰 이야기로 대표되는 전통이 마을의 균형을 유지해온 만큼 곰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동시에 그의 편을 들어줄 수도 없다. 명확한 증거도 없이 솔두즈와 고잘을 의심하고 처벌하는 것 역시 마을이 지켜온 안정을 뒤흔들 스캔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장과 원로에게 중요한 건 개개인의 행복이 아니다. 이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계승하는 것.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젊은이 몇 명쯤이야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게 이들은 누군가의 시체를 밟고 일어선다. 전통이라는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발행하며.


보이지 않는 국경의 무게


작품 속 주인공들은 국경이라는 키워드를 모두 공유한다. 국경 마을에서 영화 연출을 하고 있던 자파르. 자신들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국경을 넘기로 결심한 고잘과 솔두즈. 그리고 영화 속 인물이었던 박티아르와 사라. 이들은 국경을 넘고 싶어한다. 하지만 각각의 이유로 국경을 넘기란 쉽지 않다.


박티아르와 사라의 경우는 확보된 여권 때문이었다. 사라의 여권은 준비되었으나 박티아르의 여권은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박티아르는 사라를 먼저 도피시키려 했으나 사라가 받아들이지 못한다. 얼마 뒤 바다에서 사라의 시신이 떠오르며 이들은 국경을 넘기 위한 전투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굴복하고 만다.


고잘과 솔두즈는 불법임을 알지만 국경을 넘기로 결심한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인민재판과 사람들의 핍박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은 튀르키예로 망명을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이들은 국경 수비대에 발각되어 총상을 입은 채 피투성이 모습으로 발견된다. 전투는 했으나 처참히 패배한다.


마지막으로 자파르다. 그는 국경이 어딘지 연출자에게 묻는데 자신이 이미 국경을 밟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화들짝 놀라 몇 걸음 떨어지더니 빠르게 이란 영토 쪽으로 발을 옮긴다. 언제든 국경을 넘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기회를 얻게 되자 그는 주저한다. 싸우기보다 현실에 순응하기로, 싸움이란 선택지조차 쳐다보지 않기로 결심한 듯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그는 차를 몰고 국경으로 향한다. 여전히 떠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행복할지 모르는 국경 너머의 삶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는 행동하지 않고 머무른다.


국경은 가상의 선이다. 국경을 가로막는 거대 장벽을 설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저 도로 하나를 경계로 국경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렇게 쉽게 넘을 수도 있는 공간이지만 실제로 그 가상의 선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결심과 용기가 필요로 했다. 자파르는 그 결심을 내리지 못한다. 그 용기를 가질 수 없었다. 몇 번의 고민은 있었으나 머무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총상을 입고 돌아온 젊은 커플들의 모습을 보고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다시 그들에게 돌아간다. 이는 이미 나이가 들어 세상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자신과는 달리 이 젊은이들에게는 행복한 미래가 있기를 바라는, 전통이나 국경이 가지는 거추장스러운 사슬에 묶이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길 바라는 노감독의 바람이 담겨 있던 부분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실제로도 그는 감옥에 투옥되었을 뿐 영화를 통해 이란 사회를 획기적으로 바꿔놓을 수 없었다.


다만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투옥이라는 비참한 상황에서도 이란이라는 나라를 떠나지 않는 것은 이런 젊은 사람들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더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게 하는데 약소하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었을 거다. 자신의 희생이 헛되이 되지 않기를, 해묵은 전통이란 가치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지 않기를 그는 그 삶을 통해, 그리고 영화 속 자신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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