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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튼애플 Feb 04. 2024

<추락의 해부> 진실은 흐릿하고 픽션은 선명하다

쥐스틴 트리에 영화 <추락의 해부> 줄거리 및 리뷰


추락의 해부 줄거리


하얀 눈이 내려앉은 외딴 집 마당에서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채 발견된다. 그는 사뮈엘이라는 남자로 아내 산드라, 아들 다니엘과 함께 이 집에서 살고 있던 사람이다. 이변을 가장 먼저 알아챈 건 그의 아들 다니엘. 반려견 스눕과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던 중 아버지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다니엘은 시각 장애를 앓고 있어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의 비명 소리에 놀란 산드라가 경찰에 신고하고 수사가 시작된다.


떨어진 위치를 볼 때 남편의 방에서 지상으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사고 혹은 자살이라 생각했지만 경찰의 입장은 다르다. 그가 산드라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점, 자살을 택했다면 창고 건물 외벽에 묻은 세 줄기의 혈흔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아내인 산드라가 계속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는 점에서 그녀를 용의선상 최상단에 놓는다.


이야기는 재판장으로 옮겨간다. 검사는 그녀와 남편 사이의 불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캐묻는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성 정체성에 대한 폭로, 외도 이야기 등 남편과 매끄럽지 않았던 결혼 생활에 방점이 찍힌다. 그녀와 변호사는 사건과 무관한 이야기라 맞받아친다. 그러자 검사는 남편의 주변 인물을 증인으로 세우고 사뮈엘이 녹음했다던 녹음 파일을 증거물로 제출한다.


녹음기에서 나온 이야기는 산드라가 사뮈엘을 업신여기는, 그리고 과거에 얽매여있는 그를 향한 노골적 비난이었다. 다니엘이 시력을 잃게 된 사고에 대한 잘못을 여전히 용서하지 못했으며 작가로서 성공하지 못한 그의 인생을 폄훼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작가로서의 삶이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 데에는 사뮈엘의 공도 분명 있었는데도 말이다. 녹음 파일이 틀어진 후 배심원들은 산드라의 이야기를 의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나 방청하던 다니엘이 어머니인 산드라와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말까지 꺼낸다. 이윽고 마지막 재판이 펼쳐지고 그녀는 최종 심판대에 서는데...


살아남은 자의 해부


영화의 배경은 진실을 파헤치는 법정이 주가 된다. 산드라는 남편을 잃은 충격적 사건의 당사자이지만 동시에 사건성을 갖는 이 의문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제1용의자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그녀의 처지가 너무나 딱했다.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일 여유도 없이 경찰에게 추궁당하고 법정에 불려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존엄성은 낱낱이 해부된다.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겠지만 조금은 무관해 보이는 일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내보여야했으니 말이다.


그녀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건 영화의 중반부 이후였다. 그녀의 진술은 일관되지 않았다. 사건의 최초 목격자였던 다니엘의 진술도 어머니에게 유리하도록 조금씩 바뀐다. 약간의 어긋남이 작은 가시처럼 계속 찝찝함을 남긴다. 비단 관객들만 그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다. 아들 다니엘마저 어머니의 태도에 껄끄러운 무언가를 감지한다.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였을 가능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야기는 산드라가 사건의 진범인지가 아니라, 산드라가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를 폭로하는 인민재판에 가깝게 진행된다.


그녀의 모든 행동을 두둔하는 게 아니다. 그녀는 공개된 배심원 재판에서 제대로 된 해명 기회도 갖지 못한다. 심지어 독일 출신의 영어가 익숙한 그녀에게 프랑스 법정은 프랑스어로 진술을 강요한다. 그녀는 어려운 상황에서 익숙지 않은 언어로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의심스럽던 그녀의 행적은 이 생경함에서 오는 문제였을 수도 있다. 이야기 전달의 매끄러움이 결여되자 그녀의 사고 회로도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검사는 그녀를 다그치고 압박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다니엘마저 그녀에게 등을 지며 산드라는 심연 속으로 침전해간다.


산드라의 이야기는 충분히 의심스럽다. 하지만 재판은 사건의 진범을 찾는 과정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존엄성을 해치거나 공개 망신을 주기 위해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하물며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하는 진술은 몇 배의 압박감을 줄 수밖에 없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불쾌함이 느껴짐과 동시에 연민을 느껴야 했던 건 그녀가 놓인 불합리한 상황에서 오는 분노 혹은 안쓰러움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자 vs 계단을 내려오는 자


그렇다면 사건의 진범은 누구였을까? 정말 산드라가 남편을 죽인 것일까?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해 끝내 답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 중요한 건 누가 사뮈엘을 죽였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그가 죽었는가였다. 그가 죽고서 어떤 미래가 그려지는가에 훨씬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법정에서의 판결 결과마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뮈엘이라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 그리고 이 가족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는 것. 이것들이 훨씬 더 중요했다.


하지만 영화가 진범을 밝히지 않았다고 관객들 역시 진범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단서로 나름의 추리를 해보자면 사뮈엘 사망 사건의 진범이 아내 산드라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안타까운 사연에 놓인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힌트는 영화 속 연출에 등장한다. 이들이 사는 3층의 통나무집은 좁고 높은 구조로 되어있다. 자연히 이야기는 1층, 2층, 3층을 오가며 전개된다.


그런데 150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의 영화에도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다. 바로 아내인 산드라. 다른 인물들도 한 층에만 머무는 건 아니므로 계단을 이용해 위층에 오르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다른 사람의 계단 오르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화면이 바뀌고 다른 층에 있을 뿐이다. 단지 산드라만이 인터뷰를 왔던 학생을 돌려보낸 뒤 위층으로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내려오는 건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것, 진실을 좇는 것, 이타적인 것 등을 의미한다. 반면 계단을 오르는 행위는 순리를 거스르는 것, 욕심을 좇는 것, 이기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억눌린 채로 살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로서의 산드라는 실제 사건을 녹여내 작품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일찍이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고 화목하지 못했던 집에서 자랐으며, 동성애와 불륜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앞에 두 가지 이유는 그녀가 순리를 거스르는 사람이 된 원인이고, 뒤에 두 가지는 산드라가 그로 인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다. 그녀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기꺼이 할 준비가 된 사람이다. 그것이 살인이라는 추악한 행위일지라도.


그녀가 계단을 오르는 사람이라는 것은 반려견 스눕이 크게 아팠던 사건에서도 알 수 있다. 사건 발생 6개월 전, 스눕이 수면제를 먹고 실신한 일이 있었다. 그때 사뮈엘이 나직이 내뱉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스눕의 관점에서 하는 것 같았지만 실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신이 언젠가 이렇게 최후를 맞이할 것임을, 그리고 그 죽음이 명쾌한 이유를 찾지 못할 것임을 예상하듯한 이야기다. 공교롭게도 영화는 계단을 내려오는 스눕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진실을 밝히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스눕의 존재가 단순한 반려견으로서 등장하는 게 아니라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는 메신저임을 영화의 초반부부터 보여주고 있던 것이다.


진실보다 픽션이 중요한 영화


영화의 진범 찾기는 흥미진진하다. 때로는 산드라가 범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다가도 때로는 그녀가 결백한 희생자로 보이기도 한다. 이는 사건의 모호성에서 야기된 문제다. 이들이 써내려가는 이야기가 누구에 의해 쓰이는가에 따라 달라 보인다. 등장인물인 산드라는 소설가다. 자신의 불행한 사건을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는데 천부적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그녀가 법정에서 증언한 내용들 역시 자신이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하나의 픽션일 수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매번 새로 쓰였고 앞뒤가 어긋났던 부분은 추후에 번복이라는 지우개로 매끄럽게 연결시킨다.


상대였던 검사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단편적인 증거품 몇 개와 정황 증거 몇 개를 가지고 이리저리 끼워 맞춘다.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증거품을 두고도 산드라가 범인일 가능성의 무게를 둔 이야기를 집필해나간다. 누구보다 공정해야 할 검사 신분이지만 산드라의 완전한 몰락, 즉 피고인의 높은 형량 구형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두 사람의 시나리오는 각자의 사정에 의해 쓰였고 나름의 논리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완벽하게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거나, 유죄를 입증하지는 못한다.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작용할 뿐이다. 다만 이 픽션이라는 영역에서 누가 더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느냐를 생각하면 반복되는 지리멸렬한 법정 싸움이 어떻게 전개될지도 예상되는 부분이 있었다.


다만 이야기는 살아남은 자에 의해 쓰일 수밖에 없다. 죽은 사뮈엘은 소설가를 꿈꿨지만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나도 발표하지 못했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는 자신의 아내, 혹은 검사의 이야기 소재가 될 뿐 이야기를 쓸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나리오를 쓰지 못했던 그의 죽음은 안타까웠다. 동시에 그의 죽음은 정교하게 잘 짜둔 사뮈엘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 그리고 다잉 메시지는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으로써 영원히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을 비극의 스토리를 쓰는 데 성공한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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