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날리는 글씨

풀잎도 날려요

by 정직유닛

월요일은 엘빅 후 캘리그래피 수강한다.


엘빅 40분 전에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오느라 부랴부랴 그린비아만 마시고 와서 허기진다. 마침 에어로빅 회원 중 하나가 스낵커즈를 돌려서, 캘리수업 전 한 입 먹고 시작했다.


캘리샘왈 '이 글씨는 바람에 날리고, 풀잎도 날려요'라며 어드바이스를 했다. 나는 글씨를 마음껏 옆으로 날려서 연습장에 써 내려갔다. 그런데, 막상 도화지에 쓸 때는 글씨가 조금 경직되어서, 풀잎만큼은 잘 날리고 싶어서 샛노란색으로 열심히 그었다.


한참 샛노란색 풀잎을 날리다가, 잔꽃도 있다는 샘의 말에 "꽃도 있었군요, 가까운 게 잘 보이지 않아서요"라고 말하고는 스스로 섭섭해졌다. 수십 개의 잔꽃을 못 보다니..


"난 안경을 3개 가졌어요. 근거리, 중간거리, 원거리용으로요"

라고 샘에게 말하니, 샘왈 "다초점을 맞추지 그러셔요"라고 조언했다.

"민감해서 안 맞아요, 3개로 쓰는 게 깨끗하게 보여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머릿속이 더욱 어두워졌다.


내 몸은 정확하게도 세월을 인지하고, 그에 맞춰서 낡아지고 있는 것이다. 내 몸은 뇌보다 훨씬 사회적이다. 뇌는 꿈조차도 과거와 현실을 구분을 못하고 헤매지만, 몸은 시간의 흐름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어깨회전근과 무릎과 골반, 소화기관도 너무나 정확하게 세월이 흘렀음을 인지한다.


머리에 바위를 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수채화 물감을 붓에 묻혀서 성냥머리만 한 점을 네 개 찍으며 꽃잎을 표현했다. 기분이 참담해서인지 꽃잎이 예쁘게 되지는 않았다.


샘왈 "꽃잎을 한 방향으로 하지 말고 여러 각도로 해보셔요"라고 해서, 해보려고 했는데 이게 의외로 뜻대로 안 됐다. 내 마음은 자갈을 깔아 놓은 듯 불편해졌고, 더욱 무거워졌다.


수채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학창 시절 미술학원의 악몽이 되살아나서인지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래서, 팔레트에 짜놓은 비슷한 색끼리는 잘 구분도 못한다.


1시간 40분의 수업을 마치고 샘이 교실을 나가면, 나도 부랴부랴 도구들을 씻고 챙겨서 가방을 싸고, 겉옷을 입으며 3명의 회원들과 빠르게 인사말을 나누고 엘베를 타고 파바서 안전한 나만의 성으로 들어간다.


나의 성 옆 30센티 안쪽으로,

처음 보는 중년여성이 미니 햄버거 샌드위치 3개짜리와 커피를 들고 와서 먹기 시작한다.


테이블도 없이 그냥 내가 앉은 긴 소파자리에 앉아서 먹었다. 돼지고기햄 냄새에 비위가 상했다. 얼마 전부터 속이 안 좋은데, 낯선 사람이 바로 옆에서 웅크린 모습으로 버거를 먹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속이 부글거리며 기분이 상했다.


작년부터, 사람이 반갑지가 않게 되었다.

사람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잠도 안 자고 각성모드로 돌변해 왔던 나에게 이것은 엄청난 변화이다. 물론 인간에 대한 환상을 탈피하게 되는 2가지 사건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도 난 산책하는 강아지 등의 털만 보고도, 그 강아지와 내 두근거리는 심장만 존재하는 영원한 황홀감을 경험한다.


인간.. 무남독녀인 내게.. 귀한 생명체였는데..


어린 시절, 사람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저녁쯤 되면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이해할 수가 없어서 너무 쓸쓸했다. 그리고, 상실감에 아무 말없이 알루미늄 둥근 상에 차려놓은 저녁을 먹으며 계속 골똘히 '왜 사람들은 집에 갈까'라고 생각했다. 밤에 이불을 덮고 누워서도 '재밌게 지냈는데 왜 갈까'라며 불면의 밤을 수없이 보냈다.


어느 날, 한번 엄마에게 물었다.

"우리 집에 계속 있지, 왜 가는 거야?"

하지만, 엄마는 내게 둥근 밥상만 내밀며 대답을 회피했다.

나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마에게 돈 얘기를 하러 오는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래도, 늘 손님이 좋았더랬다.


내 삶의 오랜 동력원이었던, 인간..

올해부터는 자가발전으로 생존을 시작한다.


난 영원히 떠나지 않는 최초의 인간이다. 그래서, 안전하다.

오늘, 이 흥미로운 존재는 어린 왕자의 사막여우이자 장미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