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 아무튼, 요가 아무튼 방콕, 아무튼, 아무튼, 아무튼... 아무튼 시리즈를 이리저리 넘겨 보며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나에게 아무튼은 뭐지’ 아무튼 시리즈가 출간될 때마다 거기까지가 다였다. 50종이나 되는 아무튼 중 나의 원픽은 『아무튼, 산』 . 슬슬 읽기 시작했다가 감정 이입 돼버려 헉헉대다가 정상 찍고 능선 따라 사뿐하게 걷듯 설렁설렁 넘기다가 마지막 장으로 넘어가는 순간은 산을 뒤에 두고 내려오는 후련하고도 아쉬운 마음까지. 책을 읽는 것이 꼭 산에 다녀오는 기분이다.
산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국문과, 시와 낮술과 철학, 출판사, 잡지사. 나와 비슷한 삶의 궤적에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살면서 자기소개서를 딱 한 번 써봤다. 토플 점수도 없고 학과 성적도 나쁘고 취업 원서에서 어필할 수 있는 건 자기소개서뿐. A4로 빽빽하게 5장을 써서 보냈다. 당시만 해도 메이저 출판사인 ‘한길사’에 하나, 듣보잡 신생 출판사 ‘아침이슬’에 하나. ‘한길사’는 내가 꿈꾸던 학술 출판사였기에 어디 하나 오자가 없나 살피고 살펴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편을 부쳤고 ‘아침이슬’은 대학 시절 많이 불렀던 노래 제목이라 그냥 던졌다. 서울행 기차를 타고 상경해 면접을 보고 ‘아침이슬’로 첫 출근을 했다. 내가 꿈꾸던 회사는 아니지만 내가 꿈꾸던 일을 하는 건 좋았다. 내가 기획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한동안 우리 출판사를 먹여 살릴 수 있어 좋았고, 표지 디자이너, 교열자, 번역자, 작가 등 책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 좋았다. 본인 월세를 못내 담배만 뻑뻑 펴대는 사장님이 월급이 밀릴 것 같다고 했을 때 그때 나는 월급을 줄여도 괜찮다고 했다. 1999년, 아무리 세기말이라지만 그때 내 월급은 90만 원. 월세가 30만 원. 세상 물정 좀 모르면 어때? 이십대 후반, 열정만으로 좋았다.
높고 푸르고 눈부신 산이었다. 산에 어울리는 건강한 몸과 맑은 정신이 내 것이었다. 지저귀는 새소리, 깨끗한 물소리, 쨍한 햇살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산을 오르는 길이 다 정겹고 설렜다. 열정만 가득했던 이십대 후반 나의 산은 지나고 보아도 두근거리고 아름다웠다.
고등학교로 넘어오니 생활기록부에 아이들 사활이 걸려 있다. 1부터 9까지 등급이 물론 중요하지만 수업에서 활동한 내용, 동아리 활동, 진로 활동, 학교 행사 참여까지 기록된 것도 중요하다. 있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뿐 아니라 인사성 바르고 성실하며...로 시작하는 행발(행동발달상황)까지 대입 자격을 증명할 서류라 허투루 쓸 수 없다. 그중 제일 중요한 수업활동 내용은 250명을 쓴다. 마음가는 아이는 하나라도 쓸 거리를 더 찾아내 잘 써줄려니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다. 학년말 교무실 선생님은 두 부류다. 생기부에 영혼을 갈아넣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영혼을 탈탈 털어 넣고 나니 겨울방학이 끝났다.
등산로가 잘 닦여진,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익숙한 산이다. 비슷한 등산복에 비슷한 등산화 차림의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비슷하게 차려입고 산을 오른다. 매일 산을 오르니 쉬워질 법도 한데 익숙한 길을 오르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느낄 겨를없이 묵묵히 오르다보면 그래도 높은 곳에서만 보여지는 탁트인 풍경이 좋다. 익숙함이 편해진 중년 나의 산을 나는 아직 다 보지 못했다. 정상에 서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길의 소중함을 느끼다 보면 보지 못했던 나의 산이 성큼 다가서 있을지도.
1, 2월은 동네책방들이 지원할 수 있는 사업들이 하나둘 공지된다. 책을 팔아서는 살 수 없는 책방들은 지원사업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지원사업에 쓸 예산을 책값으로나 나눠주든가. 사실 책을 이다지도 안 읽는 이 상황 자체가 재난이다. 독서재난상황을 선포하고 국민들한테 책값을 재난지원금으로 지급하라! 책방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문화가 있는 날’ 깃발을 펄럭이며 문화사업 최전방에 선다. 봄방학 시간을 쪼개 지원사업계획서를 쓴다. 우리 책방에서만 할 수 있는 눈에 띄는 사업들을 구상해야 한다. 구십이 되어도 치매는 안 걸릴 것 같다.
오늘도 나는 마음을 다잡고 중년의 내 산을 꾸역꾸역 오르고 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지리산도 설악산도 정상엘 못 올라본 나는 내 인생의 산들을 그려보며 『아무튼, 산』의 저자처럼 산에 가고 싶어진다. 떼산도 좋고 혼산도 좋고. 그래서 저자처럼 말하고 싶다.
이제는 안다. 힘들어서 좋았다는 걸. 쉽지 않아서 좋았다는 걸. 힘들어도, 쉽지 않아도, 멈추지 않고 조금씩 오르고 오르다 보면 산등성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고,모든 것을 용서할 멋진 풍경도 펼쳐질 것이고, 지나온 길들을 돌아보면서 뿌듯해할 것이고, 그러다 길게 잘 뻗은 내리막이라도 만난다면 다시 모든 걸 잊고 달려볼 거란 걸. 힘들고 지겹고 그만하고 싶기도 하지만 결국 나한테는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걸. -8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