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간의 스페인-아일랜드 여행과 <문장과 순간>
15박 스페인-아일랜드로 여행을 다녀왔다. 코로나 이후 4년만에 떠났다. 가볍고 작은 것, 먹고 입고 자는 데 꼭 필요한 것 20kg만 가방에 꾹꾹 눌러 담는다. 탈탈탈탈 여행 가방을 끌고 공항 가는 길의 홀가분함! 일상의 짐을 훌훌 털고 떠나는 순간. 아, 해방이다!
쫀득하고 시원달콤한 젤라또에 빠져 사진 포즈를 취해주고 여행에 끌려 다니던 어린 아들이 4년만에 훌쩍 컸다. 영어를 못 알아들어 곤혹스러워하는 부모가 안돼 보였던지 옆에 와서 듣고 슬쩍 한마디씩 하며 도와준다. 남편은 두고 초등 두 아들을 데리고 일주일 일본 자유여행을 하고 돌아와 몸살 앓은 게 불과 5년 전, 아들은 아이의 시절을 건너 듬직한 청년이 되어가고 있다.
<종이의 집> 매니아로서 헬싱키도 경험해보고 싶다는 아들의 요구에 11시간 경유 티켓을 끊었다. 헬싱키 공항은 티켓 바코드만 찍으면 공항 입출입이 자유롭다. 공항에서 연결되는 고속철도로 동틀녘 헬싱키중앙역에 내려 까모메식당을 찾아 따뜻한 사케로 여행객의 여유를 부려보고 트램을 타고 눈 쌓인 헬싱키대성당과 이국적인 핀란드 거리를 걷다 해질녘 공항으로 돌아온다. 바르셀로나행 비행기 게이트에 도착하니 30분이 남는다. 수십 개 게이트 중 나의 게이트를 찾아 제 시간에 들어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순간.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올까봐 불안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꿈꾼 세상으로의 여행을 기다리는, 설렘과 안도의 이 순간이 좋다.
낯선 세상에 도착한 순간 익숙하고도 낯선 노동이 시작된다. 자유여행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삽질들, 여행노동이라 이름 짓는다. 부킹닷컴으로 예약한 공항 택시 기사가 나타나지 않아 계속 연락하며 안절부절못하기, 부킹닷컴으로 예약한 아파트에 도착하니 직원이 퇴근하고 없네? 시간은 밤 10시. 또 계속 연락하며 또 안절부절못하기, 세상에서 제일 싸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제일 뻔뻔한 라이언에어와 실랑이하기, 자갈마당 여인숙 수준을 뽀샵으로 최신식 아파트로 처리한 에어비앤비에 속아(온라인체크인의 함정, 주인과 만날 수 없음) 비대면으로만 존재하는 주인과 문자로 항의하기, 내일 떠날 여행지 검색하기, 내일 잘 방 구하기, 티켓 예매하기...아, 이건 여행이 아니라 노동이 아닌가. 가끔은 여행이 노동이 되는 순간을 탓해보기도 하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삽질의 경험만큼 여행은 자유로워지리라.
마요르카 산 속 발데모사 마을로 가는 길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허브향이 난다. 올리브나무 빛깔을 한 나뭇잎들이 살살 흔들릴 때마다 유칼립투스향이 난다. 마요르카의 맑은 바람, 발데모사 마을의 향기로 스페인 여행은 기억될 듯하다. 흐린 하늘, 차가운 바람, 문득 내리는 빗방울 또 문득 개인 파란 하늘과 드넓은 잔디밭의 초록빛으로 아일랜드는 기억될 것이다.
어느 여름 오후를 보낸 쿠르 미라보의 카페,
그늘지고 조용한 구시가의 작은 골목에로의 산책,
벤치 위에 내리는 햇빛의 반점들,
(…) 이곳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
아니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올 것이 아니다.
이곳은 내일의 행복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올 곳은 아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행복한 사람,
가득하게, 에누리 없이 시새우며 행복한 사람의 땅,
프로방스는 그리하여 내게는 그토록 낯이 설었다.
-김화영, 『행복의 충격』 중에서
여행에서 돌아온지 두 달이 지났다. 하늘도 쨍해서 행복했고 바람도 상쾌해서 행복했고 부슬비도 운치 있어 행복했고 6시면 문을 닫는 상점들도 여유롭고 행복했다. 어쩌면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니지만 모든 것이 내 것인 여행자였기에 행복했다. 지금 당장, 여기서, 행복한 사람. 행복의 충격을 가져다주는 여행의 순간은 그래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