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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두 Jan 15. 2021

어디든 갈 수 있는 능력

운전 시작!


    스무 살 언저리의 나는 운전의 필요를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잘 발달한 한국의 대중교통 덕에 돌아다니는 데 큰 불편을 느낀 적 없을뿐더러 말만 하면 기꺼이 목적지까지 차를 몰아 데려다주고 데려와주는 아빠가 계셨기 때문이다. 엄마가 운전을 하지 않으신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미국에 건너오고도 꽤 오래 운전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초반에 전전하며 산 여러 학생 아파트는 학교 캠퍼스에서 도보 10분 거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대학이 위치한 동네도 자그마한 칼리지 타운이라 식료품 가게를 포함해 어지간한 곳은 충분히 걸어 다닐 만했다.


    거기에 대부분의 대학 친구는 자기 차를 가지고 있었고 운전에 능숙했다. 말인즉슨 대학생활 내내 내가 굳이 차를 몰지 않아도 편의를 봐주는 친구가 꾸준히 있었다. 당장 지금의 남편도 격주로 식료품점에 식수 사러 다녀올 때 기꺼이 제 차에 태워주던 친구 중 하나다.


    한국에 있을 적에 가벼운 접촉사고에 휘말린 후로 운전이 두려운 것도 있었다. 그때 다친 허리가 아파올 때면 그래도 운전을 할 줄 알긴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사라졌다. 직접 운전대 잡을 엄두를 내기보다 자주 차를 태워주는 친구에게 기름값을 보태거나 음식을 대접하는 게 속이 편했다.


처음 운전해서 공원 갔을 때 찍은 사진


    내가 처음으로 운전의 필요성을 느낀 건 엄마가 친구분과 함께 나를 보러 미국에 오신 해였다. 두 분을 모시고 가고 싶은 곳은 많은데 이리저리 모시고 다닐 능력이 없으니 퍽 답답했다. 엄마 친구분이 국제면허를 갖고 계셨고, 또 미국인 친구 하나가 함께 다니며 운전을 해주어 여행은 무던히 지나갔지만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감상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엄마의 귀국에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만성 우울의 새 주기가 시작된 탓이 컸다. 일상 외 일을 생각하는 것이 힘들기도 했고 일 년 남은 학사 과정을 마치면 한국으로 돌아갈 테니 가서 하면 된다는 생각에 운전 배우기는 쉽게 미뤄졌다.


    처음 계획대로면 내 막 학기가 되었을 학기에 운전대를 잡아본 건 순전히 새 룸메이트 덕분이었다. 큰 트럭을 몰고 다니던 그 애는 어느 날 ‘여자는 트럭 운전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 성이 나 귀가하더니 그런 헛소리 하는 놈들 입 막으려면 필요하다며 대뜸 내게 자기 차로 운전을 시작하라 그랬다.


    행동력이 끝내주던 룸메이트는 내 당혹을 가뿐히 무시하고 버려진 월마트 주차장으로 나를 데려갔다. 텅 빈 주차장에서 서행하는 것뿐이었지만,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운전석에, 그것도 높고 커다란 트럭 운전석에 앉아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는 건 재미있었다.


    소식을 들은 다른 룸메이트도 차를 몰고 와 내 교육에 가세했다. 우천 운전 시 주의사항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차의 구조며 작동법은 물론이고 다양한 정비방법을 망라한 이론을 알려줬다. 여자 셋이 차 보닛을 열어놓고 깔깔거린 시간은 아주 즐거웠다.


    하지만 진짜 도로에 나가 주행 연습을 하려면 간단한 필기시험으로 연습 허가증을 따야 했다. 시험 난이도가 어렵지 않다는 소리는 여기저기서 들어 알았으나 나는 선뜻 시험을 치지 못했다. 내 몸과 마음은 그때도 엉망이었다. 특히 몸 상태가 정말 나빴다. 내 첫 운전 도전은 그렇게 끝났다.


    더불어 예정되어있던 졸업도 미뤄졌다. 이리저리 힘들던 그 학기에 F를 두 개나 받은 탓이다. 그러는 중에 어찌저찌 결혼을 했는데, 항우울제의 도움으로 우울은 순조롭게 멀어졌지만 몸 상태는 계속 악화됐다. 고작 두 개 남은 수업에 등록하지 못하고 휴학했다. 운전 같은 건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다행히 나는 남편의 눈썰미로 적절한 검사를 받고 병과 원인을 찾았다. 적절한 치료로 1년 간 몸을 회복하고 복학, 졸업했다. 비슷한 시기에 남편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가기 위한 시험까지 치렀다. 살던 집을 정리한 우리는 남편의 진학 전까지 집세도 아끼고 돈도 벌며 지내기 위해 남편 고향으로 향했다.


눈이 온 뒤 고속도로. 대충 129km/h가 제한속도다


    남편의 고향은 아주 외딴 시골이다. 다른 곳에 비하면 차는 적고 도로는 넓은데 기본 속도는 느리고, 무엇보다 노령인구와 불법 이민자가 많아서 운전하다 실수해도 남들이 늘 조심하는 덕에 사고가 드물다. 처음 운전을 시작하기에 남편 고향보다 나은 환경도 드물 테다. 거기 도착한 우리는 그제야 내 운전연수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전보다 건강해진 나는 급할 것 없단 마음으로 필기 공부를 하고 면허증이 있는 승객을 태운 도로주행을 허하는 운전연습 허가증을 땄다. 면허를 따고 나서 본격적으로 운전을 연습하는 한국과 달리 지금 내가 사는 주에서는 유효한 허가증을 가지고 이리저리 다니며 운전을 익히고, 허가증의 유효기간 내에 주행시험을 쳐서 합격하면 면허증을 준다.


    허가증을 따고 생각한 것만큼 자주 운전연습을 하지는 못했다. 허가증을 얻고 곧장 한국에 몇 개월씩 다녀오기도 했고, 퇴근하면 배워야 하는 나나 가르쳐줘야 하는 남편, 둘 중 하나가 기운이 다해 있는 일이 많아 집에 들어왔다가 다시 밖에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소소한 경험이 차곡차곡 쌓였다. 어느새 동네 마트에 다녀오는 게 부담스럽지 않아 졌고, 고속도로를 타고 한 시간가량 떨어진 도시에도 다녀왔다. 예쁘단 말을 들은 인근 호수도 들러봤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아도 내가 가고 싶은 곳에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건 겪어보니 짐작보다 더 좋았다.


    머지않아 주행시험에 임했다. 나이 지긋하고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옆에 타서 이것저것 지시하고 평가했다. 삼십여분이 지나자 합격이라고 알려줬다. 당장 맨 처음에 운전 가르쳐주겠다 나섰던 옛 룸메이트에게 연락했는데 그 사소한 걸 두고 오두방정을 떨며 축하해줘서 기분이 좋았다.


    내 이름으로 된 면허증을 받았을 때는 조금 들떴다. 사실 면허증이 나왔다 뿐이지 아직도 연습 때와 마찬가지로 옆자리에 앉아 내가 미처 못 보는 것들을 두고 주의를 기울여주는 남편이 필요하긴 한데, 이것도 운전을 죽 하다 보면 경험치가 올라 없어도 괜찮아지겠지 싶다.


    여태 운전을 가르쳐주면서 내 오만 실수에도 한 번을 화내는 일 없이 침착했던 남편이 새삼 대단하다. 내가 무슨 실수를 해도 자기는 더한 것도 해봤다며 달래고 자신감을 북돋아줬는데, 눈 앞에 주마등이 스쳐간 뒤에 그러기 쉽지 않았을 거다. 다들 가족한테 운전 배우는 거 아니라고, 대판 싸운다고 그랬는데 그런 일 없이 추억만 쌓인 건 순전히 남편 능력이다.


    어쨌든 이제 나도 면허 있다! 도로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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