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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두 Jan 08. 2021

세 마리 수탉;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끊임없는 권력다툼과 그 종말(201X-201X)


    내가 시가의 닭을 처음 만난 건 남편과 연애를 시작한 해 여름이었다. 살아있는 닭을 보기는 처음이라 남편이 모이를 주고 물통을 갈아주는 동안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졸졸 따라다니며 구경했다. 달걀을 주워다가 씻어서 먹는 걸 보고는 키다리 아저씨에 나온 농장 생활이 생각나서 입을 떡 벌렸다. 뒤뜰에 사는 닭은 총 열다섯 마리였다.


    그중 수탉 세 마리는 열두 마리 암탉과 달리 소란했다. 각각 이름이 있었지만, 나와 남편은 그들을 당시 닭장 안 위계질서에 따라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란 별명으로 불렀다. 세 마리가 끊임없이 권력다툼을 벌인 탓이다. 우두머리 수탉, 검푸른 깃털의 레닌보다 갈색의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싸움의 주축이었다. 다툼은 여름방학 석 달 내 쉼 없이 이어졌다.


    레닌은 세 마리 수탉 중 크기는 제일 작지만 가장 멋지게 생긴 녀석으로 투계 혈통임에도 평소에는 제법 온화했다. 저를 챙겨주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고, 암탉을 크게 괴롭히는 모습도 본 적 없다. 길고양이를 비롯한 천적이 침입하면 물러서는 법 없이 앞으로 나서 다른 닭을 보호하려고 들었으며 새벽이 아니면 큰 소리로 울지도 않는 훌륭한 리더였다.


    다른 닭은 가족이 다 같이 키우는 것으로 취급됐지만 미모가 빼어났던 병아리 레닌은 식구 하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일찍이 이름을 받은 덕에 그 사람 소유로 여겨졌다. 수탉인 줄 모르던 때 붙인 이름이 여자 이름이라 다 크고도 he대신 she로 불리는 일이 있었지만, 닭이니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스탈린은 셋 중 가장 욕심 많고, 호전적인 닭이었다. 놈이 올라탔던 암탉은 늘 다른 두 수탉에게 시달린 경우보다 날개 깃털이 왕창 빠져있고 상처가 컸다. 모이며 물을 가지고 나간 사람에게 함부로 덤벼대며 못되게 굴어서 사람이 다친 일도 있었다. 거기에 천지분간 못하고 밤낮없이 큰 소리로 시끄럽게 울어재껴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


    툭하면 레닌에게 덤볐다 작살나고 트로츠키며 다른 암탉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집에 있는 사람끼리 저것만 잡아다가 어디 야지에 버리고 오자는 둥, 총으로 쏴서 정리해버리자는 둥 별별 소리를 다 했다. 그런 논의가 실행에 옮겨지지 않은 건 첫째, 처벌권 가진 집주인 부부는 여름 내 긴 휴가를 가서 집에 없었고, 둘째, 먹지도 않을 거면서 산 목숨 빼앗기가 께름칙해서였다.


    트로츠키는 덩치는 제일 크면서 맨 어디서 피를 흘리는 녀석이었다. 마냥 온화하거나 사나운 것도 아니고, 목청이 크지도 않았다. 레닌이 다가가면 움츠릴 뿐 피하지 않았지만 스탈린이 가까이 오면 대체로 도망쳤다. 제 분풀이한다고 암탉을 괴롭혔으면 트로츠키도 영 보기 싫었을 텐데 그렇지는 않아서 어딘가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트로츠키가 마냥 매가리없이 지낸 건 아니다. 사나흘에 한 번씩 나름대로 전의를 가다듬어 스탈린에게 덤볐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모를 일이었는데 결과는 매번 처참했다. 인간이 뭘 해주는 것도 이상해 그냥 뒀더니 찍히고 쪼여 다치다 못해 여름의 끝무렵에는 왼쪽 발가락 하나를 잃었다.


식사중인 닭들

    변치 않을 것 같던 세 마리의 서열이 바뀌는 장면을 본 건 우연이었다. 여름방학 마지막 날,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다 싸서 차에 실어두고 마지막으로 닭을 보러 갔는데 스탈린과 레닌이 싸우고 있었다. 스탈린이 레닌에게 싸움을 거는 것은 드문 일이라 무슨 일이야? 하고 보고 있으니 웬일, 레닌이 패했다.


    몇 년 동안 있은 적 없던 일을 목격한 나는 곧장 집안으로 달음박질해 소식을 전했고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말도 안 된다, 레닌은 불패다, 그럴 리 없다는 반응이 주였다. 하지만 내가 떠난 후 관찰된 닭장 안의 위계는 내가 본 바를 충실하게 증명했다. 레닌은 물러났고,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다.


    우두머리가 된 스탈린은 레닌에게 제법 관대했다. 레닌은 단 한 번의 패배에 큰 충격을 먹었는지 스탈린에게 굳이 덤비지 않았는데 그 점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둘이 목청 높여 싸우는 일은 드물었고 심지어 스탈린의 아량으로 종종 같은 홰를 공유했다.


    트로츠키는 어떻게 됐냐고? 닭장 밖으로 망명했다. 정확히는 스탈린의 강도 높은 괴롭힘에 한밤중에도 닭장에 드는 대신 정원 노지를 떠돌기 시작했다. 안전을 위해 닭장에 들이려 사람이 온갖 수를 썼는데 듣지 않았다고 한다. 천적의 위협과 가을 겨울 추위보다 닭장 속 괴롭힘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별명값 하네…. 소식을 전해 들은 내 반응이었다. 역사와 어느 정도 닮았다고 할까. 남편 고향의 겨울은 매서워서 닭장 안의 닭도 난방기 없이는 얼어 죽기 십상이다. 인간 트로츠키는 따뜻한 멕시코로 갔지만 닭 트로츠키는 눈밭에 있어, 인간 일동은 따로 모이를 챙겨주면서도 그가 곧 죽겠거니 했다.

    

    뜻밖에 트로츠키는 일 년 여의 시간을 닭장 밖에서 살아남았다. 전보다 마르고 발에 동상의 흔적이 남는 등 몰골이 상했지만 날이 풀리자 끝끝내 건강을 회복했다. 그 후 일어난 일을 설명할 말은 두 가지다. 운명, 그리고 인내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남편 고향의 겨울

    새 바람은 레닌의 주인이 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시작됐다. 본가를 나가 살 곳과 할 일을 찾아 정착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반려견을 들였다. 어린 핏불 테리어였다. 몇 달이 지나는 동안 개와 주인 사이는 더 가까워졌고 주인은 개를 조금이라도 더 챙기고 싶어 했다.


    그러다 시골 마당에 풀어 키우는 유기농 닭을 떠올린 것이다. 암탉이야 알을 낳지만 수탉은 딱히 쓸모가 없다. 그런데 세 마리나 있지 않던가. 이제 와서 사람이 먹기에는 나이가 들어 고기가 질기고 살도 없지만, 개에게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고기부터 먹이고 뼈를 발라 육수를 낸 것으로 강아지 보양식도 만들 수 있을 텐데.


    결단을 내린 레닌의 주인은 집에 전화를 걸어 자기 뜻을 전했다. 자기가 직접 자기 닭, 그러니까 레닌을 잡을 테니 수탉을 내어주기만 하면 된단 말에, 가족은 레닌은 두고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잡으라고 했다. 레닌을 아낀 기억이 있는 레닌 주인은 흔쾌히 동의했다. 일사천리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죽을 날이 잡혔다. 처음 통화한 날에서 삼 주 지난 토요일이었다.


    닭을 잡기로 한 날보다 하루 먼저 고향에 온 레닌 주인은 잡을 닭을 미리 살피러 갔다가 고심하며 돌아왔다. 스탈린 한 마리만 잡아서는 벌써 커진 핏불에게 양이 적을 듯한데, 트로츠키는 몰골이 흉한 게 아무래도 병이 있는 것 같아 찜찜해 개에게 먹이고 싶지 않단다. 마음이 아프지만 레닌을 잡겠다고 선언했다.


    식구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세 수탉과 정든 게 없는 나만 그렇게 됐구나 하고 말았다. 결국 레닌의 주인이 레닌의 주인인지라 그 의지대로 가게 됐다. 새옹지마라고, 트로츠키의 고생이 트로츠키를 살린 것이다.


죽음을 맞는 중인 레닌(우)과 스탈린(좌)

    다음날 오후, 레닌 주인은 어찌어찌 뜻한 바를 이뤘다. 닭 잡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만 했지 본 적 없던 나는 뒤를 따라다니며 지켜봤다. 조류를 사랑하는 남편은 일하러 도망갔다. 산 닭을 붙잡는 것부터 고기를 정리해서 포장하는 과정을 조금이지만 거들고 나니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재를 대하게 됐다.


    모든 일이 원만했다 적고 싶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레닌 주인은 닭을 잡아본 적이 없었고, 고통 없이 보내기 위해 유튜브 등으로 공부를 해 온 게 다였다. 스탈린을 보내는 건 원만했으나 레닌을 보낼 때 실수를 저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심적으로 미안하던 터라 그랬는지 울며 자리를 떠서, 그 손위 형제 중 하나가 도끼로 마무리를 지었다.


    레닌과 스탈린이 떠난 후, 트로츠키는 자연스럽게 닭장으로 복귀했다. 두 계절이 지나자 잘 먹고 잘 자고, 평안해서 그런가 트로츠키의 때깔은 생전의 레닌 못지않게 훌륭해졌다. 암탉 중에 병사한 닭이 하나 있어 총 열두 마리가 된 닭 무리는 꽤 오래 평온했다.

    

    열 마리의 새 병아리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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