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지막 권리

by 나나꽃

어떤 인연으로 책 한 권을 선물받았다. 저자인 박충구 선생님이 친필 사인을 해서 주신 그 책은 《인간의 마지막 권리》, 간단히 말하자면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한 책이었다. 곧 닥칠 초고령사회를 걱정하며 안락사니 조력사(助力死)니 하는 말들이 낯설지 않은 때이고, 개인적으로 인간의 생과 사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 때라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해는 나에게 단편적으로나마 죽음에 관해 사색을 하곤 했던(혹은 해야 했던) 시기였다. 아버지가 8년 치매와 1년 반 다리 거동 불능 상태에 있었고, 부당한 형벌과 같은 고생 끝에 이틀간 긴 잠을 자다가 9월 비 오시는 날 고요히 돌아가셨다. 뉴탐사로 시작해 여러 사람들과 연결되었던 것은 이 책을 만나기 위한 인연이었을까. 《인간의 마지막 권리》는 그 몇 년간 가졌던 죽음에 관한 사색의 조각들을 모아 형태를 갖추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정서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윤리적·철학적 관점에서 고찰한 책이라, 내가 가지고 있던 ‘죽음과 죽음을 대하는 방식’에 관한 의문점들에 관해 이성적 판단과 정리를 하는 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된 것 같다.


10년 전 광화문의 한 영화관에서 <아무르>라는 영화를 볼 때만 해도 죽음은 나에게서 멀었고, 반신불수의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남편이 커다란 베개로 잠든 아내의 얼굴을 덮고 삶이 아닌 삶을 마감시켜주는 장면이 힘겹고 무겁기만 했다.


2019년 EBS 국제다큐영화제에서 인상적으로 보았던 다큐멘터리 <우아한 죽음>도 생각난다. 근위축증을 앓는 72세의 영국 여성이 혼자 발을 딛고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어진 상황에서 자발적 죽음을 선택하고, 스위스 안락사 클리닉의 의사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의견을 교환한다. 그러다 마침내 그곳으로 가 인간 삶의 자연스런 마지막처럼 두려움 없이 주사기 벨브를 스스로 엶으로써 생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 마침표가 커다란 느낌표로 바뀌어 내 가슴에 불쑥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저런 죽음의 방식도 있구나... 친구들에게 이 영화 얘기를 해주자 “나중에 손잡고 같이 스위스로 가자”는 친구가 있어 깔깔 웃기도 했다. 특별히 기억할 만한 영화였으나 그때까지도 죽음은 나에게 가깝지는 않았다.


신체의 오른쪽 기능이 거의 마비된 아버지는 휠체어도 스스로 탈 수 없었고, 팔다리가 저린 것을 참고 왼손으로 식사를 해야 했다. 힘을 써야 하는 모든 움직임을 엄마에게 의존하며 조금씩 조금씩 나빠지는 상태로 나아갔다. 다행히 아버지의 치매는 매우 착한 것이어서 잘 웃는 아기처럼 주변에 해피 바이러스를 퍼뜨리곤 해 사랑스러웠다. 엄마도 남편을 “우리 애기”라 부르며 놀라운 헌신으로 아버지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낯가리는 아버지를 위해 요양보호사도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연로한 엄마도 체력의 한계에 다다라 고통의 무게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그쯤 되니 케어가 힘든 아버지를 돌보러 오겠다는 요양보호사도 구하기 힘들었다. 삼남매 중 유일하게 싱글인 나는 부모님과 따로 살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척척 잘 돌보는 데 무능해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즉, 아버지 곁엔 엄마밖에 없었다. 우리 가족 모두가 담담한 척했지만 모두가 비참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치매 환자인 아버지가 엄마에게 “밤에 나 잘 때 죽이라”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했다 하여 가슴이 무너졌던 날도 있었다.

영화 <아무르>를 떠올리며, 아버지가 고요히 잠든 밤 아무도 모르게 베개로 아버지의 얼굴을 덮는 장면을 생각하다 죄책감에 몸을 떨었고, 친족 중 의사인 사람에게 아버지가 조용히 숨을 거둘 수 있도록 약물을 주입해 달라고 간청하는 상상을 하다 고개를 젓기도 했다. 어쨌든 ‘죽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것이 가능하다 한들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는 한국에선 범죄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결국 아버지를 집에서 가까운 요양원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는데, 마치 다 알고 있었던 듯 그 날부터 아버지는 이틀을 고요히 잠만 주무시다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그렇게 보내드린 후 일 년 2개월, 《인간의 마지막 권리》를 읽고 난 지금은 언젠가 맞을 나의 죽음에 관한 한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내 손에 쥐고 불합리한 통념과 윤리를 거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1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서는 어쩔 수 없는 두려움에 움츠러들면서도 좀 냉정해지기도 했고(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2부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서는 나의 두서없는 생각의 조각들이 철학적 분석과 새로운 생명 윤리에 대한 이야기를 골조로 형태를 잡는 것 같았다. 좀 더 근거를 가지고 죽음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되었다고 할까. 죽음의 여러 양태, ‘매우 짧은 죽음이 있는가 하면 매우 긴 죽음이 있고, 주체적으로 대면하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끌려가는 죽음이 있다’... 여기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는 이제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머지않아 그렇게 할 수 있는 제도와 사회 시스템이 갖추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시, 소설,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인용문들이 나오는데,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책을 말랑말랑하게 하면서 읽는 재미도 주었다. 예를 들면 T. S. 엘리엇의 《황무지》 도입부에 나오는 아름다운 무녀 시빌에 대한 짧은 이야기 같은 것. 그리스 신화 속 쿠마의 무녀 이야기 자체에도 빠져들었지만 그 짧은 시에 담긴 엄청난, 아이러니한 진실에 눈을 크게 뜨기도 했다. 그래, 의미 없는 생명을 오래 오래 연장하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이 또 어디 있겠어.


내가 의미 없는 생명을 거부하고 죽음을 준비할 시점은 언제가 될까. ‘신체적으로 독립적 삶이 불가능해지기 직전’, 동시에 ‘정신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때’가 아닐까. 아직도 엉뚱한 상상 내지 공상을 잘 하는 나는 다음과 같은 ‘죽음 준비’ 장면들을 떠올려본다.


1.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간다. 이야기가 깃든 물건들은 ‘보통이었던 나의 삶, 나와 함께했던 것들’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써 차근차근 기록으로 남긴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삶을 정리하고 “이제 됐다” 하기 위해서.

2.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것을 빼고 얼마 안 되는 재산은(재산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지만) 그 시점에 ‘도움이 가장 필요한 곳’을 엄선해 기부한다.

3.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이 생에서의 나를 위한 선물을 아낌없이 해준다.

4. ‘원색’으로 드레스코드를 정하고 멋진 파티를 연다. 한 번은 영원한 내 편인 가족과, 또 한 번은 서로 사랑했던 친구들 그리고 아름다운 지인들과.

5. 작별 인사를 하고 싶은 이들에게 천천히 감사의 손편지를 쓴다. 좀 웃기게.

6. 마지막 순간은 실전에서 정해야 할 것 같다. 아마도 스위스 디그니타스로 가서 의사의 조력을 받거나, (한국에서 적극적 안락사가 허용된다면) 백합꽃으로 가득 채운 방에서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틀어놓은 채 따뜻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역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아름답게 저세상으로 향하거나. 작은 꽃잎들이 나른나른 춤추며 떨어지는 봄이면 더 좋겠다.


쓰다 보니 가슴이 두근두근. 아직은 겁이 난다. 책을 한 번 더 읽어야 하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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