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uthering Heights
아주 거대한 가습기를 틀어놓은 듯한 날씨였다. 열이는 '전형적인 영국날씨'라고 했다. 바닷가 근처에 있는 세븐시스터즈를 즐기기에 썩 좋은 날씨는 아니지 않아? 비오는대로의 정취가 있는거지 뭐, 라고 땅끝을 툭툭차게 만드는 그런 아침이었다.
빅토리아역에서 열이를 만나 9시30분 기차를 타고 이스트본으로 출발했다. 런던에서 2시간 거리인 이스트본은 영국 남동부 서식스 지방에 있는 작은 도시다. 얼마나 시골이냐면 버스정류장 이름이 죄다 무슨 연못, 누구네 농장, 서쪽 산골짜기, 내리막길.. 이런 식이다. 하긴 east bourne 이라는 이름 자체도.
이곳의 관광스팟, 새하얀 백악절벽 seven sisters로 가려면 이스트본 기차역에서 내려 12A나 12X버스를 타고 다시 30여분정도 더 들어가야한다. 날씨가 흐려서 눈앞은 온통 운무였다. 이래가지고서야 뭐나 보이겠나, 하는 찰나에 버스는 우릴 웬 초원벌판에 떨궈주었다. 아주 넓고 습한 목초지를 지나 한참을 걸어가면 서서히 바다내음이 느껴지고, 그 순간 파란 바다와 하얀 절벽을 마주하게 된다. 비가 안오거나 해가 쨍쨍하면 더 아름다웠겠지만 출발할 때 말했듯 또 나름의 맛이 있는게지. 하지만 석회로 된 땅이 비를 맞아 지점토 반죽처럼 된 탓에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 절벽 위로 올라가보진 못했다. 최근에 한국인 유학생이 절벽 끝에서 점프 인증샷을 찍으려다가 추락해 사망한 사고가 있었대서, 못 올라가는 건 아쉽지만 그 또한 우리 운명이겠지, 했다.
조약돌 해변가에 앉아 비가 흩날리는 바닷가와 절벽언덕을 보고 있자니 문득 왜 <폭풍의 언덕>같은 소설이 나왔는지 이해가 됐다. 캐시랑 히스클리프도 이런 풍경을 보며 살았겠지.. 매일보면 그리 될 수 밖에 없어. 근데 야 날씨같은거에 인간 성정이 이리도 좌우되는 게 너무 신기하고 또 참 인간이란 게 연약하지 않으냐.. 등등의 이야길하며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