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집 May 01. 2019

발달 장애인의 언니로 산다는 것

처음 꺼내는 이야기


가면


본격적으로 말해본 적은 없다. 가끔 술 마시고 친한 사람들에게나 털어놨었나. 내 동생이 발달 장애인이라는 사실 말이다. 나와 두 살 차이 나는 내 여동생은 지적 장애 3급이다.


장애인의 자매는 모범생이 될 확률이 높다. 부모님이 나에게 대단한 것을 요구하거나 부담을 지운 적은 없다. 하지만 별거 없는 가정에 장애인 동생이 있는 장녀라면 부모에게 폐 끼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몸소 체화한다. 나는 실제로 전교 순위권에 드는 모범생이었기에 장애인 동생과의 대비가 더 두드러졌다. 동생의 장애를 아는 주변인들은 내가 공부도 잘하면서 동생도 잘 돌보는 의젓하고 똑똑한 언니라고 칭찬했다. 


나는 그들의 칭찬을 내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잘 다루는 편이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장녀로서, 가난과 동생의 장애로 불거지는 타인의 연민을 다루는 것에 익숙했다. 장애인의 날 행사를 하면 동생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대학 원서를 쓸 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나의 관심을 보여주기 위해 동생의 장애를 팔았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내 동생을 잘 돌보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동생이 나를 돌본 적이 더 많다. 엄마와 아빠가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날에,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두 귀를 꾹 막았다.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울고 있으면, 옆에서 동생은 울지도 않고 댕글한 눈으로 “언니 울지 마”하고 안아주는 사람이다. 동생은 10살 이후 나이를 먹지 않지만 어른스러움은 나보다 훨씬 넓고 깊다. 


가까운 사람들은 내 동생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두 안다. 동생은 나와 모든 면에서 정반대다. 내가 수줍어서 햄버거 가게에서 콜라 리필도 못하고 엄마 뒤로 숨는 내성적인 사람이라면, 동생은 외할아버지 환갑잔치 무대 한가운데서 개다리춤을 추며 박수 환호를 받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도 동생이랑 이마트에 가면 시식 코너에서 동생을 앞세워서 소시지를 얻는다. 동생에게는 언제나 웃음과 밝은 생기가 넘쳐흐른다. 동생은 아빠와 엄마와는 다르게, 나에게 한 번도 상처를 준 적이 없다. 동생은 남에게 상처 주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동생은 학창 시절 내내 특수반 내지 도움반으로 불리는 반에 격리되어 비슷한 발달 장애인들과 같이 수업을 들었다. 나는 동생과 초/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지만, 왠지 친구들에게 내 동생이 도움반에 다닌다고 당당히 말하지 못했다. 동생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 엄마는 내게 동생이 어느 학교에 가면 좋겠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올 수 있었을 테지만 나는 완곡하게 다른 학교가 동생에게 더 좋은 이유를 댔다. 동생은 그렇게 불과 200미터 차이가 나는 다른 고등학교의 특수반에 갔다. 나는 그렇게 떨어진 동생과의 1년을 생각하면 처참하게 부끄러워진다. 이 부끄러움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을 안다.




약점


언젠가 회사에서 큰 행사를 운영한 적 있다. 제주도에서 신입사원들과 수련대회를 하는 행사였는데, 여느 때와 같이 젊은 청년들이 제주도 지역사회 곳곳에 흩어져 일하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나는 제주도의 지적 장애인 청소년들과 '플레이 케이팝 테마파크'와 '코끼리 쇼'에 동행하는 봉사의 보조 교사로 가게 되었다. 


이미 현장에 인솔자와 사회복지사가 대기하고 있고, 사전 답사도 완료되었다는 말과는 다르게 현장은 엉망이었다. 장애 아동이 대기할 공간도 없고, 좁은 계단을 수십 명이 올라가야 했으며, 이동 동선이나 담당 인원이 불명확 한했다.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는 행사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현장을 수습하느라 애썼다.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장애 아동을 처음 보는 신입사원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짧은 시간이라도 그들과 교감하기 위해 열심히 발 벗고 뛰었다.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도 애를 쓰는 신입사원들과 코끼리를 좋아하는 장애 아동들을 보며, 난 몇 번이나 고개를 들고 눈물을 꾹 참았다. 


보여주기식 행사에 장애인들이 동원되고 있다는 생각에 행사가 끝날 때까지 우울했다. 행사가 끝나고 팀과 업체의 회식 자리는 몇 억짜리 행사가 무사히 완료되었음을 자축하는 자리였다. 볼장다본 팀원들이었기에 그간 미뤄온 피드백과 회포를 푸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술을 마시며 CSR 행사의 미진한 준비와 장애인 관련 봉사의 까다로움을 토로했다. 내 동생의 얘기도 하면서 이럴 바엔 차라리 장애인 관련 봉사활동을 없애는 게 낫다고 지적하는 순간, 친한 팀원이 내 말을 끊었다. 아직까지도 나와 가장 친하고, 내가 사랑하는 그 동료는 나에게 말했다. 


“니가 그런 얘기를 말하면,
회사 사람들은 그걸 너의 약점으로 생각해."


장애인 동생이 있다는 것은 업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생활일지라도 회사에서 약점이 된다. 평탄한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적당히 잘 사는 모습을 세련되게 꾸며내야 한다. 그래야 얕잡히지 않는 사회적 평판을 가질 수 있다. 그때 팀원이 한 말, “너의 약점을 굳이 말하지 않기를 바랐어”라는 말은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말이었기에 더 아픈 상처가 되었다. 


하지만 누가 나를 약하게 본다고 내가 정말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에 신경 쓰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질문 


노들장애인궁리소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철학자 고병권은 어떤 강의에서 잊을 수 없는 질문을 받는다.


“오빠가 지적 장애인이에요. 
선생님, 오빠에게도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그의 책 <묵묵>에서 이 질문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나도 선생님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선생님, 제 동생도 철학이, 공부가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제 동생은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데요? 제 동생은 자기 인생을 주체적으로 이끌 능력도 없고, 결혼도 하지 못할 거예요. 동생은 잘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잘 살 수 있을까요? 제 동생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보통의 장애아를 가족으로 둔 사람들은 비슷한 심경을 공유한다. “장애아를 낳지 않을 수 있었다면? 선택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 다시 정상적인 아이와 내 자식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거야. 나는 바로 이 아이를 원해.” 모든 장애인의 가족은 각자 고유하고 경이로운 서사를 가지고 있다. 발달장애인 동생의 언니로 산다는 것 역시 슬프거나 동생을 위해 희생하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평범하지만 경이롭고 반짝거리는 우리 자매만의 이야기가 손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나와 동생은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 비록 내 동생은 자신의 삶을 풀어나가는 의사 표현의 능력의 떨어지지만, 우리는 이미 그 자체로 존엄하고 장애를 받아들이며 산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의 김원영 변호사는 장애아를 키운 부모의 이야기, 형제 자매의 경험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에서 소외된 채 돌봄 노동을 전담하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공유되지 않는 이상 장애인은 그저 사회와 가족의 짐으로만 여겨지고, 가족들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사람으로만 인식될 것이다. 이들이 경험한 공생을 위한 갈등과 협력, 때때로 찾아오는 경이로운 순간들, 장애인을 한 사람의 자녀로, 또래로 온전히 받아들인 시간은 그 자체로 고유할 뿐 아니라, 중증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개별자로서의 이야기를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드러내 줄 것이다. 


그 고유한 동생만의 서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는 어쩌면 동생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대신 알릴 수 있을 것이다. 서사가 우리 가족 안에서만 잠식되지 않고,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내가 동생 인생의 공동 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함께하는 일상을 적을 것이다. '잘못된 삶'이 아닌,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평범한 삶'. 우리의 평범한 일상들.




용기


장애인의 언니로 살아간다는 것이 내 자아의 전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회의 마이너리티와 가까이 산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정체성에 영향을 준다. 복지와 교육, 정치에 관심이 많아진다. 정치학과에 진학한 이유에도 일정 부분 동생이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지만 그걸 용기 내서 말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나는 항상 생각만 할 뿐 행동하거나 나의 이야기를 공유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런 내가 우리 자매의 이야기를 꺼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트위터에서 어떤 모임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다. 정신적 장애인을 형제자매로 둔 청년들의 모임 '나는'이라는 곳은 그들만의 자조 모임 프로그램인 <대나무숲 티타임>을 정기적으로 꾸려나가고 있었다장애인 형제자매를 둔 비장애인 사람들만의 모임이 있다니, 혼자 지내왔던 나의 고민이 모두의 것이 되고, 소속감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우리들끼리도 만날 수가 있구나.'


'나는'은 그들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은 책 <나는, 어떤 비장애형제들의 이야기>의 서두에서 말한다. "비장애인 형제들은 장애와 비장애의 세계, 또는 정상과 비정상의 세계 사이에서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장애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 방송 등의 미디어에서 주로 조명하는 것은 부모와 장애인 자녀의 관계입니다. "  장애인 형제자매를 둔 비장애인 청년에게는 단순히 "모범생"이나 "반항아" 카테고리에만 포함되지 않는,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때 나는 장애아와 부모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야 하는 것만큼, 형제들의 이야기도 가치가 있고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비록 그것이 한없이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이야기일지라도. 


장혜영 감독의 <어른이 되면>을 읽을 때는 거의 전 문장을 필사해야 했다. 장혜영 감독은 18년간 시설에서 살았던 발달장애인 동생 장혜정 씨를 데리고 나와 함께 살며 겪은 평범하지만 특별한 일상을 영화 <어른이 되면>과 동명의 책, 그리고 "생각 많은 둘째 언니"라는 유튜브로 전한다. 어떤 유년시절을 겪었는지, 탈시설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겪은 수많은 사회의 부조리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유. 나와 똑같지만, 나보다 100배는 용감한 사람의 기록은 나를 미친 듯이 울리고 설레게 만들었다.


언제부턴가 시끄럽게 떠들 필요를 느꼈다. 용기가 생겼다는 게 정확할 것 같다. 왜 진작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텐데. 동생의 도움반을 숨기거나 회사에서 정상가족인 척을 하는 것은 장애인들을 가족 밖으로, 사회 밖으로 데리고 나오지 못한다. 비장애 형제자매들의 자조모임과 장혜영 감독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도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용기를 주었다. 왜냐면 내가 그렇게 위로를 받았으니까. 리고 이렇게 장애인 자매∙형제의 이야기가 백개, 천 개 쌓이면, '발달장애인 언니'라는 것도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이 아닌 나를 설명하는 일상적인 타이틀이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생겼다.



 "탈시설한 동생과 같이 산 지 1년 2개월이 됐어요" 생각 많은 둘째 언니 장혜영과 동생 혜정의 이야기
도대체 이해 안 가는 세상을 그래도 이해해보고자 노력하는 둘째 언니의 유튜브 채널, <생각 많은 둘째 언니> 




미래


어릴 때 내가 생각한 나의 미래는 배우자 남편과 함께하는 2인 가족이었다. 학창 시절의 나는 항상 좁은 집구석에서 탈출해 빨리 서울에 올라가는 것만을 꿈꿨다. 더 먼 미래를 상상해도 내 가족에 부모와 동생은 없었다. 아마 아빠는 나이가 많으니 엄마와 동생이 같이 살지 않을까, 그렇게 막연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었다. 상상만으로도 가족을 버리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나는 지금 동생과 함께하는 미래를 꿈꾼다. 부모가 모두 죽으면 내가 동생의 유일한 보호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책임감과 부담감으로 이 관계를 정의 내리고 싶지는 않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고, 내가 그것을 원한다. 결혼을 생각하지 않게 되면서 이렇게 된 건지, 동생과의 삶을 생각하면서 결혼이라는 선택지가 별로 끌리지 않게 된 건지 순서는 잘 모르겠다. 


둘만 남겨져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와 아빠가 장애인 딸을 남기고 떠난다는 걱정 없이 훗날 편히 떠나시길 바란다. 아마 학창 시절 그랬던 것처럼, 그 애가 나를 구원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얼마 전 동생은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장애등급제 폐지에 관한 포스팅이었다.


30년 넘게 지속되어 온 장애등급제는 획일적인 기준을 통해 장애인의 몸에 등급이라는 낙인을 찍고, 개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서비스로 계속해서 문제 제기를 받아 왔다. 장애인들은 “장애인의 몸에 등급을 매기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며 장애 등급제 폐지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나는 동생이 내게 장애등급제 폐지 포스팅을 보내기 전까지, 등급제가 가진 사회적 낙인의 의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

그리고 내 동생은 내게 이걸 먼저 보내줄 정도로 야무지고 똑똑하다. 오늘도 나는 내가 부끄럽다. 나의 무지와 둔감함이. 같이 살려면, 공부해야 한다. 언제나 부끄러움이 나를 움직인다.





◼︎용기를 준 책들   




이 글도 몇 번씩 다시 읽었다. 동생의 장애를 팔아 연민을 얻는 것에 익숙한 내가 또 자기 연민에 빠진 글을 쓰지 않았는지. 슬픔과 고통을 과장하지 않았는지. 보통 동생과 함께 있는 나는 아주 행복한 사람임을 말하고 싶다. 읽는 사람이 드는 감정을 내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이걸 쓰면서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했다. 후련하다! 우리가 슬퍼해야 하는 것은 더 많은 장애 가족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지체 장애인'이라는 말 대신에 '발달 장애인'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 장혜영 감독의 책 <어른이 되면>의 발췌로 대신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자폐성 장애와 지적 장애를 묶어서 이르는 ‘발달장애’라는 단어는 이미 장애의 특성 자체를 긍정적으로 호명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정신 지체’라는 단어와 견주어 보면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정신이 ‘지체되었다’고 하는 말에는 이미 ‘지체되지 않은’ 정신과의 비교가 담겨 있기에 아무리 적응의 노력을 거듭한다 해도 그것은 미성숙함과 불완전함의 낙인을 벗어날 길이 없다. 반면 발달장애라는 말은 인간 뇌의 발달이 복잡하고 섬세하며 끊임없는 과정임을 상기시킨다. 발달장애는 ‘지체’라는 말이 부여하는 영원한 미성숙의 저주를 벗어나 그 자체로 열심히 ‘발달해온’ 하나의 정신을 부르는 이름이다. 인간의 발달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되므로 발달장애인은 멈춰 선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람이다. 


장애인을 차별하면 안 되는 것을 아는 사람도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람들이 진짜 장애인"이라는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쓴다. 이 역시 장애인을 비하의 대상으로 여기는, 장애인 차별과 혐오의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표현이다.




※ 상단에 사용된 이미지는 James McNeill Whistler의 'Nocturne in Black and Gold'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들이 구독을 해지하기 시작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