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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Apr 28. 2019

사람들이 구독을 해지하기 시작했다

구독형 서비스의 미래


백수의 하루

하루 종일 봐도 시간이 모자라



나처럼 시간이 많은 사람도 아마 없으리라 생각한다. 작년 7월 퇴사한 후, 나는 아직까지 무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프리랜서 작가 내지 디지털 노마드라고 핑계를 대긴 하지만, 우선은 백수의 시간을 호기롭게 만끽하는 중이다. 호치민에서 한달살이를 하며 콩카페에서 글을 쓰는 나의 하루는 보통 이렇게 시작한다. 커피를 내리고 네이버 오피니언에 올라오는 ‘오늘의 칼럼’을 대부분 읽고, 테드 영상 한 편을 본다. 대충 훑기만 해도 짧으면 한 시간, 길게는 두 시간 정도 소요된다. 물론 이 시간은 구독 서비스 이용을 제외한 시간이다.


나는 현재 OTT(Over The Top - 인터넷을 통해 TV 콘텐츠를 볼 수 있는 플랫폼) 서비스로 넷플릭스(월 9,500원)와 왓챠 플레이(월 4,900원), 가족과 함께 POOQ(월 10,900원)을 구독 중이다. 음악은 한때 애플뮤직(월 8,900원), 지니 뮤직(월 4,500원), 유튜브 프리미엄(월 7,900원)을 사용하다 자금상의 문제로 애플 뮤직만 듣는다. 유료 뉴스 콘텐츠로는 여성생활미디어 핀치(월 9,900원)를 구독 중이며, 지난달까지는 개인 유료 뉴스레터인 일간 박현우(월 20,000원)를 구독했다. 심지어 브이앱에서 방탄소년단 멤버십 채널도 정기구독(월 3,000원) 중이다. 무료로 구독한 뉴스레터도 5개 정도(뉴닉, 생각노트, 북저널리즘, 핀치, UPPITY)다. 그래서 내가 이걸 다 보냐고? 전혀. 손도 못 대는 것이 많다.


1년이 가깝도록 혼자 여행하며 누구보다 시간이 넘치는 나날을 보내고 있음에도, 나는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평균 아이폰 사용 시간이 하루 9시간에 육박하는 나지만 시작도 못하고 사기만 한 전자책이 100권이 넘는다. 그 와중에도 리디북스 전자책 월정액 서비스와 시사인 전자책 구독을 고민하는 나는 중증의 콘텐츠 중독자, 구독 서비스계의 호갱이다. 그런데 슬슬, 안보는 콘텐츠가 생기기 시작했다. 구독 경제의 초창기엔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곧 몰아치는 쓰나미에 하나씩 해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은 없는데 볼 건 계속 늘어난다



시간이 없어서

구독을 해지하는 사람들



요즘 구독 서비스의 가입률이 떨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간은 없는데, 읽어야 하는 건 많아진다. 이번 달 안에 읽지 않으면 안 되거나, 계속 돈을 내야 한다. 시간이 생겨도 매달 콘텐츠가 홍수처럼 밀려오기 때문에 봐야 할 콘텐츠가 이자 복리처럼 쌓인다. 현재 내가 구독하는 모든 콘텐츠는 과연 내가 돈과 시간을 들여 볼만한 가치가 있는가.


구독 서비스의 초창기 목적은 "콘텐츠의 큐레이션"에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시간이 없는 현대인들이 정보를 찾아헤맬 시간을 줄여주고, 압축된 큐레이션으로 정제된 콘텐츠를 보여주는 것이다. 경영과 마케팅, 트렌드에 관심 있는 사람은 퍼블리를, 뉴스처럼 빠르게 지식 콘텐츠를 찾는 사람은 북저널리즘이나 뉴닉을 구독한다. 그런데 이젠 그 큐레이션된 콘텐츠마저도 너무 많아 '큐레이션의 큐레이션'이 필요할 지경이 되었다. 구독 서비스 범람의 시대에 '선택과 정리'는 다시 독자의 몫이 되었다.



내 말이


콘텐츠의 양도 문제지만,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채널의 수도 독자 입장에서는 산발적이다. 나는 네이버 뉴스도 들어갔다가, 즐겨찾기한 언론사 사이트와 블로그에도 들어가고, 핀치나 브런치같은 개별적인 플랫폼 사이트, 페이스북, 브이앱, 테드, 별도의 어플이 필요한 어플 등...하루에도 수많은 채널에 접속한다. 가끔은 내가 돈을 지불했음에도 종종 그 플랫폼의 존재 자체를 까먹기도 한다. 메일함을 사용하는 뉴스레터는 구독자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그만큼 쉽게 패스하고 넘어갈 수 있다. '안 읽은 메일' 표시가 거슬릴 때 한꺼번에 읽음 처리를 하고 넘어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읽지 못하고 쌓이는 뉴스레터들


솔직히 말하면 조금 피곤하다. 그렇게 구독자들은 하나씩 정기구독을 해지하고 있다. 게다가 나처럼 풀타임 백수가 아닌, 일반적인 직장인들은 출퇴근 길, 밥 먹을 때 등 파편화된 시간에 콘텐츠를 본다. 독자의 시간과 데이터 사용량은 제한되어 있고, 매달 콘텐츠에 투자 가능한 돈도 마지노선이 있을 것이다. 요컨대 구독 범람의 시대에서는 좋은 콘텐츠만 살아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바쁜 현대인이 해지하지 않을 만한 좋은 콘텐츠는 무엇일까.




구독형 서비스의 미래

나라고 어떻게 알겠어



뭐가 좋은 콘텐츠인지 나라고 어떻게 알겠냐마는, 적어도 내가 앞으로 해지할 일이 없어 보이는 콘텐츠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취향저격,

대체 불가능한 콘텐츠 큐레이션


긴 비행을 준비할 때는 넷플릭스에서 미리 스탠드업 코미디를 저장해둔다.


사실상 내가 스탠드업 코미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플랫폼은 넷플릭스와 유튜브다. 게다가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를 꽤 괜찮은 번역으로 보고 싶다면? 내 선택지는 넷플릭스밖에 없다. 해나 게즈비의 <나네트>나 앨리 웡의 <베이비 코브라>, 크리스테라 알론소의 <유리천정 깨는 여자>, 포춘 핌스터의 <지금 웃기러 갑니다>, 엘렌 디제너레스 <공감능력자>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여성 코미디언이 직진하는 강렬한 코미디를 나는 대부분 넷플릭스에서 접했다.


넷플릭스는 이렇게 내 관심사를 완벽하게 파악하면서도,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이 곳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우면서, 내 취향에 딱맞는 콘텐츠를 추천하는 곳. 나는 스탠드업 코미디 때문이라도 넷플릭스를 해지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내 가치관을 견고하게 만들어줄

깊고 진한 콘텐츠


여성생활미디어 <핀치>에서 좋아하는 기획물


꽤나 많은 기사와 칼럼을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보는 편이다. 하지만 어떤 글을 읽기 전/후의 내가 바뀌었다고 느낄법한, 내 세계를 뒤흔드는 글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나는 여성생활미디어 <핀치>에서 그런 기획 시리즈를 꽤 자주 접했다.


<여성 시인 길어올리기> 시리즈를 통해서는 정한아, 김이듬, 진은영 시인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시 세계는 물론이고 여성 작가이자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과 태도에 대해 배웠다. <핀치x헤이메이트- 2018년 여성 엔터테인먼트 특집>을 통해서는 영화, 드라마, 예능, 케이팝 등 대중문화 전반을 여성주의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더 나은 미디어를 소비하고 생산해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런 콘텐츠는 그저 "돈값하는" 콘텐츠로 부르기에 부족하다. 핀치는 내가 필요한지도 몰랐으나 내게 필요했던 콘텐츠를 제공한다. 세계에 대한 깊은 전문성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독자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통찰력 있는 콘텐츠. 이런 콘텐츠를 볼 수 있다면 월 9,900원이 아깝지 않다.




무한한 덕질의 세계를

가속화시켜줄 콘텐츠


브이앱에 부은 돈..


나는 방탄소년단 팬이다. 그리고 네이버 브이앱에는 방탄소년단의 무료 콘텐츠가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왜 또 돈을 내냐고? 월 3,000원의 멤버십을 결제하면 멤버십 팬에게만 제공되는 사진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멤버십과는 별개로 방탄소년단 여행기 '본 보야지'나 실시간 콘서트/팬미팅 라이브 등 브이앱 자체 콘텐츠도 직접 돈을 내고 본다.


내가 돈을 내는 이유는 아미와 같이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팬질의 미학은 혼자 떠드는 게 아니라 팬덤 안에서 실시간으로 함께하는 "같이 달리기"에 있다. 팬들이 다 콘서트 생방을 달리는데 나만 안 볼 수는 없다. 다들 굿즈 사는데 나만 안 살 수 없다. 나 같은 경우는 그게 '방탄소년단'이지만, 누군가는 야구, 드라마, 애니 등 뭐든 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애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인 팬덤(공동체), 그 커뮤니티에서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묘미는 덕질을 해본 사람만 안다. 비록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호구가 되었다고 느낄지언정, 방탄을 아미와 함께 볼 때 나는 행복하다...





이제 나는 단순히 정보를 취합하거나, 시장의 흐름을 알려주는 정도에서 그치는 콘텐츠에는 관심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취향을 저격하고 시야를 확장시켜줄 대체 불가능한 콘텐츠, 내 가치관을 튼튼하게 다져줄 전문성과 통찰력을 갖춘 콘텐츠, 혹은 공동의 취향을 가진 사람끼리 커뮤니티를 이뤄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콘텐츠다.


즉 나는 "당신이 아마 좋아할 것 같아요" 정도의 큐레이션이 아니라, "니가 좋아 죽을 수밖에 없을걸?"과 같은 콘텐츠를 원한다. 나에게 저스트핏한 콘텐츠에는 앞으로도 기꺼이 돈을 투자할 수 있다. 애매한 콘텐츠에 시간을 쏟기엔 이미 나는 너무 많은 돈을 허공에 뿌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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