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부대찌개 그 동네요.
고향에 대해 소개할 때는 대충 이렇게 말한다.
“송탄인데.. 평택 아세요? 그쪽이에요. 네, 맞아요. 부대찌개 있는 곳.”
송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안다고 해도 송탄 부대찌개 수준이다. 좀 더 안다는 사람은 미스리, 미스 진 햄버거, 백종원도 왔다 갔다는 중국집 영빈루, 수원과 천안 어드메에 있는 곳 정도 언급한다. 그들은 주로 카투사와 공군 등 이 곳에서 군 생활을 했던 남자들로, 송탄에서 군 복무하던 시절의 에피소드가 하나씩 있다. 사실 송탄은 공식적인 행정 명칭은 아니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경기도 평택 지역에 있었던 지역’이라고 과거형으로 뜨는, 옛 지명이다.
송탄이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된 건 1914년이라고 한다. 이전까지 송장면과 탄현면이었던 지역을 행정구역 개편을 하며 '송탄면'으로 합쳐 쓰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1963년에는 '송탄읍'으로, 1981년에는 '송탄시'로 승격했으나, 1995년 송탄시는 평택시로 흡수되었다. 평택시는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확장된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두 개의 출장소를 설치했고 그중 하나가 송탄출장소다. 송탄출장소의 관할 지역은 평택시 면적의 1/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후 송탄 사람들의 주소지는 평택시로 바뀌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송탄'에 산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 모호하니 남들에게 소개할 때는 제일 먼저 “송탄 아세요?” 운을 띄우고 모르면 평택이나 송탄 부대찌개 얘기를 하는 것이다.
광역시나 확실한 명소가 있는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본인의 고장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궁금해진다. 광안리요, 하회마을이요, 정부청사요, 뭐 이렇게 주섬주섬 동네 시그니처를 설명하지 않아도 듣는 사람이 알아서 “아 ~ 거기가 고향이시구나” 할 테다. 하지만 인구가 애매하게 적거나, 별다른 특징이 없는 곳이 고향인 사람들에게는 내가 자란 고향도 한국지리 지도 어딘가에 붙어있는 도시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고군분투의 시간이 약간 좀 길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이거나 인구수가 적은 소도시거나 별다른 특징이 없는 고장일수록 일반화를 당할 확률이 높다. 나의 경우엔 100퍼센트의 확률로 미군부대다.
부대찌개로 유명한 지역(의정부, 동두천)이 그러하듯 송탄은 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오산 공군기지라고 불리는 K-55*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설치됐다. 송탄이라 하면 이 K-55가 있는 부지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피난민과 전재민이 정착하고, 미군 부대가 설치된 기지촌 중심으로 도시 인프라가 설계되고, 기지가 확장되고 재개발이 진행되며 원주민들이 쫓겨난 역사를 가진 도시. 송탄의 역사는 한국 전쟁 이후 한미 관계의 역사와 함께한다.
*'송탄'에 있는 K-55를 '오산'공군기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시 대부분의 지도에는 오산리만 표시되어 있었고, 송탄(Songtan) 보다 오산(Osan)이 영문으로 표기할 때 철자 수가 적고 발음하기 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송탄/평택에서 살았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학창 시절 중간고사가 끝나고 놀러 나가는 '시내'는 신장 육교 부근의 철길 근처였다. 신장 쇼핑몰 거리는 경부선 철길에 의해 동서로 나뉜 지역 중 미군용 철길이 부대 정문까지 지나가는 거리다. 이 곳엔 미군을 상대로 영업하는 옷가게와 술집, 클럽이 즐비해 이태원같이 이국적인 분위기가 난다. 중학교 때만 해도 친구들과 '놀러 가자'의 목적어는 언제나 미군부대였다. 햄버거를 먹고, 캔모아를 가고, 팬시점에서 문구류를 사고, 노래방을 가고, 화장품 가게를 가고 쇼핑을 했다. 하지만 늦은 저녁에는 미군들이 가는 안쪽 골목은 걷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그곳엔 영어 간판이 써진 클럽과 술집, 온갖 미국용 옷가지와 캐리어, 액세서리 가게, 문신 집 그런 것들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 집에서 노닥거리면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가 익숙하게 들렸다. 평생 전투기 이착륙 소리를 듣고 자란 가정에게 비행기 소리는 이미 생활의 하나로 녹아들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주행로와 가깝게 사는 세대는 전투기가 뜨면 전화 통화를 할 수 없고, 아이들은 TV를 보다가도 소음에 놀라 울음을 터트렸다. 학교 수업에 지장이 가는 건 물론이고, 가축들이 유산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탓에 송탄에서는 전투기가 이착륙 소음 공해에 대한 소송이 흔하다. 얼마 전 우리 집도 변호사로부터 우편물을 하나 받았다. 소음 공해 소송 승소 후 지급되는 배상금에 대한 서면이었다.
이륙 소리 못지않은 굉음이 들릴 때가 또 있다. 7월 4일이 미국 독립기념일이라는 사실은 송탄에 오래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 안다. 부대 정문 쪽에서 매년 불꽃놀이를 하기 때문이다. 비행기 소리는 싫지만 폭죽 소리가 날 때는 왠지 아이처럼 설렌다. 벌써 올해의 반년이 흘렀구나를 체감하는 한편, 예쁜 불꽃을 볼 생각에 떨리는 마음으로 서둘러 옥상으로 올라간다. 주택 옥상이나 먼 아파트 난간을 보면 나처럼 똑같은 소리를 듣고 나온 동네 주민들을 볼 수 있다. 어릴 때는 우리 집 옥상에서도 불꽃이 잘 보였는데, 요즘엔 모텔같이 높은 건물이 많이 생겨서 아련한 꼬리 불빛만 보인다.
동네에선 미국인들도 자주 본다. 이 곳엔 미군들의 가족이 많이 사는 거주촌이나 아파트가 많다. 송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서울에 가는 버스를 타면 1/5는 미국인이다. 당연히 주변에는 미군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흔하다. 국제교류센터에서 주한미군과 송탄 시민과의 교류를 활성화하는 업무를 하는 친구들도 있고, 부대에서 몇십 년간 흑인들을 대상으로 라이브 바를 하는 아빠 친구도 있다. 장사가 잘 되던 시절은 이제 십여 년 전 옛날이 됐지만 아직도 미군 부대에서 자영업을 하는 사람을 송탄 사람이라면 다섯은 댈 수 있다.
초등학생 때 소문이나 무서운 이야기를 퍼트리길 좋아하는 애들은 전쟁이 나면 우리 동네에 핵이 가장 먼저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주워듣고 아는 척하며 말했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군부대 근처 사는 애들에겐 흔한 도시괴담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애들은 신창원이 우리 학교 근처의 장애인 수용 시설에 180만 원을 기부했다는 얘기도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어린 나이에도 미묘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화려한 옷을 입고 검거된 신창원을 뉴스에서 볼 때, 왠지 그 옷을 입고 우리 집 근처 복지시설에 갔을 신창원이 떠올랐다. 내 옆집에 신창원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중학생 때는 일진 애들이 평택역 앞 집창촌에도 갔다는 소문을 건너 들었다. 그런 집창촌은 원래는 송탄에 제일 많았다. 송탄의 평야지대를 가로질러 설치된 비행장은 언제부턴가 기지촌 여성들의 성매매가 이뤄지는 '씹고개'로 불렸다. 원래 숯고개였던 이름이 쑥고개로, 나중엔 특유의 저속한 단어가 붙어 변질된 이름이라고 했다. 평택역의 집창촌은 미군을 상대로 하는 건 아니지만, 미군의 수가 줄어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집창촌의 영역도 허물어졌다. 1년 전에는 평택에서 미군 기지촌의 역사를 알리는 시민토론회가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 때문에 무산된 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자발적으로 매춘을 선택한 여성’들이라고 낙인찍었다.
고등학생 때는 교실 창문 밖으로 학교 부근에 몇 대의 경찰 버스가 주둔하고 있는 것을 봤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해고노동자의 시위를 방어하기 위해 대기하는 버스들이었다. 2009년 정리해고와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나야 했던 해고노동자가 평택공장에 다시 복귀되기까지는 3536일이 걸렸다. 그 사이 평택공장의 노동자들 서른 명은 세상을 떠났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의 자동차들의 물량이 수출되는 평택항은 자동차 수출 물동량 1위의 국제 무역항이다. 이 평택항에는 재활용이 불가능한 폐플라스틱 쓰레기로 가득 찬 컨테이너가 있다. 한 업체가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속이고 필리핀에 수출했던 플라스틱 쓰레기 1200톤이 다시 평택항에 돌아온 것이다. 앞으로 필리핀에서 다시 돌아올 쓰레기도 5천 톤가량 된다. 이 플라스틱은 평택 땅에서 소각되거나 묻히게 된다.
내 고향에는 비행기 소음과 화려한 불꽃놀이가 있고, 10년간 직장을 잃고 농성을 한 쌍용차 노동자들이 있고, '씹고개'가 있고, 신창원의 기억이 있고, 쓰레기로 가득 찬 플라스틱 컨테이너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고향에 대해 물어보면 백종원이 갔다는 영빈루와 부대찌개 얘기를 하고 마는 것이다.
한때 잘 나가던 부대의 쇼핑거리는 다 죽었다. 대신 고덕에는 신도시가 생기고 소사벌이 뜬다고 한다. 이 오십만 인구의 도시에 사람은 계속 태어나고 아파트는 지어지고 빈 곳은 채워지고 길이 뚫린다. 모든 곳이 다 그러듯 도시는 변화한다.
송탄은 지금도 계속 바뀐다.
송탄의 역사가 만들어낸 어떤 분주하고 시끄러운 물줄기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느낄수록 이 도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미국 독립기념일의 불꽃놀이와 집창촌에 갔다는 동창생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미군 기지가 확장되면서 쫓겨난 수많은 판자촌 사람들에 대해서, 안정적인 한미관계와 외화 획득을 위해 시행된 어떤 국가사업에 대해서, 안보와 섹슈얼리티의 불평등한 상호 교환에 대해서. 그리고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란 나와 이웃들의 삶과 정체성에 대해서.
10년 만에 다시 송탄에 머무르는 요즘, 고향이란 곳은 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남는지 궁금해진다. 좋든 싫든 평생 나를 따라다닐 꼬리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곳. 장소이자 정체성.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정치적인 나의 도시. 나의 원류(源流). 나는 이 곳을 어떻게 기억하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의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는 미군 통치의 역사를 가진 오키나와에 대한 책 <처음 만난 오키나와>를 집필하며 한 도시를 이야기하는 어려움에 대해 말했다. 그는 설사 오키나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갖가지 정체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지라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다양한 역사와 삶과 개인을 지워버리지 않는 방향으로, '발명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방법을 탐색하면서.
좋아하는 곳에 대해 제대로 말하기란 어렵다. 특히 어떻게 말하든 정치적이 되어버리는 경우는 더 그렇다. 그래도 이 복잡하고 정치적인 나의 고향에 대해 관찰자와 현지인의 경계를 넘나들며 말하고 쓰는 즐거움이 있다. 계속 변하는 송탄을 제대로 알게 되는 날이 영영 없을지라도, 나는 조금씩 나의 고향을 묘사하는 색다른 방식을 시도한다. 그렇게 송탄에 대해 쓰며 나는 송탄을 처음 만난다.
* 기시 마사히코의 <처음 만난 오키나와>를 읽고 쓰게 된 글이라 제목을 따왔습니다. 오키나와는 27년의 미군 통치 역사, 미군 기지 갈등 등 독특한 역사를 가진 도시입니다. 덕분에 저도 고향에 대해 생각해 보네여
* 송탄 기지촌에 대한 역사는 학술지를 참고했습니다. "송탄 기지촌의 공간 변화: 1952년-2018년" 링크를 누르면 보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