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집 Aug 01. 2019

고무신과 의전

“그건 한 번 받아봤기 때문에 기대하고 있던 칭찬이었다”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에는 해방 후 보수적인 가정에 며느리로 들어간, 그 시절 나름 대학도 다닌 고학력 주인공이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 노릇을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시어머니는 집에 놀러 온 이모님과 고모님들의 고무신을 보얗게 닦아놓으면 얼마나 좋아하시겠냐고 몰래 귀띔을 한다. 주인공은 지푸라기 수세미로 고무신을 닦아 어른들로부터 입이 마른 칭찬을 받지만 며느리 생색을 내준 시어머니가 조금도 고맙지 않다. 그러나 얼마 후 남편의 생일로 식구들이 모였을 때는 시키지도 않았지만 자석에 이끌린 듯 고무신을 깨끗이 닦아 한 켤레씩 마님들에게 짝을 맞춰 대령하기에 이른다.

 

“그건 한 번 받아봤기 때문에 기대하고 있던 칭찬이었다” 


고무신을 닦는 자신을 보고 쓸쓸한 마음으로 ‘나도 별 수 없이 시집 식구 되는 궤도에 들어섰구나’ 자조하는 주인공이 왜인지 술자리 예절을 수행했던 내 모습 같다고 하면 과장인 걸까. 의전이라는 게 딱 그렇다. 불필요하고 과하다는걸 알면서도 내 평판에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쁨 받는 사람이 된 듯한 착각에 그걸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기 쉽지 않다. 미운 소리 듣기 싫은 아랫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배우는 예절들. 처음에는 이런 걸 시키냐며 욕하다가도 식구가 되기 위해서는 별 수 없이 배워서 하는 과정. 그것은 ‘신입사원’이 일머리를 배워 ‘사원’으로 가는 과정이자, ‘며느리’가 눈칫밥을 먹고 ‘새애기’가 되는 과정이었다. 일 외적인 일머리지만 조직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일보다 중요해지기도 하는 그놈의 고무신 닦기.


생각해보니 시부모와 며느리 관계와 직장 상사와 후배의 관계는 비슷한 점이 많다. 생판 모르던 남이 갑자기 한 ‘가족’이 된다. 진정한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권위를 가진 자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사회의 문화를 빠르게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인정이라는 것이 아랫것의 시간과 노동력을 갈아 넣는 일방적인 헌신인 경우가 많다. 그렇게 불평등한 관계에서 이쁨과 인정을 주고받아야 비로소 식구의 일원 된다. 시스템에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 같은 과정이 반복된다. 


갈등은 대부분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 3세대가 혼재할 때 격화된다. 중간자가 윗사람에게 배우고 아랫사람에게 요구하는 '이쁨 받는 법'이 뉴비에게는 불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는 권위는 나이가 아니라 행동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장이나 시어머니라는 존재 자체의 권력으로 불필요한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갑자기 한 지붕 아래에서 산다고 해서 간단하게 가족이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쁨 받고 싶은 욕망도 크지 않다. 이들은 요즘 밀레니얼 세대 혹은 90년대생으로도 일컬어지지만 신인류로 등장한 특별한 세대가 아니다. 시대가 변화하며 이름과 구성원이 바뀔 뿐, 항상 존재하는 고정적 집단이다. 


순간 수직적인 남초 직장에서 3년간의 짧은 회사 생활을 마치고 얻은 것들을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르신에게 예쁨 받기 좋은 각종 잡기술 밖에는 없었다. 예를 들면 빨대 비닐 제거 예절이다. 커피에 꽂는 빨대의 비닐포장 전체를 벗기지 말고, 윗부분의 짧은 비닐은 빼지 않은 채 빨대를 꼽아 커피를 드리는 것이다. 입이 닿는 부분에 지문이 닿지 않게 하는 센스 있는 행동이라며 사수에게 배웠지만, 위생에 그렇게 신경 쓰는 사람들이 술잔은 왜 돌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커피 심부름을 할 때마다 별 수 없이 짧은 비닐을 남겼고 후배도 그걸 보고 따라하기 시작했다. 


웹툰 <모두에게 완자가>



언제가 중요한 어른을 커피숍에서 만난 적이 있다. 시어머니의 며느리 생색이 싫었지만 자연스럽게 고무신을 닦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나는 자연스럽게 짧은 비닐은 남기고 그분께 커피를 드렸다. 내심 이렇게 센스가 있고 예의가 바른 나로 비치길 바랬던 것 같다. 하지만 짧은 비닐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했던 그분은 비닐까지 삼킨 후 한참을 켁켁댔고 나는 휴지를 챙기러 황급히 일어서야 했다.


그때 나는 축적된 사회생활 노하우를 자랑스럽게 여긴 그간의 나를 전면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센스 있는 자신에 취해 구시대의 질서를 퍼트리는 “의전 보균자”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불필요한 고무신 닦기를 사회인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센스로 포장하는 꼰대의 앞잡이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예쁨 받기에 중독된 나는 훗날 비닐 껍질을 남기지 않는 아랫것들에게 젠체하며 철 지난 잡기를 재생산하는 꼰대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철제 빨대가 나오는 플라스틱 제로의 시대에 비닐 쪼가리 하나에 일일이 신경 쓰는 어른만은 되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내가 원하는 건 알아서 고무신을 닦는 사회다. 알아서 술잔을 채우고, 알아서 커피를 사고 빨대를 꼽는 사회다. 불필요한 의전이나 예절은 시민사회 구성원의 에티켓과는 확연히 다르다. 노인과 아이, 임산부 등 약자를 배려하고 앞서 나간 사람이 문을 잡아주는 매너는 성숙한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자질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단지 나보다 직급이나 나이가 많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매너가 특정 권력관계에서 반복적으로 수행된다면, 인정받기와 예쁨을 교환하는 불평등한 거래는 아닌지, 정말 이 시대에 필요한 예절인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잔재주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해야만 하는 것들이 뒤로 밀리기 마련이니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어미가 며느리에게 고무신 닦기를 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걸 했다고 칭찬하지도 않고, 안 했다고 눈치도 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평생 체화한 습관이니 문제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확률이 더 높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 있는 중간자'가 아닐까. 윗사람에게 고무신 닦는 법을 배워서 닦아왔지만, 아랫사람에게는 시키고 싶지 않은 중간자, 불필요한 예절을 자기 선에서 끊어버릴 수 있는 최전방의 사람들. 세대 갈등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낀 세대’의 역할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철 지난 습관을 유연하게 떨쳐버리고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세대 간 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90년대생이 이 시대 과차장님들에게 예의 있게 요청한다.
선생님들의 힘이 중요합니다, 악습은 중간에서 끊어주세요!





 ps.  가장 위험한 사람은 윗사람들에게 예쁨 받는 법을 잘 아는 중간자다. 이들은 아랫사람들에 똑같은 것을 받기 바란다. 그러니 의전왕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꼰대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a.k.a 황교안).

매거진의 이전글 내 비밀이 죽고 나서 밝혀진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