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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Jul 24. 2023

”어른은 못 되고, 대신 늙는 거지“

<박하경 여행기>를 보고…

1. 주말에 웨이브에서 <#박하경여행기 > 를 단숨에 달렸다.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 토요일 딱 하루의 여행을 떠나는’, 말 그대로 박하경(이나영)의 여행기다. 자주 보는 #힐링 #푸드 일드처럼 밥반찬으로 곁들일 잔잔한 드라마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마지막엔 볼 땐 눈물을 쏙 뺐다.


2. 경주로 떠나는 마지막 8화가 가장 좋았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 심은경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1화부터 차근차근 쌓아온 드라마의 메시지가 막화에서 누적되어 터져 나온다. 매일같이 나를 괴롭히는 질문. 언제 어른이 되냐는 내 질문에 박하경은 답한다. 어른은 못되고 대신 늙는 거지.


3. “죽음을 부정하는 도시인 거지, 서울은.” 문득 공동묘지 하나 없는 서울이 이상하다고, 왕의 무덤으로 가득한 경주에서 박하경은 생각한다. 죽음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이 산다. 영영 늙지 않을 것 같이 산다. 서울 사람들은.


4.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지난 3월 세상을 떠난 류이치 사카모토의 유고집이자 추모 전시회의 이름이다. 지구는 자전하고 보름달은 매번 뜰 것이다. 다만 내가 사라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생각한다.”


5. 늙은 나를 떠올리는 일은 괴롭다. 부양가족에 대한 부담, 소모되는 몸, 사라질 몸. 언제나 회피를 선택한다. 최근엔 그래도 노화에 대면한 순간이 있었다. 비혼 여성 친구들과 경제 스터디를 하며 연금 공부를 했을 때다. 한 경제 유튜버는 미래의 나에게 돈을 주는 건 옆집 사람에게 주는 것과 심리적으로 비슷한 거리감이라고 말했다. 연금이라니, 내가 언제 죽을줄 알고?


6. 재밌는 건 연금 포트폴리오를 짜며 구체적 노인이 된 나를 처음 떠올렸다는 거다. ‘만 55세까지 납입 하고, 최소한 이 금액으로 몇십 년 연금을 수령하려면…’ 무언가 돈을 쓰는 늙은 내가 구체적으로 거기에 있다. 어떤 기사에 이상한 위로도 받았다. “노후라는 게 막연히 머나먼 이야기로 느껴질 수 있지만, 미래의 숙제를 미리 끝내두면 현실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7. 이제껏 죽음을 회피한 이유는 미래를 책임질 대단한 무언가가 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 대단씩 되어야 하나. ‘내가 언제 죽을줄 알고?’가 아니라, ‘죽긴 죽겠지, 그 전까지 행복했으면’하고 마음가짐 바꾸니 거창하지 않게 조금씩 준비해볼 수 있을것 같았다. 사과집 할머니를 염두에 두는 것만으로도, 연속된 시간의 나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부담이 일부 줄었다. 미래의 나는 옆집 사람이 아니다.


8. 살다가, 불현듯 늙어감을 눈치채며, 언젠가 죽을 것이다. <박하경 여행기>를 보면서 눈물이 터진 건, 늙어감에 대단한 의미를 두지 말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는 법은 모른다. 그냥… 살 뿐이다. 할머니가 돼도 요즘 노래 들으면서, 의미도 없는 여행을 하면서, 간혹 어떤 순간을 실감하면서. 그렇게 늙고 종종 즐거울 것이다. 그럼 다음 단계가 오고, 다음 단계가 오고…


9. “또 오고, 또 오고” 박하경 옆에서 귀여운 추임새를 넣는 심은경의 얼굴이 해맑고 슬펐다. 배우 심은경의 얼굴을 정말 사랑한다. <신문기자> 속 얼굴도 기억한다. <박하경 여행기>는 회차마다 나오는 배우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예리, 구교환, 선우정아 등등.. 그중 조현철의 연기가 빛났다.


10. 한편, 극중 박하경은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다. 6화는 하경이 유일하게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회차다. 학부모와 학생의 민원 전화가 쏟아지는 데다 비까지 내린다. 사라지고 싶어도 사라질 수 없다. 서울은 죽음을 부정하는 도시라고 했던가. 미래에 죽을 나를 부정하지 않는 것보다 시급한 것이 있다. 오늘 죽은 타인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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