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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Sep 07. 2023

돌들이 말할 때까지 듣기

1. 제주 4.3 사건이 정확히 어떤 건지 언제 알았나요?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정확한 시기를 말하기가 좀…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닌 것 같아서 쪽팔린다. 사회에 관심 없어 보이니까;;


2. 그런데 영국에서 제주 4.3 트라우마 연구로 학위를 받은 김지민 박사는 25살에야 4.3을 제대로 알았다며, 이를 "국가에 의한 교육권 침해"라고 명명한다. 이과를 전공한 김 박사는 학창 시절 때도 4.3을 짧게 지나쳤을 뿐이라 말한다. 내가 4.3을 모르는 건, 오로지 나의 무지와 무관심 때문만이 아니라, 4.3을 조명하지 않은 시대의 잘못도 있다는 걸 듣고 무언가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3. 이건 지난달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 <돌들이 말할 때까지> 상영회에서 들은 얘기다. GV에 김경만 감독, 김지민 박사가 참여하고 오수진 PD가 진행을 맡았다. 수진과는 분노클을 함께하기도 했다. 제주 출신인 수진도 20대가 되어서 외가가 학살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4.3을 겪은 5명의 할머니가 등장한다. 그중 네 분은 4.3 와중에 재판 없이 형무소로 보내진 수형인들이다. 


4. 다큐멘터리의 기대효과는 무엇인가? 영화는 생존자의 증언으로 진행된다. 타인의 고통을 촬영한다는 것은 그만큼 생존자들에게 기대할만한 성과를 안겨줘야 할 것 같다는 부담을 준다. 그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한다거나, 진실을 밝혀 역사를 바꾼다거나... 그런데 다큐를 찍을 당시에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찍는 과정은 언제나 불신과 애매함의 연속. 오히려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함... 


5. GV에서 위로가 된 말은 김경만 감독과 김지민 박사 둘 다 기록, '다큐멘트' 자체가 목적이었다는 점이다. 김 감독은 4·3생존수형인의 재심 재판을 위한 증거 동영상을 촬영으로 시작한 것이라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했다. 김지민 박사는 홀로코스트 트라우마 연구로 유명한 지도 교수와 연구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사건을 듣고 놀란 지도교수도 4.3을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김 박사의 목적은 4.3을 학계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6. 수진은 제주도 사투리 '속솜하다'를 알려줬다. 조용하다, 잠잠하다...  철썩이는 파도를 맞고 상처가 벌어질 때도 돌은 조용했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나. 제주 4.3은 이제 시작이다. 6.25 때 민간인 학살로 아버지를 잃은 광복회 회원이 질문한 순간도 기억에 남는다. 피해자를 다룬 이런 다큐도 좋지만,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감독은 말한다. 그 말이 맞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다는 것조차 사람들이 모른다. 그래서 피해자의 말부터 듣는다. 1층을 쌓아야, 2층을 쌓을 수 있다.


7. 한동안 소재주의에 빠져있었다. 대단한 다큐가 될 수 있는, 인생을 바칠 수 있는 어떤 주제를 찾아야만 한다는... 그런 게 어디 있는가. 말하는 걸 듣는 데서 시작하면 된다. 그것이 나를 그리고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줄지 아무도 모른다. 필요한 건 그저 한없이 들을 수 있는 자세. 대단한 태도나 윤리가 아니라 정말 육체적으로 몇 시간이고 무릎 끓고 들을 수 있는.. 어찌 보면 체력의 문제. 관심이 생겨야 듣는 게 아니다. 들어야지 관심이 생긴다. 무엇을 들을 것인가? 질문이 틀렸다. 언제 들을 것인가?


8. 김경만 감독은 계속 들었다. 4.3을 17년부터 22년까지 촬영했다. 촬영분을 바탕으로 다른 4.3 영화도 나올 거라고 한다. 김경만 감독은 <삐 소리가 울리면>, <미국의 바람과 불> 등 푸티지 필름을 관심 있게 지켜본 감독이다. <돌들이 들을 때까지>에서 할머니만큼 자주 나오는 것이 아름답지만 서슬 퍼런 제주의 풍경이다. 작년 북서울미술관에서 본 임흥순 감독의 <숭시>도 떠올랐다. 숭시는 '흉사'의 제주 방언이다. 흉하고 불길한 징조. 두 영화 모두 제주의 풍경을 보여주지만 이제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 


9. 영화만큼 인상 깊었던 건 수진이다. 완벽에 가까운 진행- 현장 질문과 사전 질문을 섞고, 때 마쳐 자기 서사를 풀어놓아 더 몰입시키고, 질문자에 대한 존중과 환대- 무엇보다 이런 자리를 기꺼이 준비한 것. 누구나 일에서 모순된 감정을 겪는다. 상업성과 예술성, 자본과 인디, 복잡하게 충돌하는 고민들. 수진은 고민만 하지 않고 사람들과 만날 자리를 마련했구나. 수진의 시도 자체가 내게 영감이었다. 그가 선 자리에서 무언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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