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리터러시(literacy)' 라는 용어가 유행이다. 이전과는 달리 사회 곳곳 어떤 분야에서나 리터러시라는 말이 흔히 쓰이는 게 그 증거다. '데이타 리터러시 (Data literacy)', '디지털 리터러시 (Digital literacy)', '미디어 리터러시 (Media literacy)', '뉴스 리터러시 (News literacy)', '게임 리터러시 (Game literacy)' 등등.
그렇다 보니 서점에 가도 '리터러시'가 들어간 제목의 책들을 심심찮게 매대에서 볼 수 있다. 빅데이타나 클라우드, 블록체인, 인공지능, 메타버스 만큼은 아니어도 네 글자 계보를 따르는 사회적 유행어로 치면 '리터러시'도 인기순위 20~30위 권 안에는 들지 않을까 싶다.
'리터러시'는 우리말로 흔히 '문해력'이라고 번역된다. 좁은 의미로 해석하자면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 즉 글을 읽고 쓸줄 아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나 어떤 분야든 글을 읽고 쓰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의 맥락에서 문장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과 이해도가 필요하다는 걸 감안한다면 단순히 '문맹이 아닌' 걸 지칭하기 위한 용어는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슨무슨 리터러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내포된 의미는 '무슨무슨에 해당하는 분야의 지식과 지적능력을 갖고 있어서 관련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면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된 것이구나 생각하면 그만이다. 오히려 문장을 읽고 쓰는 능력 자체보다는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과 이해력을 강조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쯤에서 '소프트웨어 리터러시 (Software literacy)'라는 용어를 꺼내고자 한다.
앞서 '리터러시'라는 용어를 설명한 맥락에서 '소프트웨어 리터러시'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지식과 이와 관련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지적능력을 바탕으로 소프트웨어와 관련된 글이나 현상, 문제 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 '4차 산업혁명' 이란 말을 처음 접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다름 아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일컫는 용어니까.
우리 인류는 1~3차 산업혁명을 거쳐 현재 4차 산업혁명에 접어들었다. '혁명(revolution)'은 이전의 상식과 체계를 무너뜨리거나 확 뒤바꾸는 계기가 벌어진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3차 산업혁명의 시대와는 또 다른 상식과 체계가 보편화되어가는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소프트웨어 개발자라서가 아니라 AI니 IoT니 클라우드니 빅데이터니 4차 산업혁명의 특징을 나타내는 이런저런 말들을 종합하고 골자를 뽑아보면 결국 4차 산업혁명은 '소프트웨어에서 일어나는 혁명'에 다름아니다. 줄여서 '소프트웨어 혁명'이라고 하자.
다시 말해 시대의 변화 혹은 발전 (개인적으로 발전이라는 용어를 별로 안 좋아한다. 최근 들어 과연 우리가 발전한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아져서다)을 소프트웨어가 이끌어가는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이 글의 독자가 자녀를 둔 부모라면 내 아이가 한창 살아갈 시대는 4차 산업혁명의 가운데 쯤 이겠거니 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국영수 국영수' 한다면 정말이지 반성 좀 해야 한다. 물론 국영수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나 우리가 학창시절 국영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국영수가 대학을 가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있어 '설마' 를 앞에 두어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사회적으로 대학 졸업장이란 것이 필요 최소한의 장치가 되어 줄 거란 막연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대학도 못 들어갈 정도면 힘들게 살아갈 께 뻔해 보인다는 그 밑도 끝도 없는 사회순응적 신념 때문이었달까.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이미 그 시대는 지나가고 전혀 새로운 시대로 이행하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우린 왠지모를 관성으로 아직도 국영수와 A+ 그리고 '사'자나 '엘리트'라는 허울에 매달려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교육은, 공부는 쓰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물론 치열하게 공부한 건 삶의 곳곳에서 언제 어디서라고 딱 짚어 말하긴 힘들어도 요긴하게 쓰이는 경우가 많긴 하다.
나도 경영학도로서 학부시절 나름 깊이있게 공부했던 경제학, 좀 더 구체적으로는 미시경제이론에서 다루는 효용과 무차별곡선에 관한 내용이 컴퓨터공학 석사과정에 논문의 주된 연구주제였던 skyline computation 알고리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나 가장 좋은 걸 물려주고 싶은 부모라면 이쯤에선 소프트웨어 혁명의 시대를 살아갈 내 자녀에게 무엇을 안고 살아가면 괜찮을 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소프트웨어 리터러시는 자녀를 위한 용어가 아니다. 내 아이들은 이미 소프트웨어의 시대부터 살기 시작했다. 그들의 언어는 소프트웨어가 될 것이며 그들이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도 소프트웨어 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상에 아무런 가이드 없이 내 놓으면 그들이 알아서 잘 사고하고 익혀야 할 것들을 배우며 적응하고 커나갈 수 있을까?
물론 어릴 때부터 다익스트라 알고리즘 (Dijkstra's algorithm: 시작점과 끝점 사이에 주어진 여러 경로들 가운데 최단 경로를 구하는 알고리즘) 을 비롯 온갖 효율성을 극대화 하면서도 인문학적 사고와 인격적인 성숙과 사회적 공감능력을 함께 장착하고 태어난 아이도 존재하겠지만 내 아이가 그런가? 아니 부모인 내가 과연 그런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을 만한 존재인가?
아마도 그게 보통이라면 우린 이런 글을 쓰거나 읽고 있지도, 우리 부모가 그렇게 우릴 대학에 보내려 국영수를 강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 해 전 아내가 곧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첫째의 교육을 생각하며 이것저것 읽던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던 게 생각난다. 뭐 여러 책들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책은 '하브루타' 교육방식에 관한 책이다. 그 때 마침 '하브루타' 가 또 인기였는데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도 '하브루타' 관련 책을 관심있게 읽거나 콘텐츠를 찾아본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 만큼 인기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네 글자) 그 책의 내용이 어떻다는 걸 말하고자 하려는 건 아니고 왜 아내가 그 책을 읽고 있었느냐가 중요하다.
그건 바로 부모가 자녀에게 도움이 되려면 그 안내하려는 길에 대해 뭐라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 알고 있다면 잘 아는 만큼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교육은 실천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고 부모와 소통하며 자란다. 해보면 알겠지만 아니 해 본 사람은 누구나 고갤 끄덕일 일이지만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소프트웨어 혁명의 시대를 살아갈 내 자녀에게 보다 나은 소프트웨어 교육을 실천하려면 부모가 소프트웨어에 대해 뭐라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런 부모를 위한 필요 최소한의 덕목이 바로 소프트웨어 리터러시를 갖추는 것이다.
소프트웨어 리터러시를 갖춘다는 것이 프로그래밍 언어를 익혀 코딩을 하고 직접 게임을 하거나 앱을 만들고 논문을 쓸 정도의 전문지식을 갖추어 모범을 보이라는 말이 아니다. 아이들과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아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만져가며 시간을 보내라는 것도 아니다.
소프트웨어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막연하게 '소프트웨어가 소프트웨어지 뭐' 하는 수준이 아니라 어떻게 발전해갈 것인지 나름의 뷰를 갖고 바라볼 정도의 이해력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후의 글들은 20년간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하면서 그리고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두 아이를 안내하고픈 부모로서 소프트웨어 리터러시를 갖추기 위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기본적인 내용부터 조금은 빠른 호흡으로 소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