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사진
딱히 사진을 본격적으로 파고든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어디선가 보았거나 들어봤을 말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 그 유명한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 1908~2004)과 그가 추구한 사진을 대표하는 언어적 표현이다.
결정적 순간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다뤄져 왔고 브레송 자신 또한 곳곳에 주관을 피력했지만 난 딱히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에 대해 그리 진지하게 접근하고 싶진 않다.
다만 '결정적'이란 말이 'decisive'가 품고 있는 뉘앙스와는 별개로, 사진을 찍게 되는 그 순간이 내겐 관심을 행위로 드러내는 순간이자 내 삶이나 의식에 영향을 주는 무언가를 기록하겠다는 결정인 것이라 그동안 찍어온 사진들을 뭉뚱그려 표현하려니 퍼뜩 떠오르는 단어였다.
장황하게 썰을 풀었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사용한 '결정적'이란 단어가 딱히 브레송의 그것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것이다.
프롤로그에서도 밝혔지만 나에게 있어 사진은 '관심'의 표현이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고 사람과 가족에 대한 관심이자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제발 동작하기를 바라며 10년은 묵혀둔 외장하드를 꺼내 USB포트에 연결했다.
'관심'의 첫 번째 사진으로 어떤 사진이 좋을까를 생각하며 수년에 걸친 사진 디렉터리들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내 안의 수많은 내가 만장일치로 '이 사진이 좋겠는데.' 하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가족을 이루기 전이자 적당히 오래되었으면서 사진에 대한 쓸데없는 욕심이 없던 시절 찍은 사진들 중 마음에 드는 한 장.
이 사진은 약 11년 전 어느 봄날 늦은 오후 덕수궁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관람을 마치고 대한문 쪽으로 걸어오다 찍게 된 사진이다.
만발한 벚꽃을 찍으려 커다란 수양벚나무 주위로 몇몇 사람들이 핸드폰을 들고 있었는데 한 여인이 가지가 늘어진 나무 아래로 걸어가더니 꽃가지를 올려다봤다. 갓 퇴근한 것처럼 보이는 트렌치코트에 가방,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있던 그 여인은 벚꽃을 따려했는지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손이 닿질 않자 살짝 다릴 구부리더니 펄쩍 뛰어올랐다.
어떤 대상에 관심이 생기는 이유는 처음 보거나 새롭기 때문인 경우가 많지만 '결정적 관심'은 나와 다른 무언가가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 생기기도 한다.
나에겐 없는 스타킹을 신은 매끈한 다리가 쭉 뻗으니 눈에 확 들어온 탓이 분명하겠지만, 무언갈 향해 주변 아랑곳없이 뛰어오르던 여인의 모습이 사뭇 나와는 달라 관심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이 사진이 재밌다 생각되는 부분은 뛰어오르는 그녀의 그림자 팔 끝이 향하는 곳에 핸드폰으로 벚꽃사진을 찍고 있는 한 여성이 보이고 그 옆 하얀 코트를 입은 다른 여성의 시선이 사진을 찍고 있는 날 향해 있다는 것이다. 왼편 아래 한 구석, 점프하는 그녀를 찍고 있는 내 그림자가 멀리서 날 바라보는 시선을 받아준다.
이 사진은 벚꽃에 대한 관심, 벚꽃을 만지려는 여인에 대한 관심, 그 여인을 찍고 있는 한 남자에 대한 관심이 담겨있는 사진이다.
요즘 아이폰과는 천지차이였던 iPhone 4로 찍은 사진이라 색상도 화질도 그리 좋은 사진은 아니지만 내가 얘기하려는 '관심'의 첫 페이지를 열기엔 부족함 없는 사진이라 생각한다.
성경을 역사서로 본다면 최초의 남자였던 아담은 그의 창조주 하나님이 만들어 준 여자 '하와'를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 후 그가 낳은 자식들이 후레자식이건 어떻건 둘이 사랑해서 낳았을 텐데 사랑의 시작은 상대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을까.
난 개인적으로 아담이 하와에게 가졌던 관심보다 내가 아내에게 가졌던 관심이 훨씬 더 강렬했을 거라 생각한다. 아담이 다른 선택지가 없는 세상에 딸랑 하나뿐인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수많은 여자들 가운데 유독 한 명에게 쏠린 내 관심이 어찌 더 강렬하지 않았겠는가.
어쨌든 '도대체 난 왜 하필 이 여인에게 관심을 가졌던 걸까'라는 물음은 앞으로도 한동안 때때로 하겠지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 답을 구하려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내 곁에 있는 저 여인의 사진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