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생활을 글로 풀어내 보려 합니다.
부산은 저의 고향도 아니고, 주소지로 등록된 집도 아닌 곳입니다. 단지 직장이 있는 도시일 뿐입니다.
저는 흔히 ‘삼대가 복을 쌓아야 할 수 있다’는 주말부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일에는 퇴근 후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허둥대며 보내곤 합니다. 그 남는 시간을 조금 더 의미 있게 채워보고 싶어, 부산에서의 일상을 가끔 글로 남겨보려 합니다.
여행자처럼 부산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추천할 만한 명소를 소개할 글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낯설지만 익숙한 이 도시에서, 나의 시간을 어떻게 새롭게 엮어 갈 수 있을까 하는 동기부여에 가깝습니다.
첫 글은 부산의 골목에서 시작해 봅니다.
오늘은 오래도록 마음에 두었던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았습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한국전쟁 당시, 함경도에서 피난 온 한 부부가 헌 잡지를 팔면서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 작은 행위가 시간이 쌓여 하나의 골목이 되고, 지금은 부산을 상징하는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니, 그 자체로도 역사가 품은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평소 책은 주로 온라인 서점이나 대형 서점에서 구입하고, 가끔은 전자책으로 읽습니다. 중고책은 서면에 있는 알라딘 매장을 아주 드물게 찾곤 했는데, 보수동 책방골목은 예전부터 꼭 한번 들러보고 싶던 곳이었습니다.
작은 서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서 있는 풍경은 왠지 정겹고, 새 책이 아닌 헌 책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는 묘하게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 책들은 일정한 질서 없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지만, 그 무질서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질서가 느껴졌습니다. 저는 오늘 특별히 어떤 책을 사러 간 것은 아니었기에, 마음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책장을 넘겨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책 더미 사이에서 아이들 참고서를 보고는 예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동아전과’와 ‘표준전과’가 나란히 있었고, 제 선택은 늘 동아전과였습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영어 공부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던 ‘성문기본영어’와 ‘맨투맨기본영어’가 있었는데, 저는 성문기본영어를 골랐습니다. 사전은 ‘에센스’와 ‘프라임’이 유명했지만, 제 손에 늘 있던 것은 에센스였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선택들이 단순히 참고서를 고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동아냐 표준이냐, 성문이냐 맨투맨이냐 하는 것은 아이들 세계에서는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듯한 중요한 갈림길이었습니다. 왜 저는 동아, 성문, 에센스를 택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마도 조금 더 전통이 있고, 여백이 있는 책을 선호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설명이 더 쉽고 친절한 책보다는, 조금은 덜 말해 주는 책이 제게는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취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듯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저는 언제나 조금의 여백을 두려 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제 공간을 완전히 잠식하는 듯한 기운이 느껴지면 저는 자연스레 물러납니다. 여백과 거리는 나를 타인과 구별되게 하고, 나만의 공간을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관계 속에서도 여지를 남겨두는 쪽을 택합니다.
책방골목을 한 바퀴 돌아 나온 뒤, 결국 책 한 권을 고르기로 했습니다.
오늘 제 손에 들어온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였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은 제게 단순히 일본의 유명 작가가 아니라, ‘나의 젊은 날의 한 장면’과 같은 보통명사에 가깝습니다. 20대 시절, 언제나 가방 한켠에 하루키의 소설 한 권쯤은 넣어 다니며 읽곤 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하루키의 문장 속에서, 낯설지만 친근한 세계를 만났습니다. 그 시절 공대생은 흔히 ‘단무지(단순·무식·지랄)‘라 놀림받곤 했는데, 그런 제가 하루키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뭔가 다른 세계를 엿보는 듯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키의 책을 들고 다니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이질적이고 낯선 풍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다시 그 책을 집어 든 것은 단순히 젊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절의 열정과 순수를 다시 불러내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최근의 하루키 작품들은 제게 크게 와 닿지 않습니다. 제가 여전히 사랑하는 것은, 그때 읽었던 하루키의 소설들 입니다. 아마도 그 시절의 감정이 책과 함께 제 안에 고스란히 스크랩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바람의노래를 들어라, ’양을 쫓는 모험‘, ’댄스 댄스 댄스‘, ’상실의 시대‘, ’태엽 감는 새‘ …
그 모든 책들이 제 젊은 날의 서랍 속에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오늘은 그렇게, 책 한 권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