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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Jul 30. 2024

기억나지 않는 추억

그 자리엔 감정만이 남아

“인종 차별 죽어 진짜”

#Austria #Salzburg #왜그러고살아


20xx 년 8월 23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한가운데서 엉엉 울었다. 태양을 받아 노랗게 빛나는 타일이 깔린 광장이었다. 이곳에서 3일간 머무르며 만난 산과 들과 사람과 음식을 한 번 더 담는 대신 발만 내려다봤다. 샌들 안에 갇힌 주제에 운동화 밖 세상 구경을 하는 발가락이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하소연할 곳 없는 기분은 손을 타고 엽서로, 또 한국으로 옮겨갔다. 머릿속에서는 엽서를 받고 걱정할 가족들이 신경 쓰였지만, 손끝의 펜은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눈물도 마찬가지였다. SNS에는 구구절절 쓰는 대신 “인종차별 죽어 진짜”라는 한 문장을 덩그러니 남겼다. 그럼에도 억울하고 분하고 짜증 나는 기분은 도시를 넘어 한참을 따라다녔다.


 오랜만에 생각난 기억이었다. 훌쩍이며 걷던 광장의 분수대와 발끝의 네모난 타일, 개발새발 날아가던 엽서의 글자들이 주말 아침 침대 머리맡에 떠다녔다. 하지만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내 눈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느낀 기분 나쁜 감정만 진득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궁금한 마음에 고향집에 전화를 했다. 여행지에서 보낸 엽서들을 한 데 모아두었다 했다. 그때의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을까. 전화기 너머 우당탕탕 온 집안을 뒤지는 소리와 실없는 이야기가 오갔지만 끝내 엽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막내 방을 꾸미며 대 청소할 때 휩쓸려 버린 것 같다는 어머니의 미안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아쉬운 대로 서랍 깊숙한 곳에 있던 일기장과 여행 일지를 꺼내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내 눈물의 이유는 없었다. 내가 가진 건 울었던 때의 풍경과 SNS의 불평 한마디뿐이다. 분명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는데. 틀림없이 내가 겪은 일인데. 그때 억울했던 기억이 분명한데.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수 있는지 바보가 된 것 같다. 어쩌면 난 싫은 기억은 쉽게 잊는 속 편한 사람이었던 건가.



 감정은 마치 기념품과 같아 여행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남아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감정은 꺼내 들면 자연스레 추억이 떠오르지만, 어떤 가게에서 샀는지, 얼마에, 왜 샀는지 기억나지 않는 작고 낡은 기념품 같다. 이사 한 번이면 사라질, 아니 사라진 줄도 모를 기념품이 있듯, 몇 번의 책상 정리 끝에도 오래도록 선반 위에 자리하며 애정의 눈길을 받는 것도 있다. 그중 ‘사랑’이라는 감정은 유독 긴 시간 동안 마음 한편을 장식한다. 싸움만 가득했던 연애의 끝에 결국 헤어짐을 택했어도 처음 사랑했던 감정은 남아있는 것처럼, 천문학이라는 학문을 만나 두근거렸던 감정은 어찌 이리도 길게 자리 잡고 있는지. 눈물이 날 정도로 강렬했던 오스트리아의 기억도 잊은 마당에 유난스럽기도 하다.


 고백하건대, 내가 천문학을 사랑하는 이유? 사실 그런 건 모른다. 굳이 대답해 보라 하면 무어라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때그때 달라질 테니 답할수록 거짓말쟁이가 되는 기분일 테다. 대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수많은 추억에 깃든 감정이다. 언제 어떤 걸 느꼈는지 이야기해 달라면 밤새도록 말할 수 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등굣길에 보여줬던 부분일식의 신기함이,

전교생 중 딱 두 명 있던 지구과학 만점자 중 한 명이 나였다는 뿌듯함이,

문득 달이 진짜 저 우주에서 지구를 돈다는 걸 실감했을 때의 충격이,

새로 올라간 우주 망원경이 찍은 먼 우주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감동이,

유성우 소식을 듣고 옥상 바닥에 누워 진짜 별똥별이 떨어지나 의심했던 마음이,

우주 영화를 보고 인터넷에 밤새 상대성 이론을 찾아보던 열정이,

천문학자들이 기어코 블랙홀 사진을 찍었을 때 같이 느낀 희열이,

처음으로 천문대에서 수업을 준비하던 설렘이,

아이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우주에 대해 질문했을 때의 기특함이,

광해 한 점 없는 은하수를 바라보다 느낀 질투가.


 수많은 감정이 덕지덕지 붙어 불어난 마음은 감히 의심하지 않게 한다. 난 밤하늘을 보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낀다. 그 감정을 사랑한다. 사랑하고 있다. 선명하게 남은 기억은 잊히지도 않고 오래도록 남아있다. 어쩌면 10년 뒤에도 추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금방 버려질 기념품 같은, 기억나지 않는 추억 속 감정만 남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마지막 기억은 사람이 없는 주택가였다. 일부러 관광지를 벗어나 볼 것 없는 언덕을 올랐다. 오른쪽으로는 담과 담을 맞댄 집이, 왼쪽으로는 낭떠러지와 낮은 난간이 있는 길이었다. 커다란 성은 마을 반대편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눈보다 높이 있는 성, 내 발아래 작은 마을, 어디선가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 그곳 계단참에 서서 강 건너 번잡스러운 관광객을 헤아리다 언덕에서 내려오는 사람 한 명에게 길을 비켜주고는 나도 조용히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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