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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Apr 13. 2024

인연과 인연이 맞닿을 때

개원 이야기

"선생님! OO한의원이 양도·양수 매물로 올라온 것 같은데요?"


천안에 작은 한의원을 양도로 내놓겠다는 글을 보자마자 곧바로 은사님께 전화부터 드렸다.


글에는 한의원 이름이나 정확한 위치가 쓰여있지 않았지만 글을 읽자마자 이곳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주변 아파트 세대수, 인프라, 한의원의 구조나 환경을 글로만 읽었는데도 말이다. 오래 살았던 동네인 데다 가족이 함께 다니던 곳이었으니까.




고등학생 때 내가 한의대를 목표로 한다고 하니까 친구 한 명이 OO한의원에 한 번 가보라고 알려줬다. 거기가 과학  선생님 아내 분께서 하시는 곳이라면서.


평소 두통을 달고 살았던 나는 수능이 끝나고 나서부터 한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수줍은 마음으로 복자여고를 나왔고 대전대 한의예과에 붙었다고 고백했을 때 한껏 들뜬 선생님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새 친구들도 사귀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바빠 금세 잊고 지냈지만.


3년쯤 지났을까, 한방신경정신과 첫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출석 체크를 하시다 내 이름을 호명하시고는 반갑게 인사하셨다. "잘 지냈어요? 더 예뻐진 것 같은데. 나 못 알아보는 가봐요? 수업 시간 동안 한 번 잘 생각해 봐요."


OO한의원 원장님이시구나! 강의가 끝나자마자 강단 앞으로 가 교수님께 다시 인사를 드리고 오랜만의 안부를 나눴다.


"엄마가 한의원에 계속 오셨거든. 오실 때마다 네가 어떻게 지내나, 요즘 무슨 공부를 하나 안부를 물었지. 그리고 가 n학년이 되는 게 몇 년 뒤인가 표시해 놨고, 이렇게 출석을 부르는 날만 기다렸어."




그렇게 작은 인연도 소중히 여겨주신 은사님 덕분에 졸업 후까지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지금의 한의원은 은사님께서 처음 개원하신 곳이고, 두 아이를 낳고 쉬게 되면서 다른 원장님께서 운영하고 계셨다. 그걸 3번째 원장으로 내가 이어받게 된 것이고.


내 이름을 걸고 첫 출근을 하던 날, 제일 처음 한 일은 엄마 이름이 적힌 차트를 찾는 것이었다. 지금은 전자차트를 쓰지만 은사님께서 처음 개원했을 땐 종이 차트를 쓰셨기 때문에 엄마가 건강했을 때의 기록이 남아있었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빈 한의원에서 조용히 엄마의 차트를 보는데 마음이 괜히 뭉클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가 이어준 인연이 나를 이 한의원으로 이끌어준 것만 같아서. 엄마의 이름이 적힌 차트와 은사님의 필체로 쓰인 기록을 보면서 철없는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동안에도 관계를 소중히 연결해 준 어른들의 마음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곳과의 연은 환자와 의사로 은사님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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