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부원장으로 일하던 시절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 행복을 환자분들께 맡기기 싫다.'라고. 치료 결과가 좋아서 환자분들로부터 좋은 피드백을 들으면 날 것처럼 기쁘다가도, 아프다, 똑같다, 죽겠다 하는 말을 들으면 너무 우울해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 과학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말이 떠올랐다. "요즘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다 의대를 목표로 하던데, 한 번 잘 생각해 봐요. 의사가 되면 매일 아픈 사람들을 만나야 해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 상상이 돼요? 나는 그래서 선생님이 된 게 정말 좋아요. 이렇게 맑고 예쁜 친구들하고 일할 수 있잖아요. 의대 가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대신 꼭 한 번은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무얼 느끼며 살고 싶은지를 잘 생각해 보고 결정했으면 좋겠어요."
아, 바로 이런 순간을 말하는 거였구나! 좋아졌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땐 분명 짜릿하고 기쁜 순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실은 꼭 그런 장면만 모아놓은 의학 드라마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이 다 그럴 테다. 평범하고, 소소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일상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삶이고, 끝끝내 견뎌낸 사람만이 어떤 것이든 이뤄내는 패턴 말이다.
20대 까지는 행복이 무지개 같은 감정이라고 생각했었다. 분명 저 멀리 보이는 것 같은데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무지개. 요즘은 행복이 꼭 숨은 그림 찾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분명히 있는데 일부러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그래서 열심히 집중해서 찾아보면 "여기 있었네!" 하고 발견되는 그림처럼. 그렇게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가야 하는 독특한 감정이다.
그래서 이제는 환자분들이 좋아졌다는 말을 해주실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지 않는다. 먼저 찾아내고 발견해 오히려 알려드리려 노력한다. 어쩌면 그게 의료인의 임무일 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대체로 좋아진 것보다는 나빠진 것, 아직 남아있는 아픈 부분에 더 집중하기 마련이니까. 어디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도와드려서 '무언가 달라지고 있구나. 처음보다는 나아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치료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내가 환자를 만나는 공간은 병원이지 않은가! 병원에 와서 아픈 점에 대해 더 이야기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순리였다. 그리고 그 말속에 숨겨진 진짜 마음을 보려고 노력해 본다. 더 아프다는 말은 사실 더 잘 봐달라는 말일 때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개인적으로 중요한 변화는 내가 '다' 고쳐드려야만 한다는 착각에서도 빠져나온 점이다. 그 부분을 받아들이고 나니, 환자 스스로의 회복력과힘을 조금 더 믿게 되고, 그분들의 피드백에 끌려다닌다는 기분에서 벗어나 말 그대로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었다.
직접 한의원을 운영하며 좋은 점은 공간을 내 스타일대로 꾸며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한의원에도 내가 지치고 힘들 때 발견했으면 하는 행복들을 군데군데 숨겨 놓았다.
매달 넘기면서 이번 달엔 어떤 그림이 나올지 기대하게 해주는 달력
한의원을 은은하게 감싸는 음악 소리
창가에 놓인 화분들
블랙보드에 적힌 이달의 한 줄
컴퓨터 앞에 놓인 풍경 엽서
원장실에 들어올 때 느껴지는 향기
동생이 만들어준 예쁜 키보드
마음이 힘들 때마다 읽어보는 친구들의 편지
사실 일부러 숨겨 놓은 것도 아닌데, 익숙해지니 알아서 숨겨지는 느낌이다. 직접 숨겨 놓은 자잘한 행복들이 오늘 하루도 일할 힘을 내게 한다. 앞으로도 열심히 숨은 그림 찾기를 할 작정이다. 매일의 삶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