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린다 린다>_그 시절만이 담을 수 있는 우리의 아름다움이 있으니까
고등학교 때 학교 축제에서 연극 공연을 한 적이 있다. 학교에는 원래 연극 동아리가 없었는데 신규 동아리를 모집하면서 우연히 연극 동아리가 신설되었고 그때 때마침 나는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살던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에 뚝 떨어진 탓에 모든 것이 낯설었던 나에게 연극 동아리의 존재는 유일한 흥밋거리였다. 혼자 연극 동아리에 가입하기에는 겁이 났던 나는 몇 날 며칠 혼자 고민을 하다 고등학교에 함께 입학한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친구를 설득해 연극 동아리에 덜컥 가입을 했다. 연극 동아리에는 연기 경험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성적이어서 제 목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놓지 못하는 신입생들로 즐비했다. 나를 포함해서. 자기소개도 쭈뼛거리며 얘기할 정도로 낯설고 서툴었던 그들과 난 학교 축제에 연극을 올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더위로 푹푹 찌는 여름의 한 시절을 함께 보냈다.
고교 시절 마지막 축제, 마지막 공연을 앞둔 밴드부. 하지만 팀에 문제가 생겨 공연을 못 할 위기에 처한다. "송! 밴드 안 할래?" 급하게 섭외한 한국인 유학생 송이 보컬로 합류하고 함께 엇박의 하모니를 만들어 나가는데... 20년 전, 우리의 청춘을 빛나게 했던 '파란 마음'이 다시 시작된다!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온 송은 일본 학생들과 어울려 놀기보단 혼자서 나른한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는 것이 익숙한 유학생이다. 송이 그나마 학교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순간은 한국 문화를 알리기 위해 함께 교실을 꾸미는 담당 선생님이 유일할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축제를 위해 공연을 준비하던 밴드부가 해체 위기를 맞게 되고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송에게 다급하게 밴드를 함께 하자고 제안하게 된다.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한 송은 무턱대고 좋다고 대답을 하게 되는 바람에 서로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밴드부 학생들과 함께 축제에서 선보일 밴드 공연을 하기 위해 뜨거운 한 여름을 보내게 된다. 얼떨결에 밴드부에 합류하게 된 송은 여전히 일본어는 서툴고 더더욱이 다룰 수 있는 악기는 하나도 없다. 사실상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밴드에 들어오게 된 송은 기교 하나 없이 단순하지만 우직한 힘을 가지고 있는 목소리로 밴드의 보컬을 맡게 된다. 일본의 전설적인 밴드 블루 하츠의 '린다 린다'를 공연할 음악으로 선정한 그들은 제대로 된 합주실도 없이 수업이 끝난 어두운 학교의 지하실과 옥상을 전전하며 공연 연습을 이어나간다.
나와 내 친구를 포함해 연기 경험이 전무한 학생들로 구성된 연극 동아리는 현직 연극배우 선생님을 필두로 방과 후 공연 연습을 본격적으로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텅 빈 교실에 채 열명도 되지 않은 친구들과 둘러앉아 연극부 선생님이 선정해 오신 시나리오를 읽고 인물을 분석하며 우리는 모든 것이 처음인 경험을 공유해 나가기 시작했다. 공연 때 입을 옷을 함께 고민하고 학교 소각장에 버려진 박스를 십시일반 챙겨 소품을 만들고 모두가 떠난 어두운 학교에서 과자와 컵라면을 나눠먹으며 우리는 연극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절대 경험해보지 못했을 소소한 추억을 쌓아나갔다. 눈 마주치는 것조차 어색했던 친구들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축제에서 함께 연극 공연을 펼칠 우리들의 모습만이 선연해졌다.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밴드부원들과 함께 연습을 하던 송은 고단함에 지쳐 잠을 자고 있는 밴드부원들을 남겨두고 혼자 텅 빈 학교를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한창 축제를 위한 준비로 어수선한 공간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가장의 인물을 만들어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송은 어두컴컴한 강당 안으로 불쑥 들어간다. 축제에서 공연을 펼칠 강당의 무대 위로 올라간 송은 마치 진짜 공연을 하는 것처럼 밴드부원들을 한 명씩 소개하기 시작한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그동안 나누었던 순간을, 그 순간을 통해 깨닫게 된 각자의 이야기와 우정을 담담하게 나열하던 송은 비로소 깨닫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이 평생 간직하게 될 추억으로 새겨질 거라는 걸.
축제 전 날까지 열심히 합주를 하던 송과 밴드부원들은 깜빡 늦잠을 자버리는 바람에 고대하면 축제날에 지각을 해버리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폭우까지 쏟아지는 날씨 탓에 허탈한 마음을 더해가던 그들은 연습한 곡 중 단 한곡만이라도 공연을 하기 위해, 그동안 함께 준비했던 노력을 마무리 짓기 위해 낙담하지 않고 학교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완벽하게 갖춰진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남몰래 연습했던 멋들어진 오프닝은 현실이 되지 못하더라도 빗물에 홀딱 젖은 채로 옷에 묻은 물을 짜내며 맨발로 강당 위에 올라서게 되더라도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마음속에 새기기 위해 그들은 혼신을 다해 공연을 펼쳐나간다. 푹푹 찌는 한 여름에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친구들과 준비했던 나의 생애 첫 연극 공연은 정해진 축제 시간이 초과됐다는 이유로 4막 중 2막 만을 공연하고 막을 내렸다. 남몰래 가슴 졸여가며 연습했던 내 독백씬은 선보이지도 못한 채. 그럼에도 여전히 그 순간을 지우고 싶은 순간이 아닌 추억하고 싶은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는 건 그 시절 우리의 청춘은 존재만으로도 너무도 찬란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