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 좀 들어줘>_행복은 번거롭고 불행은 손쉽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을 때가 있다. 나에 대한 걱정스러운 눈빛이, 나에게로 향하는 상냥한 말이, 나를 배려하는 다정한 태도들까지 전부 그저 성가시고 불편해서 못마땅하게 느껴질 때가. 나도 모르는 새에 언제 이리도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는지 자책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감정의 굴레가 우릴 괴롭히기도 한다. 어느 매듭부터 풀어야 할지 단단히 엉킨 실타래를 풀려해도 도저히 해답을 찾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그 감정에 매몰된다. 수많은 말을 하지만 진정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 기분. 매일 한 공간 안에서 함께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지만 그 누구도 또렷이 알 수 없는 진심의 마음과 상처 그리고 외로움 잔상들. 우리는 진정 누군가의 말을 잘 듣고 있는 걸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할 말 다 하는 '팬지'. 집, 길거리, 마트... 그녀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트러블이 생긴다. 그런 그녀를 유일하게 보듬는 사람은 여동생 '샨텔'뿐, 남편과 아들은 귀를 닫은 듯 그저 무심할 뿐이다. '어머니의 날'을 맞아 '팬지'와 '샨텔'의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 '팬지'가 무슨 말을 할지 조마조마하던 가족은 그녀의 뜻밖의 반응에 당황하는데...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게 남편은 조용히 출근을 하고 커튼으로 가려진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단잠을 빠져 있던 팬지는 갑자기 화들짝 경기를 일으키듯 잠에서 깨어난다. 팬지의 단잠을 깨운 건 다름 아닌 마당을 쪼아대고 있는 비둘기들의 존재다. 비둘기의 작은 푸덕거림에도 한껏 예민해진 팬지는 모든 것이 못마땅하다. 왜인지 자꾸만 우리 집 마당으로 찾아오는 비둘기들의 존재가 못마땅하고 아침에 일어나 인사도 없이 쌩하니 부엌으로 직행해 먹을 것부터 찾는 아들의 존재도 못마땅하다. 새것처럼 닦아놓은 소파 위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자던 팬지는 아무런 배려도 없이 현관문을 꽝하고 닫는 남편의 배려 없는 행동이나 금방 나갈 거라며 새똥이 묻은 더러운 신발을 신고 집안을 활보하는 남편의 꼬락서니가 정말이지 꼴 보기가 싫다. 자신이 느끼는 못마땅한 마음을 팬지는 아들과 남편에게 거리낌 없이 모두 내뱉는다. 그 말에 가시가 한껏 돋쳤다 하더라도. 그렇기에 남편과 아들이 팬지를 대하는 방법은 손쉬운 침묵뿐이다. 언제나 불평불만 속에서 살아가는 팬지의 이러한 심기불편함은 밖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마트에서 계산을 기다리는 그 잠시의 순간에도 빨리 계산을 끝내지 않는다고 닦달하거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주치의가 바뀌자 스스럼없이 반말을 하며 처음 본 의사의 능력을 의심하고 평가한다. 이쯤 되면 진짜 몸이 아파서 모든 것에 예민하게 되는 건지 아니면 모든 것에 예민하게 굴어서 몸이 아파지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반면 미용실을 운영하는 팬지의 동생 샨텔은 상냥한 미소로 손님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머리를 손질해 준다. 미용실에서 흔히 하는 스몰톡을 넘어 과거의 개인사까지 줄줄이 기억하는 샨텔은 언제나 상대방의 진심부터 헤아려준다. 그러한 샨텔의 사려 깊음은 집에서도 한결같다. 남편 없이 두 딸과 생활하는 샨텔은 아빠의 빈 공간을 채워주려는 듯 두 딸과 친구처럼 격 없이 지내며 집안에 언제나 웃음꽃이 떠나가지 않는다. 고집불통에 예민함이 극에 달한 팬지에게도 샨텔의 상냥함과 친절함은 고스란히 전해진다. 어머니의 날을 맞이해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소를 찾아가자는 샨텔의 연락에 불현듯 호통을 치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팬지지만 샨텔은 그 예민함과 불평불만을 고스란히 이해하고 다시 팬지의 마음을 두드린다. 샨텔의 노력이 통했는지 함께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소를 찾은 팬지는 불행했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여전히 그 불행 속에 허덕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불쌍하게 연민하며 눈물을 흘린다.
과거의 불행 속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팬지는 지옥 같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해소해내지도 못한 채 나이가 들어버렸다. 어쩔 줄 모르겠는 이 마음을 사방팔방 눈에 닿는 사람과 사물에게 모두 토해내면서. 이 불행의 지난함은 팬지의 탓일까. 팬지의 탓만은 아닐까. 팬지 가족은 샨텔 가족의 초대로 함께 모여 앉아 점심을 먹게 된다. 팬지는 어머니의 빈소를 다녀온 뒤 곯아있던 상처가 툭하고 터져버렸는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연신 숨죽여 눈물을 흘리고만 있다.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의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그 불행했던 과거에 잠식되어 어느새 불평불만이 습관이 되어버린 지금 자신의 모습에 대한 후회인지 그 눈물의 의미는 알 수 없다.
집에서 유일하게 하는 말이라고는 응이라는 대답이 전부인 팬지의 아들은 어머니의 날을 기념해 팬지를 위해 꽃을 준비해 온다. 그러나 연신 밥만 먹을 뿐 팬지의 아들은 팬지에게 꽃 선물을 선뜻 전해주지 못한다. 낯간지럽다는 부끄러움 마음과 더불어 혹시나 꽃 선물로 인해 팬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팬지는 아들의 꽃 선물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집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꽃을 전시해 둔다. 이 꽃의 화사함을 시작으로 냉기가 돌던 집안에 따뜻함이 가득 차길 바라지만 가차 없이 전시해 준 꽃을 마당에 버려버리는 팬지의 남편의 돌발적인 행동처럼 하루아침에 서로의 대한 무관심과 상처가 나아질 리는 없다. 팬지와 팬지 남편은 서로가 보이지 않는 각자의 자리에서 어쩌면 이미 너무 어긋나서 다시 맞춰지지 않을 것 같은 각자의 슬픔과 상처, 외로움을 홀로 감내해 나간다. 나에게 남아 있는 상처는 오직 나 밖에 치유할 수 없다는 듯이. 팬지 아들은 사람이 많은 번화가에서 헤드셋으로 귀를 막은 채 멍한 표정으로 혼자 외로움을 삭이고 있다. 그때,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팬지 아들에게 낯선 이가 말을 건넨다. 그냥 무시할 법도 하지만 팬지 아들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귀를 막고 있던 헤드셋을 목으로 내리고는 낯선 이가 하는 말을 경청한다. 누군가와 말이 아닌 대화를 하고 싶었다는 간절한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