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에세이 |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 01
(2016. 3. 11, 포지타노)
언덕이 가파르다. 해안을 따라 이어진 경사 위로 허연 집들이 계단처럼 서 있다. 동네 주민의 말을 듣지 않고 B & B*까지 걸어가려다 보통 낭패를 본 것이 아니었다. 구글 지도에 찍힌 도보 시간은 조금도 믿을 것이 못 되었다. 캐리어를 끌고 도대체 얼마나 허덕거렸는지.
*B & B(Bed & Breakfast): 침실과 조식을 제공하는 숙박업소의 일종. 이탈리아의 게스트하우스는 대체로 'B & B'라고 명명되어 있다. 조식으로 보통 빵과 커피 한 잔을 제공한다. 아말피 해안 지역의 경우 그 외에 과일, 주스, 우유, 요거트 등을 트레이에 푸짐하게 차려서 침실로 가져다 준다.
지난 이틀 간 문제와 사고들이 잇다라 터졌고, 몹시 지쳐있었다. 몸을 씻고 침대 위에 널부러졌다.
흰 이불 위에 누워 둥글고 흰 천장과 벽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똑같이 하얀데 어쩌면 이렇게 병원과는 다를까. 자세히 보면 미장한 것치고 벽이 고르지 않다. 두툼하고 둥그스름하게 마무리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신화 속 거인들이 굵다란 손가락 끝으로 쪼물딱대며 만든 듯하다.
어젯밤 두 번이나 문을 두드려야 했던 카프리*의 전통 가옥도 이렇게 흰 지점토 동굴같았다. 이런 집은 볼 때마다 그리스 영향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중해 여기 저기, 심지어는 북아프리카에서도 이런 흰 집을 볼 수 있다.
*카프리(Capri): 나폴리 만(灣)에 위치한 섬. 유명한 관광지이며 카프리 맥주로도 유명하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써야할 편지가 있었다, '희다'는 것에 대하여.
한참 편지를 쓰다가 알았는데, 방 안을 메우던 파도 소리가 파도 소리가 아니었다. 온풍기가 출입문 바로 위에 설치돼 있어서, 파도 소리가 바깥에서 새어들어온다고 착각한 것이다. 흰 동굴 같은 방 안을 희미하게 헤엄치는 소리가, 어째 자연의 소리치곤 너무 일정하더라. 혹시나 싶어 온풍기를 꺼보니 방 안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중얼거리면서 다시 온풍기를 켰다. 이제는 이것이 파도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여전히 파도처럼 들린다. 그러면 됐지, 뭐.
편지를 마무리하고 잠시 테라스로 나갔다. 어두운 밤, 바다를 마주하고 있지만 시야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3월 겨울 바람이 몹시 차가웠는데, 부드러운 감촉으로 몸에 감기는 것이 희한했다. 이 바람이 어둠을 뚫고 파도도 밀고 온 거겠지. '진짜' 파도 소리는 참 희한하더라. 하나 보이지 않는데도 먼 곳에서 가까이로 밀려온다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추워서 금세 다시 방안으로 돌아왔다. 방 안에도 파도 소리가 난다고 위안을 삼으면서.
"아까 오는 길에, 술 취한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쟨 가짜 린포체*야'."
*린포체: 전생의 업을 이어가기 위해 몸을 바꿔 다시 태어난 티베트 불가의 고승. 살아있는 부처로 불린다.
아이가 속이 상해서 노인에게 이야기했다. 그 말에 노인도 속이 상해서 아이에게 대답했다.
"그 말을 왜 신경써요~?”
어린 여자 아이가 속상해하는 어른을 달래는 듯 희한한 말투였다.
그들은 티벳으로 가는 산을 넘지 못했다. 발이 빠지면 가슴께까지 몸이 쑤욱 들어가는 그 겨울산 위를, 그 눈보라 속에서 넘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뿔피리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그칠 줄 모르는 눈보라 속에서 아이는 계속해 뿔피리를 불었다. 시야를 메운 흰 눈보라를 뚫고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기를 빌면서.
아이는 노인의 품에 안겨 울었다.
(2016. 3. 11, 포지타노)
친구에게,
어제 카프리에서 하룻밤 자고, 오늘 소렌토까지 들어와서* 점심 먹고, 시타 버스* 타고 포지타노까지 들어왔어. 나폴리 떠나는 길에 너무 너무 고생했고, 카프리에서도 밤새 정말 힘들었어. 오늘도 일정이 좀 힘들었네.
*소렌토(Sorrento)는 굉장히 아름다운 도시이다. 외부에서 페리로 접근해보기를 추천하는데, 바다에서 보이는 도시 외관이 동화 속 성처럼 아름답기 때문이다. 도시 외곽을 이루는 높은 성곽 위로 도시가 세워져 있으며, 이 성벽을 온통 덩쿨이 휘감고 있다.
*시타 버스(Sita Bus): 나폴리부터 아말피 해안을 따라 살레르노까지 운행하는 버스. 아말피 해안을 따라 움직이므로 탑승 시 바다 방향에 앉기를 추천한다.
포지타노는 첫눈에는 그냥 그랬는데, 투숙하고 좀 있으니까 좋다. 지금 한밤중인데, 파도 소리가 굉장해. 잘 때 가끔 틀어놓고 잔다는 그 슬립 사운드 소리가 나. 파도와 바람 소리 믹스.
지금 너무너무 힘들어. 계획한 건 다 엉망진창이고, 힘들어서 풍경을 즐길 여유도 없어. 일기 하나도 못 쓰겠어. 그냥 어디 어떻게든 정박하고 싶다는 생각 밖에 안 들어.
이탈리아 남자들은 대체로 굉장히 친절하고, 나이있으신 분들은 또 자상해. 하지만 가장 친절한 건 남부의 중년~고령의 부인들이야, '오지라퍼*'라는 단어는 그들을 위해서 생겨난 걸거야. 나폴리를 떠나면서부터 포지타노에 오기까지는 정말, 정말, 정말, 너무 힘들었어. 아이폰이 결국은 망가졌거든. 아주머니들이 도와주지 않으셨으면 정말이지 아무 것도 못했을거야.
*오지라퍼: 오지랖이 넓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속어. ‘오지랖’에 ‘~하는 사람’이라는 영어 접미사 ‘-er’을 붙여 만들어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했어. 그걸 '순진'이든 '순수'든 '순박'이든, 뭘로 번역하든 간에,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사실은 그게 좋은 거 아닐까?
이기와 경쟁으로 가득한 세상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그 사람들 삶이 그간 그랬던 거라고 생각해. 한비자였나, 아무튼 법가 사상가 중에 이런 얘길 한 사람이 있어.
다들 속으로 무슨 생각하는 지 몰라, 내 단순한 호의에서도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 사실 나도 최근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 모든 친절이 어떻게든 관광 비즈니스와 관련있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 특히 카프리랑 포지타노 같은 휴양지에서는 더 그렇고.
그러고는 이런 생각을 하는 날 생각하곤 마음이 어두워져, 정말 그저 단순한 호의일수도 있는 건데, 난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됐을까.
가끔 성악설을 믿는 듯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돼. 그들이 마음을 너무 깊이, 또는 지속적으로 어지럽혀서 내가 괴로워질 땐 또 주문을 외워.
세상에는 '살아남기 위해서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 각박한 게 현실인 건 그들에게 그것이 늘 현실이었기 때문이겠지. 그들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질 때 저걸 몇 번 중얼거리면 마음이 많이 가라앉고 위안이 돼. 뭐, 성악설을 믿는다면 그 반대로 말하려나? '인간이 약한 건 악하기 때문이다.'
포지타노의 밤이 깊었어. 벌써 새벽 1시 44분. 파도 소리가 방안을 메워서 음악도 틀지 않고 있어. 나에게 이건 다시 자고 싶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아름다운 소리야. 파블로 네루다* 생각이 가득하고 세상 모든 곳에서 시가 흘러나올 것 같아. 그러고도 또 나에게 이건 불면증을 치료하는 편안한 소리이지. 하지만 누군가에게 파도 소리는 삶의 풍파이자 거친 세상의 상징처럼 들릴 거야.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칠레의 시인. 바다를 비롯, 칠레의 아름다운 자연을 소재로 많은 시를 썼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20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소재로 만든 영화 <일 포스티노>는 나폴리 만(灣)의 프로치다(Procida) 섬에서 촬영된 것으로 유명하다.
모든 건 이중적이야. 파도에도 매끈하여 압도하는 윗면이 있고 포말을 일으키며 압도당하는 아랫면이 있지. 그들이 너를 어리다고 덜 컸다고 세상 물정 모른다고 비웃을 지라도, 그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것이고 그들의 삶이야. 인간들도 세상도 꽤 괜찮아, 그리고 누가 뭐라든, 인간과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 더 성숙한 태도인 건 확실해. 사실은 이게 오랜 시간 인간과 함께해온 인문학과 휴머니즘의 절대적 요체가 아닐까? 그러니 그냥 그렇게 맑게 남아 있어도 되고, 세상과 사람들 심지 속의 믿음을 잃지 않아도 괜찮아.
중요한 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충분히 지혜로워야 한다는 거, 그리고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는 와중에서도 밝고 맑게 계속 마음을 닦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거. 그리고 정말로 나쁜 환경이어서 자신이 계속해서 허물어져 간다면, 그걸 볼 수 있는 눈은 잃지 말아야 한다는 거, 그리고 그 환경을 박차고 나올 수 있는 용기와 힘만큼은 남겨둬야 한다는 거.
에휴, 나 너무 피곤하다, 여기까지만 쓸게. 잠깐 테라스 나가서 바람 좀 쐬어야겠어. 그리고 어둠 속에서 쏟아져드는 파도 소리도 좀 즐겨야겠다. 몹시 추울테니 금세 다시 들어오겠지. 파도 소리는 방 안에서도 잘도 울리니, 파도의 템포에 마음을 맞추어, 천천히, 천천히, 더 천천히, 지난 삶은 다 잊고 하루라도 빨리 온 우주를 그러안을 수 있도록 애를 좀 써야겠다.
부오나 노테*, 내 친구 룰라바이*.
*부오나 노테(Buona notte): '굿나잇'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인삿말.
*룰라바이(Lullaby): 친구의 별명. '자장가'라는 뜻이다.
(2017. 12. 12, 서울)
두개골이 깨져라 악을 써댔다.
흰 알 껍질에 갇혀 있었다. 양 팔을 펼쳐서 가로로도 세로로도 두 번 팔을 벌릴 수 없는 이 곳. 아무 소리도 낼 수 없고, 들을 수 있는 이도 없다. 불행감과 슬픔이 꽤 오랜 시간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늘 알 속에서 숨죽여 울다 악몽으로 빠져들곤 했다.
포지타노 여행기를 뒤적거리다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다시 되새겨야 할 얘기가 있었다, '희다'는 것에 대하여.
'살아남기 위해 사는 사람들.' 파도에는 매끄럽게 공중으로 몸을 던지는 윗면이 있고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아랫면이 있다. 그냥 똑같은 것을 하는 게 어떤 이들에게는 살아남아야만 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타인들도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자신과 자신의 삶에 저지르는 온갖 행위들에 위안을 삼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죄책감을 덜고, 잊기 위해서 성취감 속으로 자신을 더욱 함몰시킨다.
물론 더러는 피해자들이 발생한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은 아니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일들로 인해 이들 또한 변하지 않기를.
메인 사진 출처: 구글 맵(https://www.google.com/ma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