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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브릴 Apr 08. 2019

서른엔 ‘당연히’ 떠날 준비

세계일주 에세이 | 출발 전에 일어난 일들 01




:: 1 ::


세계일주를 떠나겠다고 결정한 것은 스물 네 살 때의 일이었다. 코스모스 졸업 후, 천고마비의 계절을 맞아 막 백수의 길로 들어선 참이었다. 어느 날 불현듯, 샤워 중에 이런 질문이 생긴 것이다.

사실 이것이 꽤 어려운 질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날따라 답과 질문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의 삶을 겪어야 한다.' 인생의 고뇌라도 담겨있어야 할 듯한 질문에 내 사고 과정도 대답도 너무나 농담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샤워를 마칠 때 쯤에는 이미 그 방법에 대해서도 결론이 나 있었다.

그래서 서른, 서른 하나, 이렇게 2년 동안 여행을 다니자고 마음먹게 되었던 것이다.


출처: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이 때 나는 취업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내내 내가 밥 굶을 사람은 아니라고 자신하고 살았다. 불안과 스펙쌓기에 휘둘리는 건 좋은 행동이 아니라며 책과 영화와 음악을 즐기면서 한량처럼 지냈다. 물론 나 스스로는 이것을 두고 '마음의 양식을 쌓았다'고 한다.


졸업 후, ‘취준생’으로서 내가 가진 것은 4년제 대학 졸업장, 성적표, 그리고 졸업 시 제출해야 했던 토익 점수가 전부였다. 인턴 한 번 도전해본 적 없어 앞으로 서류 낙방이 줄지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삶에 처음으로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백수 시절'이
참으로 소중한 기회였다.


그러니 이 때 내가 천고마비의 계절에 딱 어울릴 만한 질문을 던진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지 모른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나에게는 늘 선택하지 않아도 어련히 해야할 일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대학교 다음 회사’로 이어지지 못하고, 삶에 처음으로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백수 시절'이 참으로 소중한 기회였다.




:: 2 ::



대학 시절 한량이었다는 것도 그렇고 이것 참 내 무사태평한 성격이 드러나는 일인데, 세계일주 준비의 첫 걸음은 회사에 퇴사 의사를 밝히고, 그 다음으로 외장 배터리를 사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동안 여행다닐 돈도 모으지 않았고, 계획은 커녕 정보를 수집한 적조차 없었다는 말이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간간히 여행 계획을 발설하는 것뿐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서른에 여행을 떠나겠다고 결정했지만, 워낙 행동이 부족하고 생각만 많은 사람인 터라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서른에 세계일주를 떠나겠다', 사람들에게 말이라도 해두면 부끄러운 줄 알고 가긴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6년이라는 시간동안 내 여행 준비란 꼴랑 이게 전부였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너무나 당혹감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퇴근 인사하듯 퇴사 의사를 밝히고는, 시장에서 파라도 사듯 외장 배터리를 사고 있더라.


스물 넷에 세계일주를 '할 일'로 정해둔 이후로, 어쩌면 그동안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학 다음 회사’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회사 다음 세계일주’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 3 ::



친구에게,


지난 주에 1월까지만 일하는 것으로 회사랑 합의를 봤어. 맘은 벌써 떠났는데 아직도 세 달 넘게 일해야 하다니. 이제 자정을 넘었고 아침이면 또 출근이야. 정말이지 좀 싫긴 싫다ㅋㅋㅋㅋㅋㅋㅋ


그동안은 일상의 삶을 버리고 오랜 여행을 떠나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인 것 같았어. 그런데 이렇게 되고 나니 일상을 유지하는 것도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구나, 생각이 들어. 역시나 어려운 건 변화를 주는 것 그 자체인가봐, 어느 쪽이든 그 자리로 가고 나면 괜찮아지는 것 같아.


어려운 건 변화를 주는 것
그 자체인가봐.


나 말야, 그 때 여행 가겠다고 결심하면서 25살부터 연단위로 계획을 짰어. 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 25 - 26살엔 가능한 한 회사 경험을 많이 하고, 27 - 29살에는 한 가지를 정해서 몰입해서 일하고, 30 - 31살에는 세계일주를 하는 걸로. 이렇게 단순하게만.


그런데 신기하게 이게 그동안 다 이루어졌어. 내가 스스로 변화를 주지 못해서 주저하고 있으면, 외부적으로라도 뭔가 일이 발생하는 거야. 다른 회사로 옮긴다든가, 조직 개편이 몇 달마다 일어난다든가, 갑자기 프로젝트를 하게 된다든가, 하면서.


반면에 일이 잘 안 풀려서 초조하게 계획을 짜면, 그건 되는 게 하나도 없더라고.


올해 난 서른이고, 회사 사정이 생겨서 내년에야 여행을 출발하게 됐어. 1년 미뤄지긴 했지만, 그때의 계획이 아주 신기하게도 계속 이루어지더라고.


이 모든 게 신의 의지이리라
생각하려고.


이렇게 신기한 일들 겪으면서, 지난 6년 간 '믿음'같은 게 생긴 것 같아. 심지어는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 불안해하면서 세운 계획들은, '내'가 세운 계획이고, 백수시절에 만든 그 연단위 계획은 어쩌면 '신'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나 그냥 이 모든 게 신의 의지이리라 생각하려고. 그가 나를 위해 무언가 겪게 하고자 하는 게 있으리라고. 모든 것은 신의 의지이고, 앞으로의 여행길에서도 나를 지켜주실 거라고.



(2015.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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