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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Jul 26. 2021

제주도 조천의 한적한 하루

2010 제주 여행 Day8

제주 여행의 마지막 하루는 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유유자적 쉬기로 했다. 종달리와 조천의 차이를 꼽으라면 조천은... 그냥 제주 시골 동네라는 것? 종달리도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이제 많이 소개되고 알려졌고 지미봉과 우도로 가는 선착장도 있어서 확실히 관광하기 좋은 곳이다. 조천은 그냥 제주도에 사는 느낌이 나는 조용한 동네라고 하면 딱 맞겠다. 몇 년 전 여행 왔을 때 '여자 많이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었는데 그때 이 동네를 허브로  제주 곳곳을 돌아다니는 분도 많았다. 집 삼아 머물기 좋은 곳이다.


나는 숙소 꿈꾸는 섬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이 내려주신 드립 커피를 한 잔 하고 바로 근처를 산책하러 나갔다. 조천 포구를 걷다가 용천수 터 옆에 있는 연북정에 올랐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곳은 불교 보우대사가 순교한 터라고 한다. 정자 마룻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하얗고 깔끔한 회칠한 천장을 가로지르는 서까래를 쳐다보며 파도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누워 있다 보니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날이 너무 따뜻해서 봄날을 맞이한 느낌이었다. 잠시 후 신나게 수다를 떠는 친구 무리가 나타나서 난 조용히 자리를 떴다. 바로 옆이 용천수 빨래터. 조천리는 이 용천수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아주 활발한 곳이다. 나도 지인 덕분에 용천수에 대해 좀 알게 됐고 애정이 생겨서 귀한 제주의 자연 유산이 잘 지켜지길 바라는 맘을 담아 빨래터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 반을 넘어가고 있다. 영사관 부인들의 삶을 지켜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음악가이자 교수라는 버젓한 직업 그리고 전문성과 실력을 인정받아 음악 방송까지 진행하는 프로가 남편의 직업 때문에 수시로 자기 커리어를 단절시켜야 한다는 것이 지금의 시선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해야 하고 조심해야 하는 자리, 그리고 누군가에겐 선망의 자리이기도 한 곳에서도 나름의 방법을 찾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진보적인 여성임이 분명한데도 현대의 눈으로 보면 이렇게 능력 있는 분이 누군가의 아내로서의 삶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했겠다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다. 그러고 보면 진보나 성숙이나 변화라는 것은 한 번에 될 리가 없는 게 맞다. 누군가가 현재의 눈으로 보면 아쉽지만 당시의 눈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한 걸음을 걸음으로써 다음 발걸음을 이끌어 내면서 길을 만든다. 나는 그런 경로를 이탈해서 너무 내 입맛에 맞는 것 만주 장한 것은 아닌지 잠깐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마을은 고요하고 바다는 잔잔하고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선선했다.  

무슨 10년 지기 만난 것처럼 구는 길고양이 ㅋㅋ

슬슬 배가 고파서 나름 마을 센터 쪽으로 이동했다. (한... 20 걸음? ㅋㅋ) 전에 봐 둔 음식점이 하나 있었다. 전에는 그냥 카페였는데 이제 분식도 파는 곳 '바다 빛깔' 여기서 떡볶이를 한 접시 시키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조천 포구를 바라보면서 먹었다. 와... 정말 비용이며 맛이며 모든 면을 비교해 보았을 때 이보다 좋은 분식 풍경이 있을까 싶다.  다 먹고 골목을 좀 돌아다니다가 길고양이를 만나서 한참을 궁디 팡팡 봉사를 해 드리고 겨우 놓여났다. 전생에 나와 베프라도 됐는지 정말 저렇게 애교가 많은 고양이는 살다 살다 처음 봤다.

숙소 바로 근처에 있는 소품집에 들러서 엽서와 책 모양 배지를 사고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여기서 산 것들은 와서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그때 파란색 잠자리 안경테를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안 샀는데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다. 다음에 가면 꼭 다시 사  와야지. 왜 안 샀을까? 겨우 2만 원인데 너무 고민했다. 여행지에서 눈에 들어온 물건들 중 별로 안 비싼데 아끼다가 내내 후회한 적이 많다. 이렇게 일기를 쓰면서 다짐한다. 다시는 가지 못할 시간과 장소에서는 사치를 부리는 것을 연습하고 반드시 그 기회를 잡으라고....

언제나 다시 가고 싶은 곳 '바다 건너 온 아름다운 것들'

 

동네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소품집과 편의점 가게 다 돌아다녀도 10분 거리도 안 된다. 오후 내내 숙소 2층 전망대에서 책을 읽었다. 전부터 찍어 놓은 독서 자리였는데 드디어 소원 성취 정말 좋았다. 책 속의 영사관 부인은 어느덧 은퇴할 때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하고 그 과정에서 이제는 내려놓아야 하는 외교관의 특권이나 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화의 풀무질 서점에서 산 <대사관저의 담장너머>

아주 어릴 적에는 나에게도 당연히 그런 시간이 주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온갖 상념에 젖어 은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꽤 소수에게만 주어진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정말 열심히 산 사람만이 이런 시기에 후련함과 섭섭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내가 어느 날 은퇴라는 걸 하게 될까? 나에게도 그 정도로 충분하고 넉넉한 종결의 시간이 주어질까. 여행을 마무리하며  책 속의 누군가와 함께 삶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상상해 보는 시간이 썩 좋았다.

점점 해가 질 시간이 가까워졌다. 저녁을 먹으려고 골라놓은 식당으로 갔다. 아... 식당이 문을 닫았다. 코로나 이후 이런 식당이 많다. 미쳐 지도 정보를 삭제할 겨를도 없었나 보다. 그래서 카카오 맵을 켜고 주변을 탐색해 봤다. 고기 천국 한국에는 나처럼 부분 채식을 하는 사람이 먹을 만한 식당이 많지 않다. 그런데 천만다행!! 숙소 바로 옆에 분식집이 있다. 후기도 좋다. 얼른 가서 김밥 포장을 부탁하고 멸치 국수를 먹고 있는데 꼬마 김밥을 서비스로 주시더니 계산할 때는 귤을 한 봉지 안겨주셨다. 제주도의 후한 귤 인심 ^^ 그리고 놀랍게도 할머니 사장님은(할머니라기에는 너무 젊으시지만) 부산 출신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식당 이름은  제주도스럽지 않게 '명동 왕만두' 그리고 분식집 바로 옆에 있는 타르트 가게 '하우다'에서 그럴듯한 타르트를 두 개 샀다. 룰루랄라 포장 음식들을 들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현무암 담장 너머로 검은 고양이가 의젓하게 날 노려본다. 조용히 숨어서 사진만 찍고 얼른 자리를 피해 드렸다.




마지막 밤을 장식해 준 아름다운 석양

저녁에 짐을 정리하고 가계부를 정리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바깥 정원을 바라보며 타르트로 아침 식사를 하고 남은 귤을 까먹었다. 아쉽지만 7일을 머무르고 나니 집에 돌아갈 만한 마음이 든다. 버스를 타고 공항까지 갔다. 공항에는 코로나답게 생체 인식 등록을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줄을 서고 있었다.


내가 이제껏 제주를 다녀 본 중 가장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가장 많은 음식을 먹어 보았고 가장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았다. 가장 날씨가 좋았던 여행이었다.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싶게 하루하루 날씨가 환상이었다. 총 세 권의 책을 읽었고 여행 기간 중 론칭한 나의 동화 클래스 어른들을 위한 비밀 동화방이 꽤 많이 판매되고 있었다. 돌아가서 마지막 작업을 마치면 이 거대한 산 같았던 프로젝트도 마무리가 된다. 그럼 어떻게든 다음 행보가 이어지겠지. 이렇게 2020년 10월이 마무리됐다.


어른들의 비밀동화방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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