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글을 쓰는 지금은 2021년 7월 30도가 훌쩍 넘는 엄청난 더위와 천 명대가 넘어가는 코로나 확진자로 인해 서울 지역 방역 단계가 4단계를 넘어간 시점이다. 답답한 현실과 상관없이 필리핀의 하늘을 연상시키는 하늘은 이 여행을 했던 그날처럼 참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오늘은 조천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어제 정리한 짐을 한쪽에 가지런히 놓고 아침 일찍 조식을 먹으러 갔다. 오전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 시골 책방 지기님을 만난 후에 조천으로 돌아가는 일정. 짐은 이따 가방을 부탁해가 픽업해서 조천의 꿈꾸는 섬 게스트 하우스에 옮겨 주기로 했다. 지금 묵고 있는 동동 게스트 하우스는 가족이 운영하는 곳이다. 엄밀히 말하면 한 가족의 어머니께서 총괄하신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소품이 아기자기하면서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숙박객에게 제공하는 먹거리가 너무나 풍성하다. 아침에는 그때그때 계절 재료로 만든 두툼한 샌드위치와 각종 음료가 제공되고 원하는 사람은 컵라면이나 계란 요리, 토스트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2층에는 세탁실, 옥상에는 지붕이 있는 건조실이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세탁물을 널 수 있고 밤사이 바짝 마른다. 그리고 옥상에서 보는 경치가... 그냥 거기서 한 나절을 보내도 여행의 한 코스가 될 정도로 아름답다. 언제가 다시 가고 싶은 동동 게스트 하우스.
동동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은 고양이를 너무나 사랑하신다. 돌보는 길냥이들도 많다. 하얀 길냥이가 잠깐 쉬다 갔는데 한 녀석은 사람을 무척 경계하고 손을 안 타지만 사장님을 졸졸 따라다니고 한 마리는 그냥 순둥 해서 개냥이다. 경계가 심한 흰둥이는 맘 편히 늘어져 있는 법이 없다. 항상 주변을 살피고 잠깐만 엎드려 있는 정도다. 그래서 일부러 두 방향은 경계하지 않아도 되게 쉼터를 이렇게 벽에 붙여 주셨다.
사진 찍으니까 노려보는 길냥이
노심초사 주변을 살피느라 조금도 쉬지 못하는 길냥이를 보니 언제나 콘텐츠를 만들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야 하는 프리랜서 내 신세 같아서 감정이입이 됐다. 그렇게 깨끗한 걸 좋아하는 고양이도 영역 다툼에 심하게 시달리면 그루밍도 잘 못하고 점점 꼬질꼬질해진다. 잠도 편히 못 자고 언제나 눈빛이 심각하다. 유리벽 하나를 두고 시종일관 사람들의 손길을 요구하는 반려묘와 너무나 다른 표정의 길냥이를 보며 내 신세를 잠깐 돌아봤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당황스럽게 집합 금지가 되고 모임이 위축되면서 독서 모임도 적극적으로 홍보하긴 힘들어졌고 국어수업도 비대면으로 바꾸면서 생활이 많이 달라졌다. 활동이 줄면서 살도 점점 찌고 (돌이켜보니 이때가 마지막으로 정상 체중이었다...) 끝을 모르는 기다림 속에 마냥 무기력할 뻔했는데 클래스 101에서 온라인 동화 클래스를 열게 되면서 온 에너지를 여기에 쏟아붓고 있었다.
촬영하고 편집하고 재촬영하고 또다시 편집하고 나와 언어가 다른 사람이랑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전체 그림을 먼저 그리고 정교하게 타임 테이블을 짠 후에 움직이던 나는 중간보고와 변동이 수시로 있는 제작 과정을 지나오면서 너무 지쳐 있었다. 아주 손이 많이 가지만 작업 내용은 간단한 자막 작업만 남기고 총 51강 중 일부가 공개되는 론칭을 제주도에서 맞았다. 그러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주변을 수없이 돌아보는 고양이처럼 너무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이곳에서 늘 만나던 여행 친구도 만나고 산책도 하고 해도 보면서 조금 마음을 풀 수 있었다.
종달리의 소소하게 유명한 책방과 작은 카페를 지나 내가 찍어둔 해변 정자로 갔다. 여기 역시 제주도민과 친구인 관계로 알게 된 장소. 저 멀리 일출봉이 보이고 바다는 반짝거리며 바람은 살랑거리고 햇볕은 따뜻했다. 여기서 준이치로의 소설을 읽었다. 고양이가 나오는 소설이라서 얼른 다 읽고 게하 사장님께 선물하려고 부지런히 읽었다. 챙겨 갔던 작은 스피커는 모 회사 사은품으로 나온 스피커인데 성능이 일품이고 소리도 좋다. 주변에 사람 없을 때는 역시 스피커로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노래를 자연의 소리와 함께 듣는 맛이 일품이다.
사장님께 선물한 책 다니자키 준이치로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
여행을 하면 할수록 내가 잘 몰랐던 나를 알아간다. 시골을 좋아하고 그러면서도 숙소는 편한 것이 좋고 사람이 많지 않은 곳에서 저 멀리 소소한 말소리가 들리면 안정감을 느끼고 하루 종일도 걸을 수 있고... 두문포 노린 당 정류장에서 내리면 이 장소를 즐길 수 있다. 부디 깨끗하게 사용해 주기를.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걸상과 의자가 너무 고마운 오전의 한 때였다.
숙소로 돌아와서 짐을 다 내리고 여행 가방 픽업 서비스에 맡길 가방을 현관에 맡기고 사장님께 책을 선물로 드렸다. 고양이 그림이 있는 표지를 보시며 정말 좋아하셨다. 숙소를 나와 작은 동네 종달리를 가로질러 유명한 종달리의 명소들을 하나씩 둘러보고 입구 쪽으로 나오려는데 전에 못 본 카페가 있어서 들어가 봤다. 손님은 나 한 명. 시원한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동네 풍경, 그리고 그날 하루 종일 하늘을 유영하던 고래 구름이 정말 아름다웠다.
땀흘리며 굳이 여기 앉음
여기서는 지난번에 세화 해변의 제주 풀무질에서 산 책을 읽었다. 누구나 부러워하거나 궁금해하는 영사관 사모님이 쓴 책이다. 여행지 얘기가 나오고 모르는 문화권을 살아본 사람의 소소한 일상이 정말 재밌었다. 어릴 때 읽었으면 마냥 부러웠을 텐데 정들고 적응할 만하면 이주해야 하는 직업이라니... 정말 좋을지 모르겠다. 저자 역시 대놓고 쓰진 않았지만 행간에서 말하기 힘든 고충을 겪었다는 것이 은은히 느껴졌다. 이곳 제주도도 마찬가지겠지. 나야 한적한 이 기분이 좋고 가끔 휴식을 느끼는 곳이라 좋지만 여기가 왕성한 생활의 공간인 사람에게는 치열한 삶의 장소일 뿐이겠지. 손님이 없는 비수기에는 힘들지 않을까. 습관 같은 오지랖 걱정을 하면서도 이 한적함을 좋아하는 모순을 느끼면서 버스가 올 시간까지 편안히 시간을 즐겼다.
종달리를 나와 버스를 타고 함덕에 지인을 만나러 갔다. 지인이 소개해 주신 초밥집에서 거하게 점심을 먹고 걸어서 함덕에서 시골길을 가로질러 조천까지 이어지는 길을 산책했다. 하늘에선 계속 고래 구름이 뭉게뭉게 유영하고 가을답게 금빛으로 반짝이는 저녁 햇살이 내 마음도 뭉게뭉게 부풀게 했다. 이렇게 모든 것에 금테를 둘러주는 저녁 햇살의 시간이 너무 좋다.
당근이 자라는 제주도의 밭길을 가로질러 마을을 지나 시시각각 변하는 마을과 해변의 풍경을 즐기며 사람 사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난 일하면서 스트레스받은 일을 쏟아 놓고 인간의 모순과 답답함과 각자 알아서 할 일이지만 얽히기는 싫은 사람들에 대한 누구나 안 하고는 못 사는 이야기들을 떠들다 보니 벌써 저녁 약속 한 시간이 다 돼 갔다. 고맙게도 제주도 지인이 약속 장소까지 대려다 주셨다. 여행지에 가면 일상에선 느끼기 힘든 배려를 많이 받는다. 그래서 자꾸 여행을 가나? 싶기도 하고 ㅎ
여기는 '금요일의 아침, 조금'이라는 한 뼘 책방이다. 인스타 친구였던 분이 오전에 인스타로 디엠을 보내셔서 급하게 만나게 됐는데 그쪽에서 추천한 장소. 파스타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작은 책방이기도 해서 책을 살 수도 있다. 내가 갔을 때는 커피 클래스가 한창이어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책을 읽으면서 인친이 오길 기다렸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는 분이라 어떨지 몰라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여행지고 자주 올 수 있는 곳도 아니라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커피 클래스를 듣던 분들은 어떤 고등학교의 선생님들 같았다. 클래스가 끝난 후 식사를 주문하셨다. 테이블이 하나뿐인 곳이라 긴 테이블 양쪽에 두 그룹의 식사가 차려지기 시작했다. 나와 인친은 왼쪽 저쪽은 다수가 앉은 오른쪽 하지만 결과적으로 다 같이 아는 사람처럼 나란히 앉아 있다.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옆의 테이블이 선생님들인 걸 알고 인친이 돌발적으로 말을 걸어서 생각보다 소심하고 경계가 명확한 나는 진짜 깜짝 놀랐다. 그 테이블의 손님들이 가시고 이번에는 사장님 내외에게 말을 걸고 소개를 하셔서 엉겁결에 인사를 나누고 사모님과는 잠깐 얘기도 나누게 됐다.
육지에서 살다가 제주도에 이주한 분, 제주도에 살다가 육지에서 살다가 다시 제주도에 오신 분, 그리고 육지에서 육지로 이주해서 사는 나.
우리는 우정이나 편안함이나 오해나 친밀함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얘기 중에 내가 한 얘기가 생각난다.
친하다는 것 자체가 오해였을 수 있죠. 오해가 생겨서 멀어진 게 아니라, 저는 그렇던데요. 각자 어린 시절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이 사람이다 오해하는 동안은 친하다가 아니다 싶은 순간 돌아서게 되던데요.
오래 가까웠던 친구와 절교한 지 한 달 정도 된 시점이었다. 덤덤하고 후련해진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이 친구와 난 친하지 않고 지인일 뿐인데 친구인 척한다. 난 피곤하고 정리하고 싶다. 그렇게 멀어졌고 그 자리엔 새로운 사람들을 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나에게 적합한 여행지 찾기가 쉽지 않듯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친절하다고 다 나에게 좋은 사람도 아니고 서운하거나 불편한 점이 있다고 바로 돌아서게 되는 것도 아니다.
식사를 마치고 인사하고 나오는데 사장님이 '동화 클래스 저도 들을게요.' 하셨다. 너무 기뻤다. 뭔가 대화하면서 나와 마음이 통하신다고 느끼시니까 클래스에도 관심이 생기신 거 아닐까? 클래스 수강과 상관없이 그 한 문장의 말이 기분이 좋았다. 익숙한 꿈 섬 게하의 숙소에 들어와 쉬면서 여행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