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틈틈이 온라인 클래스 댓글을 다는 중이다. 예상했던 포인트들이 질문으로 올라와서 다행이다. 오늘은 하도리까지 걸어갈 예정이라서 조식을 많이 먹었다. 지난 여행 때 완만한 해안 길로 하도리까지 갔는데 꽤 멀게 느껴져서 준비를 단단히 했다. 오늘은 이번 여행 와서 처음으로 날이 흐렸다. 마당에서 식사를 마친 고양이 흰둥이가 잠깐 나온 해를 즐기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기 때부터 여기서 밥을 먹은 고양이라서 사장님이신 어머니께서 일하시느라 마당을 오가면 거리를 두고 계속 따라다닌다. 난 길냥이들이 밥을먹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본 적이 없는데 정말 초지일관 불안해 보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깜짝깜짝 놀라고... 그나마 유리문 앞에서 등을 붙이고 누운 뒤에나 쉬는 모습이 꼭 여행 온 다음에야 느긋해진 내 모습 같아서 한참 바라보았다.
왠지 멋있어보였던 창고
하도리 입구와 널리 보이는 지미봉
마을마다 있는 퐁낭
종달리에서 하도리까지 걸어가는데 너무 금방 도착해서 당황했다. 아무리 한번 가본 길이라지만 이렇게 가까웠나. 중간에 쉬어가며 간 기억이 있는데 이 짧은 거리를 쉬어가며 갔다니... 가본 적 없는 길은 왜 그리 멀게 느껴질까.상상하는 거리가 실제 거리의 세 배는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늘 돌아오는 길은 반도 안 온 것 같은데 도착이다.
아무튼 얼떨떨한 기분으로 막상 도착하고 나니 배가 너무 부르고 (애초에 이렇게 가까운데 두 끼를 해치우려고 한 것이 무리긴 했다.) 서점이든 카페든 산책로든 마땅히 볼 것도 없는 곳이라 (이건 내가 동네 전체를 본 건 아니니 확실치 않다.) 다른 동네 어딜 갈까하다가 오조리로 가기로 했다. 하도리는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 내가 갈 땐 항상 철이 아니어서 새가 없지만... 마침 오조리도 철새 도래지라는데 풍광이 좋다니 가보는 걸로.
오조리 하동 정류장에서 내려서 포구 쪽으로 걷다 보면 올래 2코스로 이어지는데 뭐랄까... 길이 원시적인 느낌이 나고 고수들만 오갈 것 같다. 인적이 없고 조용한데 새소리가 다채롭다. 그리고 물을 따라 깊숙이 들어섰더니 갑자기 새들이 촤르르 날아올랐다. 정말 놀랐다. 새가 원래 저렇게 큰가? 인기척이 들리니까 일제히 날아오른 것 같다. 정말 멋있었다. 블로그나 다른 사진을 통해 본 포구 쪽보다 이쪽 길이 정말 제주 자연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길이는 짧은데 볼거리는 한가득.
알쏭달쏭했던 안내문 돌아오는 길에 해독(?) 성공
산책로가 끝나고 이제 빠져나오려는데 출구에 울타리와 가로대가 있었다. 그리고 손글씨가 써진 표지판 하나. 띄어쓰기가 안 돼 있고 말투가 예스러워서 알아듣기 힘들었는데 옆에 놓인 돌을 밟고 넘어가라는 것 같았다. 전체 뜻을 너무 알고 싶어서 사진을 찍고 틈틈이 들여다봤다. 82는 무슨 뜻이지? 말을 키운다는 건가? 할 말이 있다는 건가?
"82새노인말이있습니다. 돌위로올라가세요. 댁에행운있기를. 문을꼭막으세요. 감사합니다."
완벽하게 해석한 건 아니지만 '세'를 '새'로 표기한 것 같다. 그렇다면 다음 두 가지 해석이 가능
1. 82세 정도 된 말이 산다. 말이 나갈 수 있으니까 여기 문으로 다니지 말라.
2. 82세인 노인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이하 동문.
1이라고 해석한 이유는 정말 말 울타리 같아서인데 글 쓰신 분도 나이가 있으신 것 같고 말을 아껴서 간곡히 부탁한 것 같기도 하다. 2의 해석은... 굳이 나이르니 밝히며 할 말 있다고 쓸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옛 소설들이 저런 문체라서 저 연배의 문체라면 가능한 추측이다.
뭘 이렇게까지 저걸 신경 쓰나 하겠지만 82가 나이였구나! 했을 때의 희열은 나만 안다. 그리고 이러려고 여행 왔는 걸. 이날 가장 인상 깊은 여정은 저 간곡한 표지판이었다.
돌을 딛고 바로 큰 기로 나와보니 지난 여행 때 묵은 플레이스 캠프 바로 옆이었다. 광치기 해변에 들러서 잠깐 관광지 느낌 느끼고 버스 타고 종달리로 돌아왔다. 다음날 숙소를 옮겨야 해서 짐을 싹 챙겨놓고 종달리 동네로 들어가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은 갈치조림 무난했다. 그런데 여긴 1인 정식이 딱 좋다. 8천 원! 합석될 수도 있음.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