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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Oct 22. 2023

엄마의 책상 - 10월에는 詩

가을에는 詩香에 스며들기

10월 독서모임 엄마의 책상에서는

윤동주와 백석, 그리고 기형도의 시를 읽고 낭송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모처럼 기형도 전집과 윤동주와 백석의 시집을 꺼내들고 어떤 시를 함께 낭송하면 좋을까 고민하면서 선정에 들어갔다.

그렇게 선정한 시가 다음과 같다. 박목월의 '이런 시'가 선정 기준이랄까. 

익히 알고 있던 詩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시, 그러나 오늘 내 마음을 건드리거나 울렁거리게 만드는, 혹은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내 마음을 훔쳐본 듯 요즈음 내 마음 풍경과 닮아있는 시어들 앞에서 멈추게 되더라.


BGM도 신경 써야 하는데 시 낭송할 때마다 변경하긴 그렇고 해서 이 가을에 어울리는 첼로 음색과 피아노 선율로 통일하기로 했다.

세 시인의 시를 낭송하기 전, 먼저 박목월의 시 한 편을 낭송하기로 하자.


이런 시


슬며시 다가와서

나의 어깨를 툭 치며

아는 체하는

그런 시.

대수롭지 않게

스쳐 가는 듯한 말씨로써

가슴을 쩡 울리게 하는 그런 시,

읽고 나면

아, 그런가 부다 하고

지내쳤다가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번쩍 떠오르는

그런 시.

투박하고

어수룩하고

은근하면서

슬기로운 그런 시

슬며시 

하늘 한 자락이 

바닥에 적셔지듯 한, 

푸나무와

푸나무 사이의

싱그러운

그것 같은

그런 시.

밤늦게 돌아오는 길에

문득 쳐다보는,

갈라진 구름 틈서리로

밤하늘의 눈동자 같은 

그런 시.



소년(少年)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이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씃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슬픈 족속(簇屬)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참회록(懺悔錄)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박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츨츨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푹푹: 눈 따위가 많이 내려 수북하게 쌓이는 모양

츨츨이: 뱁새

마가리: 오막살이의 평안도 사투리

고조곤히: 고요히의 평북 사투리



바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끓는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백화白樺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장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잎 · 눈(雪) · 바람 속에서


나무가 서 있다. 자라는 나무가 서 있다. 나무가 혼자 서 있다. 조용한 나무가 혼자 서 있다. 아니다. 잎을 달고 서 있다. 나무가 바람을 기다린다. 자유롭게 춤추기를 기다린다. 나무가 우수수 웃을 채비를 한다. 천천히 피부를 닦는다. 노래를 부른다.


나는 살아 있다. 解氷의 江과 얼음山 속을 오가며 살아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은빛 바늘 꽂으며 분다. 기쁨에 겨워 나무는 목이 멘다. 갈증으로 병든 잎을 떨군다. 기쁨에 겨워 와그르르 웃는다. 나무가 웃는다. 자유에 겨워 혼자 춤춘다. 폭포처럼 웃는다. 이파리들이 물고기처럼 꼬리 치며 떨어진다. 흰 배를 뒤집으로 헤엄친다. 바람이 빛깔 고운 웃음을 쓸어간다. 淸潔한 겨울이 서 있다. 


겨울 숲 깊숙이 첫눈 뿌리며 하늘이 조용히 安心한다.


도로시를 위하여

---幼年에게 쓴 편지 1


1


도로시. 그리운 이름. 그립기에 먼 이름. 도로시.

나는 아직도 너를 기억한다. 그 얕은 언덕과 어두운 헛간, 비가 내리던 방죽에서 우리가 함께 뛰어놀던 그리운 유년들. 네 빠른 발과 억센 손은 같은 또래의 사내아이들을 제치고 언제나 너를 골목대장으로 만들어주었지. 우리는 아무도 여자애 밑에서 졸병 노릇하는 것을 불평하지 않았다. 언젠가 위험을 무릅쓰고 꺾어온 산나리꽃 덕분에 네가 내게 달아준 별 두 개의 계급장도 난 잊을 수 없다. 모두가 네 명령 밑에서는 즐겁고 가벼웠다. 네가 혼혈 소녀였던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던 용감한 도로시. 네가 고아원으로 떠나던 날의 그 이슬비를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네가 떠나자 우리는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서로 번갈아 가며 대장 노릇도 해봤지만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도로시.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다시 재밌는 전쟁놀이를 시작했는지 알고 있니? 우리는 마치 네가 우리와 함께 놀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공터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철길 위를 뛰어다녔다. 네가 명령을 내렸다. 도로시. 우리는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너의 명령을 알아차렸다. 너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비어 있는 대장의 자리에서 늘 웃고 있었다. 언제이던가 나는 네가 늘 앉아 있던 자리에 남몰래 찐빵을 갖다 놓은 적도 있었단다. 그렇게 우리는 네가 없어도 너와 함께 즐겁게 놀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 너에 대한 우리의 짧은 사랑 때문이었겠자,


2


도로시. 먼 이름. 멀기에 그리운 이름. 도로시.

너는 그 머나먼 대륙으로 떠나기 전에 딱 한번 우리 마을에 들렀었다. 가엾은 도로시. 너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벌써 네가 필요 없었다. 너는 주근깨투성이, 붉은 머리의 말라깽이 소녀에 불과했다. 왜 그날도 이슬비가 내렸는지 모른다. 그날 마을 어귀에서 네가 보여준 그 표정, 도로시. 그것은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대장으로서 보여줄 수 있었던 마지막 비웃음이었을까. 그 후 우리는 재빨리 나이가 먹었고 쉽게 너를 잊었다. 도로시. 그러나 절대로 우리가 버릴 수 없는 도로시. 그리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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