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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프릴 Mar 30. 2021

글로벌을 무대로 살다 (feat. MBA)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던 시간. 무엇보다 가장 치열하게 산 시간.

앞 글에서 이어짐.

창업가라는 새로운 씨앗



MBA 준비부터 해피콜까지


경영학과 출신에 컨설팅 업계에서 일했던 터라, 주변에 MBA 출신들이 꽤 많았다. 때문에 직장생활 3년 차이던 2008년 MBA에 관심을 두고 비즈니스 스쿨 지원에 필요한 지멧(GMAT)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2009년 초에 미국에 가게 되면서 공부는 중단되었다. 이후 다시 시험 준비에 돌입해 탑 스쿨 지원에 필요한 지멧 700점 대의 점수를 받은 것이 2013년이니 나는 참 오랜 시간 MBA를 준비한 셈이다. 


지멧 시험을 치를 때만 해도 점수만 나오면 끝인 줄 알았는데, 사실 점수는 탑 스쿨 지원을 위해 필요한 최소 자격요건에 불과했다. 


학교마다 4-6개에 달하는 에세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데, 영어로 에세이를 쓰는 것도 고역이지만, 더 고생스러웠던 것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심오한 물음에 답하는 일이었다. 지난 삼십 년의 삶을 돌이켜보며 집요하게 조각내고 맞추기를 반복하며 질문에 답하고자 머리를 쥐어짰다. 한 친구는 이 에세이를 쓰고자 치열하게 삶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이야말로 MBA의 정수라고 말한다. 


여하튼, 지멧 시험, 에세이, 추천서, 그리고 인터뷰 준비까지 산 넘어 산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던 학교로부터 일명 “해피콜"이라고 불리는 합격 통보 전화를 받은 순간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이다.




MBA를 통해 얻은 것 (1) 특별한 추억


MBA 경험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전 세계에서 온 친구들과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우정을 맺게 된 점이다. 대부분 스무 살 중반에서 서른 초반에 MBA를 하게 되니, 이 시간은 어찌 보면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시간이다. 


학벌 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좋은 학교는 들어가기가 힘든 만큼, 나는 학벌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어느 정도는 대변해 준다고 믿는다. 켈로그의 경우, MBA 지원자라면 한 번쯤 꿈꾸는 탑 스쿨 중 하나인데 어려운 경쟁을 뚫고 선발된 학생들이다 보니 소위 입학한 학생들의 물이 좋았다. 과거 일하던 직장, 졸업한 학부는 물론, 외모와 성격이 매력적인 친구들이 정말 많았다. 


영어가 모국어인, 혹은 모국어처럼 잘하는 친구들 속에서 나는 종종 작아지는 경험을 했고, 혼자 멍청이가 된 것 같은 자격지심에 자주 시달렸지만, 한편, 공부도, 운동도, 놀기도 잘하는 매력적인 친구들과 토론하고, 경쟁하고, 술 마시고, 여행했던 시간은 특별한 추억이 되었다. 덕분에 전 세계에 흩어진 글로벌 친구가 생겼고, 우물을 벗어나 넓은 세상을 보는 눈이 생겼다. 무엇보다 성인이 된 후, 다시 한번 학창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큰 축복이었다. 




MBA를 통해 얻은 것 (2) 위기모면 기술, 멀티태스킹 능력


고등학교 때 잠시 미국에서 학교에 다녔고, 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을 하기도 했지만, 수많은 분량의 페이퍼를 영어로 읽고 토론에 참여하는 일은 고역이었다. 특히 나는 학업 중에 채팅캣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수업을 준비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영어 아티클을 빠르게 읽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리딩 속도가 크게 늘었다. 또한, 초기에는 무작위로 발표를 시키는 교수님의 콜드 콜에 걸릴까 봐 스트레스가 극심했는데 이도 익숙해지다 보니,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위기를 모면하는 기술이 생겼다. 


돌이켜보면 MBA는 지식을 습득하는 시간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임기응변하는 능력과 멀티태스킹 능력을 고도로 훈련하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MBA를 통해 얻은 것 (3) 글로벌 브랜드, 글로벌 네트워크 


MBA 학업 중에 이미 스타트업을 운영 중이었던 나는 동기들이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대신 창업자 출신 교수님들의 수업을 들으며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으로 회사를 설명하는 법을 익혔다. 또한, 학교의 창업자 지원 프로그램의 힘으로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창업자 및 투자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것은 학교의 파워풀한 네트워크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번은 투자자들에게 회사를 소개하는 자리였는데 한 분이 내게 “역시 켈로그 출신은 다르네!”라는 말을 했다. 켈로그 타이틀은 창업자의 난관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지만, 종종 지름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미 돈을 잘 벌고 있는 회사거나 첫 창업이 아니라면 대표의 학벌 따위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 연고가 없는 내가 외국인 신분으로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의 투자를 이끌어낸 데에는 켈로그 브랜드의 힘이 컸다. 켈로그 브랜드가 없었더라면 첫 창업인 데다, 외국인 신분, 그리고 여자 대표인 내게 지갑을 열 투자자는 없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사업과 관련해 사람들을 만날 때, 켈로그 출신이라는 명함 하나로 더는 나를 증빙할 필요가 없어졌다. 탑 스쿨 브랜드의 힘이었다. 





MBA를 통해 얻은 것 (4) 사라진 자격지심


한참 지멧 시험을 준비하던 무렵, 한 저녁 모임에 초대받았다. 당시 내 파트너는 미시간 MBA 출신으로 모임 주선자와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 커플을 포함해 네 커플이 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 커플만 빼고 전부 다 하버드 MBA 출신이었다. 피자를 먹으며 유튜브를 틀어놓고 노는데  떠들썩한 그들의 유머에 나 혼자 반응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고, 나는 내내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보통 탑 스쿨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700점 대의 지멧 점수가 필요하고 하버드 입학생의 평균은 730점이다.  당시 나는 700점 대의 점수도 없어 스트레스받아가며 공부하던 중이었으니 하버드는 언감생심이자, 못 오를 나무였다. 내 파트너라도 하버드 출신이었다면 조금 달랐을까? 살면서 그날만큼 콤플렉스를 느꼈던 적은 없었다. 그날 엉망이 된 기분으로 저녁 모임을 빠져나오며 다짐했다. 반드시 탑 스쿨에 가리라고. 


그리고 이듬해 지멧에서 750점을 받아 켈로그에 입학했다. 


내게 간판이 부재했을 땐, 남들의 간판이 한없이 커 보여 간판 이면에 숨겨진 각각 사람의 진가를 볼 수가 없었다. 켈로그 합격 후,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내게 타이틀이 생긴 후 비로소 자격지심이 사라지고 간판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이를테면 가진 자의 여유가 생긴 셈이다. 




MBA를 통해 얻은 것 (5) 더는 핑계를 대지 않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나름 괜찮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미국에서는 먼 아시아에서 온 엉터리 영어를 쓰는 “노바디(nobody)"였다. 때문에 종종 나는 “외국인이니까, 영어는 내 모국어가 아니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며, 한국에서였다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여겼던 일도 뒤로 내빼거나 은근히 누군가가 나 대신 해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MBA 입학의 중요한 시험대인 인터뷰를 준비하며, 내가 동경했던 자신만만한 켈로그 선배들의 모습을 내 안에서 끄집어내는데 실패한다면 학교는 나를 합격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어가 모국어가 아니라고, 외국인이라고 핑계를 대는 나를 학교가 뽑아줄 이유가 전무했다. 이것은 순전히 마음에 생긴 변화였지만 꽤나 파워풀했다. 


동기부여 연설가 짐 론(Jim Rohn)은 “당신은 당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다섯 명의 평균이다 (You are the average of the five people you spend the most time with)”라는 말을 했다. 합격 후에도 나는 동기들, 선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동문이 되고자, “켈로그 학생답게” 행동하고자 애썼는데 그렇게 일 년을 보낸 후 졸업할 때가 되니 나는 어느덧 내가 동경하던 선배들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자신감이 행동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는 내가 먼 나라 한국에서 온 외국인임을 핑계 삼지 않게 되었다.  




MBA가 필요한가를 묻는다면...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공부하고, 학원에 다니고, 시험을 치르고, 에세이 컨설팅을 받아 가면서 쓴 돈과 시간, 그리고 MBA 중에 쓴 학비와 생활비, 그리고 기타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투자이다. 그리고 요즘처럼 빨리 변하는 세상에 1년, 2년 MBA를 다녀오면, 높은 포지션으로 영입은커녕 혼자만 업계에서 뒤처질지도 모른다. 인터넷에서 클릭 몇 번이면 석학들의 온라인 강의를 포함해, 어떤 정보든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에 사는 오늘 지식을 위해서라면 MBA에 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MBA가 해외 취업의 지름길, 혹은 유일한 길이고, 어떤 이에게는 자랑스러운 훈장이자 학벌 세탁의 기회이며,  어떤 이에게는 성인이 돼서 다시 누리는 다시없을 학창 시절의 사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기대하느냐에 따라 MBA는 내 인생을 바꾸는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고, 돈과 시간을 축내는 최악의 사치일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선택은 온전히 자기 것이어야 한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말하면, 지원 과정부터 졸업하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 자격지심에 시달렸지만, 나는 한 번도 이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다.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끔, 동기 부여해준 그  환경이 좋았고, 무엇보다, 이 시간만큼 치열하게 살았던 적이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치열하게 산 일 년이었다. 그러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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