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마야, 숙제 미리미리 좀 해!”
“엄마, 걱정하지 마! ‘내일의 내’가 할 거야.”
결국 숙제를 미루고 미루다 일요일 밤에야 겨우 붙잡는 딸. 못마땅했다. 미리 해두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을 텐데 싶었다. 사실 나도 엄마가 되기 전에는 늘 마감이 코앞에 닥쳐야 몸이 움직였다. 어떤 날은 내게 영감을 주는 ‘그분’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루 종일 편집실에 붙잡혀 있다가, 갓 나온 따끈따끈한 편집본을 붙들고, 밤새서 몇 시간 만에 더빙 원고를 썼다. 초치기 압박감에 괴로웠지만, 임박해야 단시간에 효율적으로 글을 잘 쓸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당시 내 명줄이 짧아지는,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는 맛을 즐기고 있단 느낌마저 들었다.
아이를 낳고 경력 단절을 겪으면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아이 키우면서 야근과 밤샘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자연히 내로라하는 프로그램보다는 단발성 특집이나 홍보물 같은 일들을 하게 되었다. 방송계는 알음알음 일이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소개받아 들어가다 보니, 내가 결혼했고, 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을 때가 많았다.
“아기 키우면서 그때까지 할 수 있겠어요?”
실무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순간 멈칫했다. 아이 키우면서 일하는 나를 배려해 주겠다는 건지, 아니면 워킹맘 작가라 마감을 못 지킬지 걱정된다는 건지 처음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질문을 반복해서 들을수록 답은 뻔했다. 후자였다.
“이제 아기도 아니고, 자기 앞가림 다 하는 아이예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애써 장황하게 설명하며 육아와 일은 별개라고 선을 그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그 무렵엔 대본을 먼저 쓰고 촬영이나 녹화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빨리 써야 제작도 빨라졌다. 그러다 보니 예전처럼 마감 직전 초치기로 원고를 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기한보다 짧게는 하루 전, 길게는 며칠 전에 대본을 다 썼다. 급하게 내던지듯 대본을 보내던 시절과 달리 충분한 시간을 두고 꼼꼼하게 탈고했다. 자연히 오탈자를 비롯한 오류나 실수가 거의 사라졌다.
프로그램 하나만 해서는 생활이 되지 않으니, 자연스레 두세 개 일을 병행했다. 어느 한쪽이라도 소홀해 보일까 봐 극도로 조심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주에 2개 프로그램 녹화 일정이 잡힌다면, 수월하게 쓸 수 있는 대본을 마감 일주일 전에 써놓곤 했다. 그래야 쫓기지 않고 다른 대본을 쓸 수 있었다. 다만 철칙이 있다. 대본을 일찍 써놨다고 바로 보내진 않는다. 반드시 녹화 전날이나 대본 검토일에 맞춰 보낸다. 생각보다 출연자 이름이나 소제목을 잘못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본을 보내기 전까지는 내 손에서 오탈자와 작은 실수를 최대한 걸러낸다.
일하는 틈틈이 아이의 아토피 치료, 치아 교정 진료 등 엄마로서의 일도 당연히 해야 한다. 주말에는 아이 교회 합창단과 주일 아침 예배 참석으로 더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이 평일에 일을 미리미리 해둬야 했다. 내게 ‘마감을 지키냐, 못 지키냐’는 작가로서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워킹맘이라는 이유로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작가로 보일까 늘 불안했다. 그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나는 ‘대본 잘 쓰는 작가’보다 ‘대본 미리 쓰는 작가’가 되기로 했다. 그렇게 해야 언제든 누군가에게 대체될 수 있는 방송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아이가 뭉그적뭉그적 하며 숙제를 미룬다. “빨리 좀 해!”하고 잔소리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찰나 멈추기로 한다. 워킹맘 방송 작가로 생존하기 위해 생겨난 ‘미리미리 병’을 구태여 아이에게 전가할 필요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