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째 초보 운전자가 아직도 운전할 수 있는 이유
눈길 운전에도 자신감 세포가 되살아난 이야기
모처럼 조리원 동기 모임에 나갈 생각에 들떠 있었던 그날 아침, H에게 카톡이 왔다.
"오늘 눈이 많이 온다는데 만날 수 있겠어?"
옆 단지에 사는 H를 내가 픽업하기로 했는데 나처럼 초보 운전자인 H가 눈이 제법 온다는 예보에 걱정됐나 보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카톡 하나에도 충분히 자신감 세포가 죽어 눈길 운전이 힘드니 걸어서 볼 수 있는 곳에서 보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내가 직접 운전해 친구를 픽업해서 모임에 참석하기로 한 날이 아니었던가... 나는 막중한(?!) 임무를 제대로 해내고 싶다는 호기로운 마음이 생겼다.
"괜찮아. 눈이 좀 오다가 그치겠지. 이 정도는 충분히 운전할 수 있어."
이렇게 답장을 보내고, H를 무사히 픽업해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동안 쌓였던 수다를 떠느라 3시간이 훅 지나가고 있을 무렵, 눈발이 세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내 차를 끌고 나온 게 아니었다면 설경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을 텐데 나중에 운전해서 갈 생각에 좀 무서운 세상으로 다가왔다. 그 와중에서 재택근무 중인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눈이 많이 오는 것 같은데 운전해서 올 수 있겠어?"
"집에 가는 길에 친구도 데려다줘야 하잖아. 좀 힘들어도 천천히 운전해서 가봐야지. 근데 최근에 교체한 타이어가 눈길에 덜 미끌리는 거지?"
"그냥 일반 타이어야. 브레이크 세게 밟지 말고 조심해서 와."
아뿔싸... 눈길에도 잘 미끄러지지 않는 타이어인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모임을 마치고 무거운 마음으로 지하 주차장에서 나오니 그새 소복이 쌓인 눈으로 차선, 중앙선이 보이지 않았다. 차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도 아니고 제설 작업을 한 것도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았다.
천천히 달리긴 했지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신호 대기로 조심스레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바로 옆 차선에서 정지할 때 차가 밀려서 접촉 사고가 나는 일을 목격했다. 후들후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내 모습에 친구도 내비게이션을 같이 봐주면서 마음을 졸였다. 그렇게 겨우 집 근처 아는 길이 나오고 조금 숨통이 트이자 H가 말했다.
"나는 오늘 눈이 많이 온다길래 다음에 보자고 너한테 아침에 카톡을 보냈던 거야."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카톡 보낸 줄 알았어."
"눈 오는 날 운전하면 아까처럼 사고 날 수도 있고, 겁 나잖아."
"나도 운전한 지 6년 됐는데도 두렵고 힘들어. 그래도 출근할 때 운전해서 상암 나가면서 운전이 좀 편해진 것 같아."
"어떻게 집 근처도 아니고 상암까지 운전해서 나갈 수 있는 거야?"
"처음에 집에 돌아올 때 내비게이션도 잘못 보고 엄청 헤맸거든. 그냥 직진만 하다가 집에 못 가고 신랑한테 울면서 전화하고 차를 버리고 갈 생각도 했지. 근데 정신없이 운전하느라 전화할 새도 없고 어떻게든 내 차를 집까지 무사히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더라. 그래서 20분이면 집에 돌아갈 거리를 50분 걸려서 우여곡절 끝에 집에 가긴 했어."
"그런 일 겪으면 멀리 운전 못할 것 같은데..."
"그 일을 겪고 나서 오히려 운전하는 게 쉬워졌어. 여전히 길을 헤맬 수도 있지만 차를 버리고 가고 싶을 만큼 막막했던 그때보다 덜 힘드니까. 겁이 덜컹 났던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면 지금 힘든 건 그렇게 힘든 게 아니더라고."
상암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헤맸던 그 순간처럼 그날도 눈길에 길을 헤맸다. 10분이면 갈 거리를 아주 천천히 달려 겨우겨우 30분 만에 친구를 집 앞까지 내려주고, 나도 집으로 무사 귀환했다. 아마도 내 차를 운전해서 갈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니고 나뿐이라는 현실 자각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
집에 오자마자 H에게 문자가 왔다.
"오늘 눈길에 운전한다고 고생했어."
"눈길에도 운전해봤으니까 다음에 운전하는 게 더 쉬워지겠지."
"멋져!"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멋지다는 문자에 좀 전에 눈길 운전에 죽었던 자신감 세포가 다시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