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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 굽는 타자기 Dec 16. 2022

6년째 초보 운전자가 아직도 운전할 수 있는 이유

눈길 운전에도 자신감 세포가 되살아난 이야기

모처럼 조리원 동기 모임에 나갈 생각에 들떠 있었던 그날 아침, H에게 카톡이 왔다.


"오늘 눈이 많이 온다는데 만날 수 있겠어?"


옆 단지에 사는 H를 내가 픽업하기로 했는데 나처럼 초보 운전자인 H가  눈이 제법 온다는 예보에 걱정됐나 보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카톡 하나에도 충분히 자신감 세포가 죽어 눈길 운전이 힘드니 걸어서 볼 수 있는 곳에서 보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내가 직접 운전해 친구를 픽업해서 모임에 참석하기로 한 날이 아니었던가... 나는 막중한(?!) 임를 제대로 해내고 싶다는 호기로운 마음이 생겼다.


"괜찮아. 눈이 좀 오다가 그치겠지. 이 정도는 충분히 운전할 수 있어."


이렇게 답장을 보내고, H를 무사히 픽업해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동안 쌓였던 수다를 떠느라 3시간이  훅 지나가고 있을 무렵, 눈발이 세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내 차를 끌고 나온 게 아니었다면 설경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을 텐데 나중에 운전해서 갈 생각에 좀 무서운 세상으로 다가왔다. 그 와중에서 재택근무 중인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눈이 많이 오는 것 같은데 운전해서 올 수 있겠어?"

"집에 가는 길에 친구도 데려다줘야 하잖아. 좀 힘들어도 천천히 운전해서 가봐야지. 근데 최근에 교체한 타이어가 눈길에 덜 미끌리는 거?"

"그냥 일반 타이어야. 브레이크 세게 밟지 말고 조심해서 와."


아뿔싸... 눈길에도 잘 미끄러지지 않는 타이어인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모임 마치고 무거운 마음으로 지하 주차장에서 나오니 그새 소복이 쌓인 눈으로 차선, 중앙선이 보이지 않았다. 차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도 아니고 제설 작업을 한 것도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았다.

 

천천히 달리긴 했지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신호 대기로 조심스레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바로 옆 차선에서 정지할 때 차가 밀려서 접촉 사고가 나는 일 목격했다. 후들후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내 모습에 친구도 내비게이션을 같이 봐주면서 마음을 졸였다. 그렇게 겨우 근처 아는 길이 나오고 조금 숨통이 트이자 H가 말했다.


"나는 오늘 눈이 많이 온다길래 다음에 보자고 너한테 아침에 카톡을 보냈던 거야."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카톡 보낸 줄 알았어."

"눈 오는 날 운전하면 아까처럼 사고 날 수도 있고, 겁 나잖아."

"나도 운전한 지 6년 됐는데도 두렵고 힘들어. 그래도 출근할 때 운전해서 상암 나가면서 운전이 좀 편해진 것 같아."

"어떻게 집 근처도 아니고 상암까지 운전해서 나갈 수 있는 거야?"

"처음에 집에 돌아올 때 내비게이션도 잘못 보고 엄청 헤맸거든. 그냥 직진만 하다가 집에 못 가고 신랑한테 울면서 전화하고 차를 버리고 갈 생각도 했지. 근데 정신없이 운전하느라 전화할 새도 없고 어떻게든 내 차를 집까지 무사히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더라. 그래서 20분이면 집에 돌아갈 거리를 50분 걸려서 우여곡절 끝에 집에 가긴 했어."

"그런 일 겪으면 멀리 운전 못할 것 같은데..."

"그 일을 겪고 나서 오히려 운전하는 게 쉬워졌어. 여전히 길을 헤맬 수도 있지만 차를 버리고 가고 싶을 만큼 막막했던 그때보다 덜 힘드니까. 겁이 덜컹 났던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면 지금 힘든 건 그렇게 힘든 게 아니더라고."


상암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헤맸던 그 순간처럼 그날도 눈길에 길을 헤맸다. 10분이면 갈 거리를 아주 천천히 달려 겨우겨우 30분 만에 친구를 집 앞까지 내려주고, 나도 집으로 무사 귀환했다. 마도 내 차를 운전해서 갈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니고 나뿐이라는 현실 자각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


집에 오자마자 H에게 문자가 왔다.

"오늘 눈길에 운전한다고 고생했어."

"눈길에도 운전해봤으니까 다음에 운전하는 게 더 쉬워지겠지."

"멋져!"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멋지다는 문자에 좀 전에 눈길 운전에 죽었던 자신감 세포가 다시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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