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 교회 내 심리상담을 받게 되었다. 당시 상담 멘토님이 내게 일기 쓰기를 권유하셨다. 그전에 20년 차 일기 쓰기의 장인, 김애리 작가님의 <어른의 일기>라는 책을 읽으면서 일기 쓰기에 이미 매료되었기에 난 하겠다고 했다. 멘토님은 일기와 같이 하나님께 편지를 쓰고 있다며 내게도 편지 쓰기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내친김에 그것 역시 해보겠다고 했다. 그러자 멘토님은 진지하게 말을 덧붙였다.
“자매가 편지를 쓰면 주님께서 분명히 답을 주실 거예요.”
“저는 선생님만큼의 영성이 되지 않은데 어떻게 주님의 응답을 들을 수 있나요? 설사 그분께서 답장을 주시더라도 제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반드시 대답하십니다.”
그날 상담을 끝낸 후, 반신반의하면서 교회 서점으로 향했다. 마치 표적을 보여 주듯이 내 눈앞에 떡하니 <딸아, 너는 나의 보석이란다>라는 책을 발견했다. 세상의 모든 딸에게 보내시는 하나님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책이었다.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하루에 한 페이지씩 이 책 내용을 바탕으로 받아 적으면 되겠다 싶었다. 책도 샀고, 색색깔 일기장도 여러 권 샀다. 일기 쓰기의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름없었다. 이제 일기만 쓰면 됐다.
일기 쓰기를 시작하면서 자기 전에 책상에 앉아 하루일과도 돌아보고 성경을 읽으면서 말씀도 묵상하게 되었다. 일과 사람 관계로 힘들고 지친 날이면 일기장을 빼곡히 채우며 나의 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평소에는 하나님께 편지를 쓸 때 감사가 넘쳤지만, 고된 날엔 감사하기보다는 주님께 속히 해결해 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했다. 그때 그분께서는 어떤 순간에도 함께 하시겠다는 답을 주셨다.
일기 쓰기 전에는 퇴근한 남편을 붙들고 나의 괴로운 얘기를 풀어놓았다. 남편도 피곤해서 그런 건데 귀 기울여 듣지 않은 모습에 실망했다. 때론 그게 화근이 되어 남편과 다투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이나 친구들에게 털어놓지 못하더라도 일기에 쏟아내면 되니까 괜찮아졌다. 마음의 안식처가 생겨서 그저 좋았다.
나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남편이나 다른 사람한테 자꾸 인정받으려고 하니까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좌절했다. 상담 멘토님은 그런 내게 일기를 쓸 때 자신에게 “괜찮아! 잘했어! 사랑해!” 이렇게 얘기해 주라는 해결책을 주셨다. 난 좋다는 건 웬만하면 다 해보는 사람인지라 바로 행동에 옮겼다. 일기 끝에 꼭 이 세 마디를 의무적으로 썼다. 처음에는 낯간지러웠지만 계속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바라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인정해 주면 되겠단 걸 새삼 깨달았다. 남들이 툭툭 던진 말 한마디에 잠 못 이루고, 내가 한 작은 실수에 이불 킥을 날리며 고달팠던 내 인생이 달라졌다. 속상한 일, 쪽팔리는 일이 있다면 모조리 일기장에 담아내면 그뿐이었다. 그렇게 일기 쓰기는 다른 사람이 내 정체성을 흔들 때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고백하자면 하나님께 이렇게까지 편지를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감사는커녕 불평불만만 털어놓을 때도 많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설령 내 아이가 뭔가 잘못하든, 무언가 부족하든 내가 언제나 그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분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생긴 나를 품어주실 거란 믿음이 생겼다. 누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뒤돌아서면 수치심을 느꼈던 날들은 지나갔다. 그 어떤 얘기를 쓴들 자존감이 떨어지다 못해 바닥을 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어떤 모습도 그분께서 사랑하신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오히려 올라갔다. 이렇게 매일 일기 쓰기에 만족하고, 주변에 일기 쓰기의 유익을 전파할 지경에 이르렀을 무렵, 멘토님은 내게 말했다.
“자매는 매일 뭔가를 해야 하는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일기도 매일 쓰기 힘들다면 퐁당퐁당 써도 돼요. must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일기 쓰기가 너무 좋긴 했지만, 새벽까지 일하는 날에도 일기를 기어코 썼다. 매일 숙제처럼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혼나기라도 했던 것처럼 매달렸다. 아니, 그래야 살 것 같았다. 멘토님 말씀대로 일부러 하루 건너뛰었다. 신기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날은 한두 줄 적기도 했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괜찮았다. 언제든 쓸 수 있고, 언제든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자유로움이었다.
매일매일 일기를 써야지만 내 일상을 돌아보고, 살피고, 성장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굳이 일기를 쓰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에게 “괜찮아! 잘했어! 사랑해!”라는 말을 해줄 수 있다. 강박이 아니라 자유로움에서 쓰는 일기는 자기 전 수면 의식처럼 편안하기에 그지없다. 그래서 오늘 일기를 쓸 거냐고?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