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라는 이름 아래_프롤로그

아빠가 되어가는 나

by 박상민

아빠라는 이름 아래_ 프롤로그


아빠다.

지글지글 끓는 싯누런 전기장판. 우리는 낡고 폭신한 이불을 얹어 그 속에 들어갔다. 엄마, 상범이, 그리고 나. 늘 그렇듯 엄마는 8시 반이면 연속극을 틀었다. 우리는 늘 똑같은 장면에서 다 같이 깔깔 거리며 웃어댔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시어머니를 향해 시원하게 욕도 하신다. 그렇게 삼십 분이 훌쩍 지나간다. 곧이어 시작 음악까지도 재미없는 뉴스가 시작되고, 한참을 지루하게 멍 때리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아빠다.’

아빠는 늘 노크를 하셨다. 그리고 언제나 문 건너편에서 부드럽고 반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다~.” 나는 그 음성이 좋았다.


그래서 아빠가 “아빠다~아” 하고 말하면 안에서도 “아빠다~아” 하면서 따라 했다.


그러면 동생도 따라 했다.


“아빠다~아아”


언제나 엄마는 “문 열어드려야지 뭐해!” 하며 소리를 지르신다.


그렇게 문을 열어 드리면 기다리던 아빠가 서 계셨다.


아빠가.



겨울이면 아빠는 종종 검정 비닐봉지와 같이 등장하셨다. 그 검정 비닐봉지에는 노란 귤, 따끈한 붕어빵, 고소한 군고구마들이 그득하게 들어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넉넉하게 사 오셨다. 그래서 아빠를 기다리면 어김없이 우리를 배부르게 해 주셨다. 한 번은 계란빵을 사 오셨다. 노릇노릇 계란빵을 7개까지 먹으니 속에서 계란 비린내가 올라왔다. 그래도 시원한 보리차와 함께 욱여넣었다. 그럼 배가 두둑해진다. 두둑하게 오른 그 배가 아직도 안 꺼진다.

이십 대. 가슴까지 시려지는 겨울날. 급작스레 만나자던 여자 친구. 싸늘하게 돌변한 그녀가 내게 말했다. “너랑 이제 헤어지고 싶어.” 충격적인 그 말에 발을 묶었다. 정말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한마디 더했다. “너한테 지쳐...” 그 말은 내 입술까지 묶어버렸다. 얼얼한 바람은 송곳이 되어 내 얼굴을 사정없이 찔렀다. 그녀가 눈앞에 사라지고 한참 뒤에도 그 자리에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계란빵 냄새가 났다. 그래서일까? 그때 아빠가 생각났다.

집에 가고 싶었다. 대전에서 수원은 길었다. 아니 멀었다. 마음이 지치니, 몸이 지치고, 기차도 치쳤는지 느리게 갔다. 힘겹게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차가운 집에 아빠만 계셨다. 어느덧 아빠는 아버지가 되셨다. 이제는 “아빠다~아” 하시고 들어오시지도, 검은 비닐봉지와 함께 오시지도 않는 아버지가 되셨다. 철봉에서 빙빙 돌던 힘센 아빠는, 눈을 찡그리시며 신문을 보시는 흰머리의 아버지가 되셨다. 힘없이 터덜터덜 들어오는 나에게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무슨 일 있냐?” 나는 귀찮은척 “아니요.” 대답했다. “밥은 먹었냐?” 나는 침묵했다. 그러시더니 “저녁 먹으러 가자” 하시더니, 아버지는 국밥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바보같이. 국밥을 먹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아버지는 묻지 않으셨다. 그리고 말없이 뜨거운 국밥을 입에 쳐 넣었다. 아버지는 한마디만 하셨다. “천천히 먹어라.”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집까지 오는 길은 춥지만 따뜻했다. 옆에 계신 아버지가 오랜만에 아빠가 되어 주셨다. 아빠는 집에 가는 길까지 아무 말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시고 말씀하셨다. “추우니까 이불 잘 덥고 자라.” 그 말을 듣고 방에 들어갔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리고 콧물도 나는데 팔로 얼굴을 덮었다. 미치도록 아빠가 고마웠다. 그리고 혹시라도 아빠가 걱정하실까 봐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아빠가 걱정하실까 봐. 아빠가.

아내가 임신을 했다. 임신 초기 초음파실. 분위기가 어색한지 간호사는 낯선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애기 아빠는 반응이 별로 없으시네요,” 타인이 나에게 부른 단어, 그 단어가 내게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아빠.”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아직 너무 부족하다. 그리고 내게 그만한 자신이 없다. “아빠.” 그런데 나를 불러줬다. 그래서일까. 태아의 심장소리를 들려주며, 움직이는 영상을 보여주는데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순간 아내에게 미안했고, 아내의 뱃속 아이에게도 미안해졌다. 신기함과 기쁨을 표현하기에는 거대하게 다가오는 아빠라는 단어 앞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가득했다.

5개월이 지난 지금. 아내의 배가 부른 만큼 나의 기도와 마음도 커지고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 다른 사람들처럼, 태아 사진을 올리거나 하는 게 나에겐 낯설다. 아니 부족하다는 게 맞다. 아빠라는 이름 앞에서 만들어지는 겸손함이 몰려온다. 태명을 미루다 미루다 힘겹게 졌다. “하늘” 어릴 적부터 경험했던, 아빠의 마음이 담긴 단어이다. 아빠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 하 늘. 하늘이에게 그런 아빠가 되고 싶다. 때로는 검은 비닐봉지로, 때로는 국밥으로, 그리고 오랜 기다림으로 나를 만들어주셨던 그런 하늘을 닮은 아빠가 되고 싶다. 그래서 하늘이에게 나도 언젠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문 앞에 노크를 하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아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