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p발 씨야?
우리 엄마는 대부분의 주부들이 그렇듯 '연속극' 마니아다. 그것도, 방송 3사에서 빼놓지 않고 해 주는 일일연속극 말이다. 옆에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면 흥분하며 줄거리를 설명해 주는 엄마 덕분에 나 역시 <친절한 선주 씨>, <결혼하자 맹꽁아>, <신데렐라 게임> 같은 일일드라마의 줄거리를 줄줄 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엄마(를 비롯한 우리)는 왜 일일드라마를 볼까? 주인공이 다음에 할 대사, 행동, 심지어는 결말까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데도, 왜 일일드라마는 방영만 했다 하면 시청률 두 자릿수는 무난하게 달성하는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 '예상 가능함'에 있다.
일일드라마에서는 무조건 나쁜 짓을 한 놈이 벌을 받는다. 무조건이다. 초반부 악역의 극악무도한 나쁜 짓에 주인공이 순진하게 당하는 걸 보며 고통받으면서도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것은,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벌을 받게 된다는 우리 안의 믿음이다. 아주 예전부터 믿어 온 보편적인 가치, '권선징악'을 견고히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데블스 플랜: 데스룸>(이하 데블스 플랜)은 실패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프로그램의 흥행과 화제성만 보면 성공한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적어도 시청자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 주는 데에는 실패했다.
재미는 있었다. 시즌 1과 비교해 봤을 때도 확실히 발전했다. 특히 시즌 1 때 궤도의 공리주의식 '탈락 없는 서바이벌'을 탈피하기 위해 무조건 탈락자를 발생시키는 구성은, 제작자에게도 시청자에게도 편안했다. 더군다나 희대의 명장면, '너 산수 할 줄 알아?'를 탄생시키며 데블스 플랜을 보지 않은 사람도, 전후 맥락을 모르는 사람도 이 대사는 알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토록 재미있고 화제성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정종연을 '감다뒤', 윤소희를 '남미새'로 불리게 했으며, 정현규를 사과하게 했을까? 정리하면 이렇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권선징악을 선호하며, 약자는 선하고 강자는 악하다는 인식의 오류(언더도그마)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청자들은 프로그램 초반부터 권세를 얻어 강자의 역할이었던 정현규, 윤소희, 규현 연합이 탈락 위기를 겪고 와해된 후, 새로운 구도가 형성되며 전개되는 것을 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했는가. 한번 권력(피스)을 얻고 생활동에 진입한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끝까지 생활동에서 지냈다. 부가 부를 부르는 자본주의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아 불쾌하고 찝찝하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게임이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게 하기 위해, 제작진들이 미리 구성 단계에서 신경 써야 했다. 예를 들어 <더 지니어스> 때처럼 데스 매치에 가는 인원들이 생활동 중 한 명을 지목하게 해 판을 흔들 가능성을 주거나, 메인 매치에서 큰 지각 변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더 많은 피스를 걸어야 했다.
시청자들의 좋지 않은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인가? 그렇다면 제작진들은 반성해야 한다. 타깃 시청자들의 반응 하나 예상하지 못하는 것은 제작자로서의 자질 부족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불쾌한 단면을 보여 주기 위해 의도한 것이었나? 그렇다면 정현규를 그토록 '악마'로 숭배하면 안 됐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를 미화하는 꼴이라니, 제작자들이 생각하는 좋은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 심히 궁금하다.
또 한 가지의 의문점은, '왜 플레이어들조차 정현규가 우승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인가'다. 제작자의 입장은 어느 정도 이해 간다. 방송 잘 알고, 비주얼 되고, 다른 프로그램에서 화제성도 얻은 정현규가 우승하는 게 여러모로 프로그램에 이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은 왜 그렇게 행동했던 것인가?
서바이벌을 보는 시청자들(특히, 과몰입 시청자들)은 당연히 플레이어들의 목표가 우승일 것이라고 짐작하며 본다. 플레이어들이 우승에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 프로그램의 몰입도가 깨지며 프로그램 전반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다. '프로그램의 진실성'은 프로그램이 설득력을 갖고 흥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데, 이것이 파괴돼 버리면 시청자들은 어딘가 찝찝한 기분으로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현준의 배신과 연합 과정은 시청자들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서바이벌에 나온 플레이어들은 응당 우승을 위해 행동할 것이라고 믿는다. 더군다나, 데블스 플랜은 우승을 위해서라면 폭력과 절도를 제외한 모든 행위가 허용됨을 전제로 한 프로그램이었다. 최현준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우승이었다면, 우승이 그만큼 간절했나 보다 싶다. 그의 행동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규현과 윤소희는 무엇인가? 우선 규현은 여기서 얻어 갈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이미지라는 생각, 나는 스마트하지만 친절하고 의리 있어 때로는 내 팀을 위해 나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그 이미지만을 얻어 갈 생각을 하면 안 됐다. 차라리 배신하더라도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훨씬 좋은 반응을 얻었을 것이다.
윤소희 역시 말로는 우승에 진심이었다고 했지만 우승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초반부터 현규와 연합을 견고히 해 오며 다른 모든 플레이어들이 실질적인 머리는 소희라고 말할 때에도,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은 현규를 우승하게 하기 위한 초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그녀가 준결승에 올라갔으니, 시청자들의 불만이 이해 갈 수밖에 없다. 한 번이라도 승리를 위한 야망을 보이고 새로운 방법을 꾀했다면 판도와 여론은 바뀌었을 것이다. 그리고 똑똑한 여자가 킹메이커를 자처하는 모습, 시청자들은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정현규는 프로그램에서 본인을 '악마'라고 칭한다. 그러나 정현규는 악마가 아니다(스스로를 악마라고 칭하는 사람 중 진짜 악마를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진짜 악마는 제작자들이다. MBTI P의 악마가 대충 짠 플랜(오해 말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P이다)에 플레이어들이 걸려들어 모든 것이 어영부영되고 말았다. 최현준의 말을 인용하자면, "우승자에게는 기꺼이 박수 쳐 줄 거라며. 그런데 박수 쳐 주는 사람 있어? 아무도 없어." 정말로 아무도 박수 쳐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승 상금을 모조리 기부했음에도 말이다. 현규는 끝내 엎드려 울음을 보이고, 사죄할 뿐이다.
그럼에도 데블스 플랜은 계속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잘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시즌 3의 우승자가 또다시 시청자들에게 삼배구고두를 하는 모습을 원치 않는다면, 제작진들이 먼저 사죄해야 한다. 더 촘촘한 구성과 연출로서 말이다. 데블스 플랜, 시즌 3는 P의 플랜이 아닌 J의 플랜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