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 물고기를 이해하는 방법
16년째 살아온 그에 대한 이해는 결국
눈앞에 파란 가을하늘과 눈부신 제주 함덕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제주에서 지냈던 3년의 시간 중 마지막 해, 코로나를 핑계로 시댁에 가지 않았던 추석연휴였다. 10월 초정도 되었지만 아직 바닷물은 많이 차갑지 않았다. 모처럼 남편이 오래 머무르는 연휴인 만큼 가족들과 함께 해변에 텐트를 치고 물놀이를 했다. 아빠 등을 타고 올라 물속 레슬링을 하고, 작은 바위 위에 올라가 연신 다이빙을 해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온 바다에 가득한 것 같았다. 에메랄드 빛의 함덕바다가 그날도 여전히 매혹적인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바다였다.
신나게 물놀이를 마치고 텐트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의자에 앉아 잠시 한숨을 돌렸다. 햇빛 때문에 후덥지근해진 텐트 안을 피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순간적으로 나른함과 피곤함이 함께 몰려왔다. 방금 헹궈 널어둔 수영복 다섯 개가 물을 뚝뚝 흘리며 빨랫줄에 걸려 있었다. 눈앞에 바다도, 더없이 파란 하늘도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삶의 피로는 그 나름대로 엉덩이쯤에 진득하니 붙어 여전히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제주 살이는 너무나 낭만적이었지만 사실 또 너무도 현실적이었다. 오름, 들, 바다,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번 감탄하면서도 또 거의 매일 삶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야 했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중요한 시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도 되는 걸까? 내 욕심으로 아이들 인생에 구멍을 내고 있는 건 아닐까? 내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혼자 있는 시간이면 같은 고민이 반복되었다. 남편은 곧 사업을 접고 제주로 내려오겠다고 말했지만 그 약속은 언제 지켜질지 모르는 구름 같은 것임을 서로가 알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차린 사업터를 물려받은 남편은 부모님이 그 사업터를 세우기까지 했던 고생을 모두 알고 있었다. 남편은 착한 남자였다. 언제나 나쁜 남자가 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와 아이들에게 착한 그에게 고마웠지만 항상 착하기만 한 그는 많은 순간 날고 싶은 내 발목을 붙잡곤 했다. 이번에도 그는 부모의 곁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늘 아래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금세 잠이 스르륵 들었다. 다리에 해가 비치기 시작하자 뜨거워서 잠에서 깨었다. 오른쪽 발이 빨개졌다. 나중에 쓰라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옆에 같이 누운 남편의 다리도 곧 햇빛에 드러날 것 같았다. 남편을 깨워 그늘로 자리를 옮기게 했다.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아 웹서핑을 했다. 이것저것 둘러보다 평소에도 잘 둘러보는 농가주택 매물을 검색했다. 제주는 역시나 너무 비쌌다. 금방 허물어질 것 같은 농가주택들도 억대가 넘어간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전라남도 농가주택을 찾아보았다. 역시 저렴했다. 방금 본 무너질 것 같은 농가주택보다 멀쩡하고 넓은 구옥이 3000만 원 남짓밖에 하지 않았다. 평소에 자주 보는 블로그에 들어갔다. 농가주택 매물을 주로 올리는 부동산 블로그였다. 오! 작년에 보고 혹했던 매물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작년보다 가격이 더 내려갔다. 사진 속 집은 오래되긴 했지만 깔끔하고 넓었다. 남편 회사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부동산 블로그 글을 다시 찬찬히 읽어 보았다. 방이 네 칸에 대지가 300평이었다. 이런 집이 불과 6000만 원이었다. 남편 회사와도 가까웠고 찾아보니 주변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작은 대학교까지 있었다. 혹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보여주니 다들 좋아했다. 잠시 고민을 하고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내일 집 좀 볼 수 있을까요? 제주도에서 갈 거예요."
"아. 내일은 제가 시간이 안되는데... 제주도에서 오신다고 하니 제가 그 동네 부동산 사장님께 말씀드려 놓을게요."
마침 연휴라 남편이 내려와 있으니 아이들을 맡기고 다녀올 수 있었다. 그 밤 당장 비행기 티켓을 끊고, 다음날 집을 보러 광주공항에 도착했다. 예약해 둔 렌터카를 타고 집을 보러 가는 길에 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광주에서 내려오는 길, 영암에 들어서자 월출산이 보였다. 마치 중국에서나 볼 것 같은 삐죽삐죽한 돌산에 흰 구름이 골짜기마다 내려앉아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맙소사. 여기가 영암이군.'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결혼을 하며 연고 하나 없는 목포에 발을 딛고 10년을 살았었다. 영암은 목포 바로 옆에 붙어있는 지역이다. 내가 지금 10년을 살았지만 정을 붙이지 못했던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퍼뜩 내 두뇌를 때렸다. 3년 전까지 느꼈던, 항상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것 같은 그 기분이 다시 살아났다.
'결국 다시 돌아오는 건가.' 운전을 하던 나는 갑자기 매우 심란해졌다.
보러 간 집은 사진에서 본 것보다 더 깔끔하고 좋아 보였다. 입구가 넓지 않아서 마당이 길가에 오픈되지 않아서 좋았다. 커다란 창고 건물도 두 채나 되었다. 집을 들어서면 집 한가운데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는 나무 마루가 있고 그 마루를 따라 부엌과 방 4개가 나란히 있었다. 80년대에 리모델링했을 법한 창살이 살아있는 나무 문과, 멋을 낸 베니다 벽이 정겨웠다. 문틀을 따라 둘러진 옥색 몰딩도 귀여웠다. 조금만 손을 보면 마음에 드는 집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집이 예전에는 이 마을에서 제일 부잣집이었당게. 자식들이 다 잘돼서 좋은 직업 가지고 살아. 할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블고 할머니는 치매로 요양원 가블고. 그래서 집이 비었는디, 근처사는 아들이 월매나 관리를 잘 했는가 아주 깨끗하당게. 관리하기 힘들어서 매매로 내 논 거요. 작년에 내놨다가 아까워서 취소했는디 다시 내 놨지라."
함께 간 부동산 사장님이 설명을 했다. 마당 구석구석을 돌아봐도 낙엽하나 없고, 오래 비어 있었을 집 벽에 곰팡이 하나 없었다. 얼마나 깔끔하게 관리를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사해요. 제가 며칠만 더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워낙 급매라 곰방 나갈 테니 생각 있으면 언능 연락 주쇼이."
부동산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렌터카에 올라타 집구석구석을 찍은 사진을 다시 한번 넘겨 보았다. 집은 마음에 들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심란했다.
'다시 돌아오는 건가.' 혼잣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네비를 켜고 신안군 자은도를 목적지로 맞추었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자은도는 신안군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섬이다. 원래는 배를 타야 갈 수 있었지만 몇 년 전 천사대교가 놓이면서 차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남편 회사에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이면 좀 힘들겠지만 출퇴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은도면 제주랑 같은 섬이니까. 바다가 있을 테니까. 해변도 있을 거고. 그럼 돌아오더라도 마음이 덜 심란하지 않을까.'
얄팍한 꾀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 얄팍함에라고 기대를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온 가족이 함께 사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주말부부가 그렇게 나쁠까.' 차를 달리는 내내 머릿속엔 혼잣말이 가득했다. 답변을 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자은도에 도착하자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깔끔해 보이는 숙소에 들어가 방을 잡고, 편의점에서 김밥 한 줄과 물 한병, 소주 한 병과 안주거리를 사서 숙소에 들어갔다.
방에 앉아서 오는 길에 들렸던 해변을 떠올렸다. 해변에서 본 바닷물은 흐렸다. 서해는 뻘이 많아서 원래 물이 탁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직접 와서 보니 더 실망스러웠다. 서쪽 끝이라 좀 맑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예상과 달리 와르르 무너졌다.
제주 살이의 8할은 수영이었다. 물에 뜰 줄도 모르던 맥주병이 제주살이 3년 만에 거침없이 깊은 바다에 뛰어드는 물개가 되었다. 제주를 떠난다는 것은 바다 수영을 못한다는 뜻이었다. '맑은 바다에서 수영만 할 수 있어도, 어떻게 여기서 다시 잘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는 왜 바닷물도 이리 탁할까. 내 남편은 왜 동해도 아닌 서해에 자리를 잡은 걸까. 여기서 왜 저렇게 버티고만 있는 걸까. 나는 왜 제주가 좋을까. 나는 왜 여기가 이렇게 힘든 걸까.'
방에 컵이 없어서 병째로 소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밤 새 혼자 뱉은 말들이 허공을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다음날 일어나 다른 해변으로 가 보았다. 무한의 다리라 이름 붙여진 나무다리가 바다 위로 놓여 있었다. 다리를 통해 앞에 보이는 작은 섬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족히 1킬로미터는 넘을 길이였다. 목다리를 따라 건너편 섬까지 가보았다. 비는 그쳤지만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바닷물도 여전히 탁했다. 여기서는 수영을 해도 아무것도 안보이겠다고 생각했다. 다리를 다시 되돌아가다가 중간쯤에 멈춰 섰다. 관광객이 많았다. 사진 찍기 바쁜 사람들의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다리 위에서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뻘이 잔뜩 풀어진 서해 바닷물이 내 마음속 같았다. '저 속에도 고기들이 살겠지. 많이 잘 살겠지. 뻘밭에서 살아서, 한 치 앞도 안 보이니 더 열심히 살아서, 그래서 맛이 더 좋은가.' 엉뚱한 생각에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몇 걸음 더 걷고는 또다시 멈추어 섰다.
이 뻘물 같은 맘속에서 혼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남편이 눈앞에 그려졌다. 부모를 택하자니 아내가 힘들고, 아내를 택하자니 부모가 힘들고. 어느 하나 붙잡지도 놓지도 못하는 그의 심정이 저 뻘물 속 같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그의 심정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다만 뻘물 같은 그의 고민 안에 함께 들어가고 싶지 않았었다. '나는 선택했으니 이제 너는 너의 선택을 해라.' 하곤 뒤로 한 발짝 물러나 그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알았다. 답은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 다리 위에서 결국 나는 그동안 해온 혼잣말에 혼자 답변을 했다.
'그래. 간다. 내가 간다. 내가 져 준다. 너를 사랑하니까. 사랑해서 내가 져 준다. 그 뻘물 속에 기어이 같이 들어간다.'
발 밑의 뻘물 속으로 눈물이 뚝뚝 흘러 떨어졌다. 사방에선 기념사진을 찍느라 바쁘고 나는 고개를 숙여 눈물을 감추느라 바빴다.
차로 돌아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 괜찮은 거 같은데 계약하자."
"진짜? 진짜 계약할 거야? 괜찮겠어?"
남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부동산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제가 계약할게요. 500만 원만 깎아주시면 바로 입금할게요."
바로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 와중에 살뜰하게 500만 원을 깎았다. 몇 분 후에 계좌번호를 적은 문자가 도착했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비가 다시 부슬부슬 내렸다. 하늘이 온통 다 구름뿐인 것만 같았다. 비행기가 떠올랐다. 무거운 결정을 싣고 가는 것 치고는 가벼운 이륙이었다. 얼마 안돼 비행기는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비행기를 타고 창 밖을 구경하기를 좋아하지만 그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실망스럽다고 생각하며 잠깐 눈을 붙이려는데 별안간 비행기가 구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거기 그대로 있었다. 떠나오기 전 보았던 눈부신 파란 하늘이. 나는 슬며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