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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나 Mar 13. 2024

알 유 오케이?

미국인 데이브 윌슨에 관한 이야기

 데이브 윌슨이라는 이가 있었다. 

 데이브의 키는 190센티쯤 되었을까?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에도 주름이 제법 있어서 그가 중년의 나이임을 모두 짐작은 했으나 아무도 그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는 도수가 매우 높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덕에 눈이 아주 작아 보였지만, 그 작은 눈은 늘 웃고 있었다. 언제나 간단한 셔츠에 벨트를 채우는 바지를 입고 다녔다. 반바지나 티셔츠를 입은 적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팔다리 큰 키에 걸맞게 길고 단단했다. 하지만 그는 전형적인 미국 아저씨들처럼 배에 항상 맥주창고를 달고 다녔다(스스로 늘 그렇게 말했다. 여긴 맥주가 가득 들어있다고).

 2006년, 나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로델 연구소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대학에서 지원하는 해외탐방 프로그램에 내가 속한 팀이 선정된 덕분이었다. 데이브는 우리를 처음 만나자마자 가장 먼저 농기계 창고를 구경시켜 주었다. 거기엔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트랙터와 농기계들이 있었다. 당연히 우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한국을 뭘로 보고 우리에게 트랙터를 구경시켜 주는 걸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여름 내내 데이브는 우리에게 많은 일을 시켰다. 한국과 같은 사계절을 가진 펜실베이니아의 7,8월 태양은 우리의 모자 색깔을 바꾸어 놓을 만큼 뜨거웠다. 그는 우리에게 '스마일 스케어리 데이브'였다. 

 2006년 여름방학 두 달을 로델연구소에서 보내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나는 로델 연구소에 정식인턴으로 지원했고 2007년에 연구보조로 고용되어 다시 미국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스마일 스케어리 데이브'는 나의 직속상관이 되었다. 

 그는 언제나 투머치 토커였다. 그가 말하는 대부분의 주제는 연구들에 관한 것이라 심지어 재미도 없었다. 그래서 미국인 연구보조들은 모두 그를 피했다. 주말에도 주중에도 출장이 많았던 그는 늘 함께 갈 자원자를 찾았고, (자원자를 찾기 힘들었기에) 열에 아홉은 내가 함께 동행하곤 했다. 처음엔 혼자 가고 싶지 않아 하는 그가 안 돼 보여 함께 동행한 길이었지만 그와 함께 출장을 가는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내게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의 영어 발음은 아주 정확했고, 심지어 속도도 적당했다. 각종 전공 지식을 또박또박 말하는 영어로 몇 시간 동안 듣고, 질문하고 하는 것만큼 영어실력을 키우는데 좋은 일은 없었다. 그 덕분에 나의 영어실력은 몇 달 만에 몰라보게 달라졌다. 

 유난히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고, 내가 못 알아듣는 모양새를 재빠르게 알아채던 데이브의 언어습관에 대해 말하자면, 그의 아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는 그가 파병시절 한국에서 만나 미국으로 함께 온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1970년대에 한국에 미군으로 파병을 나와 꽤 오래 한국에 있었다. 그의 아내 덕분에 데이브는 한국인이 알아듣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는 법을 오랫동안 연습해 온 사람이었다. 심지어 한글도 제법 읽고 말할 수 있어서 내가 잘 못 알아들으면 가끔 한국어로 단어를 알려주기도 했다. 

 그의 한국인 아내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연구실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는데 그가 혼자 맥락 없이 '클클클' 웃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더니 그가 주섬주섬 바지춤에 넣어두었던 셔츠를 빼서 겨드랑이만큼 들추어 자신의 등을 보여 주었다. 그곳에는 마치 일자로 된 석쇠로 도장을 찍은 듯 빨간 줄무늬 상처가 제법 크게 나 있었다. "왓 해픈?"하고 물었더니 그는 숨이 넘어갈 듯 웃으며 어젯밤에 자신의 아내와 말다툼을 하다가 아내가 자신을 때렸는데 그게 하필 나무로 된 한국 빨래판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희한한 상처가 났는데 생각할수록 너무 웃기다며 그는 한참을 더 웃었다. 부부의 세계를 전혀 몰랐던 나는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몰라 한참 멀뚱멀뚱하게 그를 쳐다만 보았다.

 그 이후에 그의 아내를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위아래로 까만 옷을 입은 작고 왜소한 한국 여인이었다. 그녀는 데이브를 따라 미국에 온 이후로 한 번도 한국에 돌아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말을 많이 잊어버린 것을 부끄러워했다. "나는 무식한 한국사람, 무식한 미국사람. 무식한 한국말. 무식한 미국말."이라고 몇 번을 반복해서 내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의 눈은 초점을 많이 잃어버려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데이브는 그녀가 한국에서 고아로 자랐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가 미국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그녀를 한인교회에도 데려가 보고, 한글학교에도 데려가 보고 여러 노력을 기울였지만 잘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언제부터 가졌는지 모를 기독교 신앙을 유일하게 붙들고 있었다. 데이브는 내게 한국교회 목사님과 그녀가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몇 번 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마음을 다해 도와줄 만한 한국교회 목사님을 알고 있지 못했기에 오히려 그녀가 더 상처받을까 봐 소개해 줄 수가 없었다.   

 그가 갑자기 혼자 클클 웃었던 일을 기억하니 생각나는 사건이 또 하나 있다.

 그는 한국인에게 '스마일 스케어리 데이브'로 불렸지만 미국 동료들에게는 '워커 홀릭 데이브'로 불렸다. 주말이고, 새벽이고, 저녁이고 그는 늘 제일 먼저 출근해서 제일 늦게 퇴근했다. 그저 연구하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 추가 근무수당도 회사에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상사도 포기한 찐 워커홀릭이었다.

 그런 그가 며칠 회사를 나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며칠을 쉬고 회사에 나온 데이브는 여느 때와 별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날 낮시간 필드에 나가 옥수수 샘플을 함께 수확하는데 그가 또 혼자 '클클클'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땐 좀 친해졌을 무렵이라 '또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 생각하곤 딱히 묻지 않고 내 할 일을 계속했다. 물었다간 그의 투머치 토크에 또 말려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클클클'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다 결국 배를 잡고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분간이 안될 지경이 되도록 혼자 웃었다. 그쯤 되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헤이. 데이브. 왓 헤픈?"

 그는 눈가에 눈물을 닦으며 기가 막힌 이야기를 했다. 그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어머니가 가스레인지에 무언가를 올려놓고선 잊어버리는 바람에 불이 나서 집이 홀라당 다 타버렸다고 했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고, 불도 옆집으로 번지지 않았지만 데이브의 집은 거의 다 타버려서 임시 거처를 마련하느라 그동안 결근을 했던 것이었다. 그 일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는 계속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불이 크게 났는데 아무도 안 다쳐서 천만다행이라고 스스로 이야기하면서 웃음을 멈추었다. 그때도 나는 같이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해 가을, 나는 큰 사고를 당했다.

 운전면허를 따고 일주일 만에 미국으로 갔던 터라 주변에서 다들 나를 '베드 드라이버'라고 놀렸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코너를 돌다 회사 트럭 옆구리를 크게 긁어먹었기도 하고, 스톱 사인을 못 보고 가다가 스톱 사인을 들이받기도 하고, 돌길을 마구 달리다 기름통에 펑크를 내는 등 작은 사고들을 계속 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운전이 미숙한 상태에서 필수적으로 운전을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스스로가 베드 드라이버인지 잘 몰라 위험했던 때였다. 단돈 1000불에 산 고물 차를 가지고 겁도 없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살다가 결국 큰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여느 때처럼 대충 구워 잼을 바른 토스트가 올려진 접시를 조수석에 놓고 출근을 하던 이른 아침이었다. 매일 다니던 길을 가면서 조수석에 놓아둔 토스트를 집으려고 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에 차가 쿵 하는 소리를 내었다.  깜짝 놀라 앞을 보니 보닛이 아래쪽으로 기울고, 트렁크는 하늘로 올라가며 차가 뒤집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풍덩. 차가 다리밑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거꾸로 뒤집혀서.

 다행히도, 그리고 불행히도 그 밑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 덕분에 충격이 완화되었지만, 순식간에 얼굴부터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또 불행히도 나는 안전벨트를 하고 있었다. 벨트 덕분에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문을 열고 나갈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이게 현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이라는 판단이 서자 영화에서 본 것처럼 살아왔던 시간이 눈앞에 촤라락 지나갔다. '아. 이렇게 죽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불현듯 여기가 그리 깊지 않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매번 지나던 길이라 알고 있었다. 손의 감각으로만 더듬어 벨트를 풀어내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어떻게든 나와서 자동차 위로 기어 올라갔다. 다행히 물이 그리 깊지 않아서 걸어서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키가 큰 게 얼마나 다행이던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겐 매 초가 생생하게 살아있어 마치 수십 시간을 지난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나는 살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젖은 생쥐꼴로 피를 흘리며 돌아온 나를 본 같이 살던 친구들은 혼비백산했지만 나 대신 사고를 수습해 주고 회사에 전화를 걸어 주었다.

 

 다음날 출근했을 때, 이미 회사에는 내 사고 소식이 널리 널리 퍼져있었다. 아침 커피타임에 모두 둘러서서 한 마디씩을 했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괜찮았냐고 걱정의 말을 했고, 젊은 직원들은 베드 드라이버가 결국 사고를 낼 줄 알았다며 놀리기에 바빴다. 그 가운데 서 있던 나는 어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 같지 않게 씩씩하게 웃으며 그 모든 말들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기 멀리서 거구의 데이브가 뛰듯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눈은 한참 멀리서 보아도 걱정과 안도가 가득 서려 있는 눈빛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히 걸어왔지만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크게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무리 사이로 거침없이 들어와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알 유 오케이?"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놀림도, 비난도, 동정도 없었다. 그렇게 몇 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내 어깨를 잡고,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고는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알 유 리얼리 오케이?" 그것은 마치 사고 난 딸을 대하는 아빠의 눈빛이었다.

 아들만 둘이던 그에게 그런 눈빛이 어떻게 나왔는지. 아빠가 없이 살았던 나는 그 눈빛을 어떻게 알아본 것인지. 

 한 번도 그런 눈빛을 본 적이 없던 나는 배꼽 아래 저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솟아올랐다. 미국이란 낯선 나라에 와서 혼자 모든 걸 해결하며 살아갔던 시간에 대한 서러움, 어제 나는 아무도 모르게 죽었을지도 두려움이 한순간에 목구멍까지 차 오르는 것 갔았다. 아무도 없었다면 그의 품에 안겨서 몇 시간이고 엉엉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그리고 불행히도 눈물은 눈 가에만 맴돌다 멈추었다. 그리고 그에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아이 엠 오케이. 돈 워리."

 

 그와 헤어지며 몇 년 안에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좀처럼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그런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그 시간 동안 삶의 굵은 고비를 넘길 때마다 나는 그날 그의 눈빛이 떠올랐고 그가 보고 싶었다.

 

 그가 처음 본 한국 학생들에게 트랙터를 보여주고, 여름 내내 데리고 다니며 일을 시켰던 것은 그의 기억 속 한국은 손으로 모내기를 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한국을 기억하는 그는 2006년 한국에서 온 청년들에게 좋은 선진 기술을 많이 가르쳐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잘 안 통하던 우리는 그가 그저 '스마일 스케어리 데이브'인 줄만 알았다.

  그가 아내에 대해 내게 조심스레 내게 말한 것이 넌지시 도움을 구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스무 살을 갓 넘겼던 나는 그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도 몰랐다. 알았다 해도 그때의 내가 모진 풍파를 다 겪은 그녀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이라면 가끔 그녀를 만나 같이 차 한잔 마시고 앉아있다가 돌아오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 텐데. 함께 한인 교회를 가 줄 수도, 좋은 목사님을 소개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의 나와 그때의 데이브가 만날 수 없는, 맞물리지 못하는 시간의 수레바퀴가 참 야속하기만 하다.

 그가 '클클클' 웃던 맥락 없는 웃음이 어떤 의미였는지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울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럴 때마다 울다 보면 맥주 벨리가 홀쭉해져 버릴까 봐 그는 울음대신 웃음을 택핸던 게 아닐까.  


 데이브가 가끔 그렇게 맥락 없이 클클클 웃던 날, 나는 내 몸의 2배쯤 되는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그저 그와 함께 퇴근 후에 맥주집에 가 주었다. 측은함이나 안타까움의 감정으로 그와 동행한 것은 아니었다. 연구를 그렇게 좋아하지만 석사까지 학업을 이어 갈 수 없었던, 그래서 만년 연구원에만 머물러야 했었던. 그의 인생에 유일한 낙이 맥주와 함께 자기 손가락만 한 버펄로윙을 잔뜩 먹는 일 같아서. 유일한 낙인 그것마저 혼자 외롭게 즐기지는 않았으면 해서. 그리고 어느새 나도 그 시큼하고 짭짤한 버펄로 윙이 맛있어졌기에 그의 곁에 앉아 투머치 토크를 들으며 맥주를 마셨을 뿐이었다. 

 나의 데이브. 그가 이렇게 계속 떠오를 줄은 몰랐다. 나와 맥주를 마셨던 시간이 그에게 위로가 되었기를. 그 뒤로도 맥주를 마시는 그의 곁에 누군가가 함께 했기를. 버펄로 윙을 먹을 때마다 그가 혼자가 아니었기를. 

 언젠가 그를 꼭 한번 더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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