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을 소유할 수 있는가?
여유에 대한 질문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제주살이 3년 차,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막 끝내서 거실에는 이삿짐이 아직 한가득 쌓여 있었다. 며칠 뒤 필리핀 세부 한 달 살기를 위해 출국을 해야 했기에 쌓인 이삿짐은 일단 한동안 내버려 둬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날- 2020년 1월 20일-, 한국에서 첫 전염병 감염 확진자가 나왔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바이러스라고 '우한바이러스'라고 불렸다. 첫 확진자는 해외에서 비행기를 타고 들어온 사람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혼자 세 아이를 데리고 출국하는 길이 괜찮을까 염려가 되었다. 며칠을 고민했다. 출국날은 점점 다가오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결국 세부행 비행기표와 숙소, 여행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을 취소했다. 이제 겨우 다섯 살인 어린 막내까지 데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다녀올 용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위약금을 물어야 했지만 취소를 받아주는 업체도 크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금 돌아보면 출국하기로 했던 날, 국내 코로나바이러스 환자는 딱 두 명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무서워했다는 사실이 새삼 재미있다.)
눈이 많이 왔던 긴 겨울을 지나왔는데 아이들은 겨울방학이 끝나도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처음으로 발생한 세계적 전염병사태에 국가도 우왕좌왕하며 첫 시스템을 만들던 때였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대신 매일 의무적으로 아이들과 산책을 나갔다. 공부는 안 해도 하루 한번 햇빛은 꼭 쐬어주어야 한다는 나름의 철칙이었다. 그해 봄에도 어김없이 들판에 푸성귀들이 돋아났다. 가장 먼저 냉이가 나고, 달래가 나고, 쑥이 돋았다. 작은 칼 하나, 비닐봉지 하나 들고 걷다가 푸성귀가 보이면 앉아서 그걸 캐느라 한참을 머물렀다. 제주는 희한하게 쑥도, 달래도, 냉이도 육지 것 보다 향이 덜했다. 그래서 별 맛이 없었다. 그런데도 매일 걷고, 걷다가 보이는 푸성귀를 캐고, 캐논 것들로 여러 가지 요리를 해 먹었다. 처음엔 그저 아이들과 햇빛을 더 많이 쐴 요량으로 길에 주저앉았던 건데, 앉으니 푸성귀가 보이고, 보여서 캐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더 재미있어했다. 그때가 나의 주부 인생에서 밥 하는데 가장 많이 공을 들인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니 삼시 세끼를 부지런히 해 먹어야 하기도 했고, 세상이 다 멈춰버리니 나도 좀 멈춰도 될 것 같아서 마음이 여유로웠다. 어떤 날은 주말에 남편을 공항에 데려다주고 온 차가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다음 주말이 올 때까지 일주일 내내 그 자리에 서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대단한 요리를 했던 것은 아니다. 계란 반숙 하나 구워 참기름 한 숟갈 두르고, 달래로 만든 달래장 한 숟갈 올려주면 근사한 달래장 비빔밥이 된다. 아이들은 쓱쓱 밥을 비벼 금세 한 그릇을 뚝딱 했다. 쑥을 믹서에 갈아서 찹쌀가루랑 버무리고 뜨거운 물에 익반죽을 한 후 전자레인지에 몇 분 돌리면 금세 쑥떡이 되었다. 향도 없는 냉이를 넣고 끓인 된장국은 또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제주살이 3년 차라 남들이 모르는 바다도, 숲길도 많이 알고 있었다. 동네에만 있는 게 좀 지칠 때는 아무도 없는 바다에 가서 한참을 놀다 오기도 했다. 희한하게도 우리들은 한국인의 본성인지 바다에서도 먹을 것을 잘 찾아왔다. 사람들이 없는 맑은 바다에는 '꼬시레기'라 불리는 해초들이 지천에 있었다. 얇은 천연 국수같이 생겨서 오독오독한 식감을 가진 붉은빛이 도는 해초이다. 전라남도 사람들은 살짝 데쳐서 초장에 찍어 맛있게 먹는 해초인데 제주도 사람들은 톳만 알고 꼬시래기는 몰랐다. 한 봉지 가득 캐다가 근처 사는 이웃들과 나누어 먹었다. 다들 처음 먹어보는 해초에 신기하고 맛있다고 즐거워했다. 우리 아이들은 요즘도 식탁에 해초가 올라오면 꼬시래기 따서 나눠 먹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그때 그런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해 하늘이 유난히 파랬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 놓고 몇 시간 산책을 해도 기관지가 아프지 않았다. 아무 때나 나가도 미세먼지 하나 없는 하늘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마음껏 나가 숨 쉴 수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새삼 깨닫게 되는 나날이었다.
마스크 의무가 해제된 지 벌써 1년이 지나간다. 지금도 시골에 살고 있지만 이젠 아무 때나 산책을 나갈 수 없다. 기온이 좀 포근한 날은 어김없이 대기가 좋지 않아서 마스크를 쓰고 산책을 다녀와도 기관지가 칼칼하다. 사실 아이들도 이제 다 커버려서 하늘이 아무리 파래도 그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따라오지도 않는다.
코로나 마지막 해에 회사에 들어갔고, 마스크 해제가 된 후 회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서점을 오픈하겠다고 준비하며 이런저런 일들을 병행하느라 계속 마음이 바빴다. 특히 서점 오픈 막바지 작업을 했던 올해 겨울은 아이들에게 밥만 차려주고 일하러 나가느라 아이들과 기억할 만한 시간이 별로 없다. 몇 일째 떡이 먹고 싶다는 떡 좋아하는 막내에게 쑥떡도 못해주고, 비빔밥 좋아하는 둘째에게 달래장도 못해주고, 봄동 좋아하는 첫째에게 봄동무침도 아직 못해줬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내게 자꾸 "요즘 많이 바쁘지?"하고 묻는다. 사실 그렇게 바쁘지 않은데, 나는 뭔가 매일 바빠 보이는 모양이다. 바쁨이 디폴트 값이 되어버린 삶의 패턴 앞에 2020년 아이들과 함께 보았던 파란 하늘이 자꾸 어른거린다. 그때 우리가 누렸던 여유는 강제적이어서 가능했던 것일까? 너와 내가 모두 다 쉬어야 했으니까. 아니면 그건 언제나 우리 마음에 달린 일인 걸까?
봄이 다가오고, 푸성귀들이 땅을 뚫고 나오려고 간질간질하고 있다. 올해 봄을 우린 어떻게 보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