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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나 Jul 27. 2023

밉고 애달파서

좋지만 별로인 남자

  내게는 20년 가까이 알고 지내는 남자가 있다.


  일반적으로 나의 남편이라 불리는 남자. 범띠 여자와 사는 개띠 남자. 범 무서운지 모르는 하룻강아지. 스무 살에 그를 만나 연애를 시작하고, 4년 후 결혼했다. 어느덧 그와 함께 인생을 보낸 시간이 햇수로 19년째, 함께 살기 시작한지는 15년이 지났다.

 그동안 내가 겪은 그는 정말 보기 드물게 착한 사람이다. 사춘기 딸아이에게 화내지 않고 반복해서 같은 수학 문제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인내심이 많은 아빠이고, 술, 담배, 여자, 직장, 돈 그 무엇 하나로도 속을 썩인 적이 없는 성실한 가장이다. 게다가 ‘춥다, 덥다, 힘들다, 아프다, 배고프다.’ 한번 뭐라도 군소리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는 순하디 순한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그를 두고도 나는 종종 이혼을 떠올린다.       


 쿠츠타운(Kutztown)이라는 곳이 있다. 한국말로 하면 쿠츠리 정도 되려나.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작은 도시이자 유기농업을 연구하는 로델연구소가 위치한 곳이다. 또한 내 기억 속에 제2의 고향 같은 곳이기도 하다.

 21살, 학교에서 지원하는 해외 탐방프로그램으로 한 달간 로델 연구소를 다녀왔다. 그 후, 정식 인턴이 되고자 연구소에 지원했고 22살에 1년간 그곳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곳에서 지내며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진심으로 자연을 아끼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 미숙한 사람을 대하는 성숙한 사람의 눈빛, 태연히 온몸으로 비를 맞을 수 있는 담대함, 작은 일에 크게 기뻐하는 마음의 태도 같은 것들이었다.

 쿠츠타운은 내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외국이었고, 처음으로 경험한 넓은 세상이었다. 그때 나는 새로운 장소에는 새로운 경험과 삶의 태도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의할 일이 있어."

 어젯밤 남편에게 몰타 취업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일자리를 잡고 첫째만 데리고 나가서 1년 정도만 살다 오면 어떨까? 첫째 견문도 좀 넓혀주고 내 마음속 욕구도 좀 해소하고 그럼 좋을 것 같은데."

몰타는 지중해 중앙에 위치한 아주 작은 섬나라로 자연이 아름답고, 취업 비자를 받기 쉬운 나라이다. EU 국가라서 취업해서 생활하다가 영주권을 받으면 나중에 독일로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첫째에게 먼저, 그리고 둘째, 셋째에게도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괜찮은데 그러기엔 막내가 너무 어리잖아?"

 “그건 그렇지. 당신도 일 할만한 자리가 있던데 같이 준비해서 갈 생각은 없지?”

 “음… 아무래도 지금은 좀 힘들지.”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대답을 먼저 예상하고 시작한 대화였다. 그래서 그리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었다.     


 그는 떠나는 일이 두려운 사람이다. 결혼할 때 함께 외국에 나가 살기로 계획했던 남편은 아이가 생기자 외국은커녕 제주도로 가는 일조차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주기적으로 그의 마음을 흔들어 본다. 이제는 그가 좀 흔들리지 않을까 싶은 기대 반, 움직이지 않는 그의 마음에 불안의 불씨를 던지고 싶은 심술 반으로 하는 일이다.     


 대화가 끝나고 그는 거실 한구석에 가서 조용히 앉아 몰타라는 나라를 검색했다.

 나는 내 책상에 앉아 합의이혼을 검색했다.


 신혼 초, 연고 하나 없는 목포는 내게 마치 다른 나라 같았다. 거리도, 사람도, 문화도 모든것이 낯설기만 했다. 남편은 아침 7시면 나가서 밤 9시는 돼야 들어왔고, 첫아이를 키우는 일은 모두에게 그렇듯 너무도 어려웠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비쩍 마른 쭉정이 같아서 제발 이곳을 떠나자고, 어디든 비빌 언덕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그에게 애원했지만, 그는 가만히 있었다. 내 모든 원망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냥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계속 버텼다.

 결혼한 지 10년이 되던 해,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나를 죽일 것 같은 벼랑 끝이 보였다.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아이 셋을 데리고 제주도로 떠났다. 그때도 그는 따라 내려오지 못했다. 3년이 지나도록 하는 일을 정리하고 내려오겠다는 말만 계속하면서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던 그였다. 만 3년을 채우던 해에 결국 그는 내게 다시 돌아와 달라고 말했다. 마침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의 터전을 찾았는데 자기의 새장으로 기어이 나를 다시 잡아끈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곳으로 이를 꽉 깨물며 돌아왔다. 싣고 온 이삿짐이 5톤이었고 두고 온 미련이 50톤이었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내게 양보한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일,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양보하지 않는다. 결혼 후, 함께 새로운 세계로 나가보자고 수도 없이 말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일, 그 부분을 건드리면 특유의 똥고집 표정을 지으며 입을 꾹 다문다. 입을 꾹 다무니 무슨 생각에 그러는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내 집이 마치 감옥처럼 느껴지면서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뱃속 깊이 내장에서부터 올라온다. 예전엔 이럴 때 크게 싸우곤 했는데, 언젠가부터는 혼자 조용히 이혼을 검색하게 되었다.   

  

 몰타 취업에 관한 대화를 나눈 다음 날, 오랜만에 그와 마주 앉아 낮술을 한잔했다. 미워도, 고와도 우린 서로에게 유일한 근거리 술친구라 술이 고픈 날에는 서로의 앞에 앉아 주어야 한다. 떠남에 대한 이슈를 제외한다면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말이 잘 통하기도 한다.

 "그때 여기 찢어졌었지?"

 술잔을 채우다가 그의 손에 흉터 세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버지가 하시던 가구공장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작은 공장이라 관리자인 그는 공장에서 진행하는 모든 공정에 관여해야 한다.

 "이건 지게차에 짐을 싣다가  가구 사이에 살이 껴서 찢어졌고, 이건 원형 톱날이 스쳐서 찢어졌고, 이건 기계에 손을 잘못 넣어서 손가락이 잘릴 뻔했었지."

 처음 듣는 소리를 한다.

"엥? 그런 말은 처음 뜯는데? 나 제주도에 있을 때 다친 거 아니야? 그때 그냥 찢어진 거라고 하지 않았나?"

"인대까지 다 찢어져서 안팎으로 여러 번 봉합했었지."

 제주에 있을 때, 주말에 집에 온 그의 손에 초록색 깁스가 덮어 있어서 놀랐던 때가 기억났다.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혼자 잔을 비우며 속으로 생각했다.

 '멍청이. 아프다, 많이 다쳤다. 어떠하냐. 그렇게 말하면 어디가 덧나나?'

 '혼자 애들만 돌보기도 벅찬데 자기까지 걱정시키면 짐이라고 생각했겠지.'

 자문자답에 애꿎은 술잔을 또 비웠다.


 날아가고 싶은 나도, 그런 나를 알면서도 내 다리에 메인 그 줄을 꼭 붙들고 있는 그도 참 밉고 애달파서 그날따라 술이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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