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조니워커의 맛"

by 블랙베어


태국 북부 치앙마이. 새벽 5시까지 놀다가 숙소에 돌아왔다. 치앙콩을 거쳐 메콩강을 사이에 둔 국경을 넘어 훼이싸이까지 가려면 조금 서둘러야 했다. 간밤의 지랄발광으로 오금팍이 저려왔다. 너무 피곤해서 침대에 몸을 뉘었지만 5초 만에 벌떡 일어났다. 여기서 잠들면 내 여행 테마는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밑도 끝도 없는 허접한 그 여행 테마 "배반" 말이다. 이대로 잠들면 오후 늦게 일어나 친구들 따라 아무 생각 없이 빠이로 떠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선 왠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만난 친구들과 즐겁고 장소와 친숙해졌을 때 미련 없이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자! 그게 내가 추구하는 여행이다.



부랴부랴 짐을 싸고 썽태우에 올라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자다 배가 고파 일어나 배낭을 뒤적거렸다. 전날 엘이 야시장에서 사준 말린 망고 두 봉지가 나왔다. 사주면서 엘이 남긴 말,


"형! 두 개 중에 하나는 잘 간직하고 있다가 우리 다시 만나게 될 때 저에게 주세요"


이 무슨 괴랄한 부탁인가? 뜬금없는 엘의 소녀감성에 충격받아 난 잠시 얼어붙었다. 우리 둘 사이에 무슨 애틋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사랑의 증표마냥 말린 망고 한 봉지를 남겨달라니… 설마 나를?



암튼 말린 망고는 지독하게 맛이 없었다. 짐도 무거운데다 무엇보다 징그러운 마음이 들어 두 봉지 다 버렸다. 훗날 엘이 라오스에서 만나 망고 한 봉지 얘기를 꺼냈을 때는 잠시, 소름 돋았다. 물론 엘은 전형적인 상남자다.



맛없는 망고를 버리니 한결 가볍다. 사랑의 증표든, 인류의 유산이든 짐 되는 것을 버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도 예외 없다. 한때 사랑했지만 이제는 꼴도 보기 싫은 연인을 찰 때는 더 기분좋…을 것이다. 확실하게는 알 수 없다. 나는 매번 차이고 버려졌으니. 하아, 세상의 수많은 비치들.




껌벅껌벅 졸다 보니 어느새 국경에 도착했다. 흥분과 감격. 육로로 국경을 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강을 건너는 것이었지만, 분단국 반도에 사는 촌놈에게는 이조차 신기할 뿐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메콩강. 누런 빛깔 도도함, 찰진 무심함.





▲ 강 건너 태국 마을. 국경의 감동이란!




강을 건너 라오스 훼이싸이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았다. 훼이싸이에 대해서는 정보가 전혀 없었다. 여행자 거리를 걷다 테라스가 좋아 보이는 게스트하우스가 보이길래 그곳에 짐을 풀었다.


훼이싸이는 국경에 접한 '그냥' 작은 마을이다. 큰 길가를 중심으로 게스트하우스들이 늘어서 있고 여행자들을 위한 식당과 편의시설이 있다. 문제는 태국과는 달리 밤늦게까지 문을 여는 곳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나도 해 질 무렵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밤 9시 정도에 일어나 거리로 나왔는데 문 연 곳이 거의 없었고 거리가 어두워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 거리는 대략 요렇게 생겼다.





방 열쇠를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게스트 하우스 문을 여는 순간, 나를 맞아주는 것은 찐~한 노린내와 썩은 하수구 냄새. 짐을 풀자마자 나는 그 냄새의 원인을 찾아 킁킁거리며 방안을 기어 다녔다. 배도 고파 죽겠는데 이게 뭔 지랄? 결국 범인을 찾았는데 문 앞에 놓여 있는 발털개였다. 거기에 코를 대는 순간 우웩! 삭힌 홍어가 싼 오줌 냄새. 그런 게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만큼 비현실적인 썩은 내가 났다. 당장 카운터에 내려가 주인장을 끌고 오니 몇 번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새 것으로 갈아준다. 충격적인 것은 주인장은 썩을 놈의 발털개를 빨지도 않고 그대로 옥상에 걸어 놓는 것이다. 햇볕에 마르면 살짝 냄새가 지워질 수는 있겠지만 샤워하고 젖은 발로 문대다 보면 냄새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올 텐데. 누군가는 더 많이 삭혀진 똥냄새를 맡겠군..



노점에서 국수 한 사발을 들이켰다. 사장님이 약초 같은 것을 뿌려 먹으라고 하길래 잔뜩 뿌려먹었다. 어른의 맛이 났다. 초딩입맛을 가진 난 어른스러운 맛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후루룩 들이키니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약초국수 한 그릇에 용기가 났다.




▲ 약초의 맛은 살짝 비릿했다.




국수를 먹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니 중고딩 무리가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간다. 그들의 표정, 그들의 손짓과 발짓이 모두 살아 춤추고 있다. 그래! 저게 내가 뼛속 깊숙이 질투하는 섹시한 역동성이지. 당장 침 한 번 뱉고 우주를 정복해 버릴 것 같은 그놈들.


질투는 나의 힘, 여행은 계속된다.










▲ 테라스에서 바라본 훼이싸이 전경.




숙소에 돌아와 인터넷만 끄적이다가 혹시 몰라 전화기를 꺼내 태국에 문자를 보내니…신기하게도 된다!! 강 건너 태국이라 태국 통신사 이용이 가능했던 것. 방콕에서 아이폰을 분실하고 통화, 문자만 가능한 피처폰으로 하나 샀는데 이게 꽤 쏠쏠한 역할을 했다. 태국 친구들과 몇 번 문자를 주고받는다. 라오스 여행 중이라고 하니 "I kiss~~" 이러며 아양을 떠는데 이게 무슨 같잖은… 있을 때나 잘해줄 것이지. 나란 놈은 없을 때 잘해주고 싶은 놈인가?



밤 9시쯤 거리로 나가니 그야말로 그냥 깜깜. 문을 연 곳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한 과일가게가 문을 열어 망고스틴을 사들고 처벅처벅 10분쯤 걸어갔는데 떠억하니 문을 연 노천 바를 하나 발견했다. 서양 놈 둘이 술을 마시고 있길래 합석해서 술을 마셨다. 원래 술을 잘 마시지 않는데 그날따라 위스키가 마시고 싶어 조니워커를 시켜 잔술로 계속 마셨다. 2잔인가는 서양애들이 사줬다. 갸네들은 오스트리아에서 왔는데 중병에 걸려 요양 온 사람들처럼 낯빛이 꽤 어두웠다.


몇 잔 마시다 그 놈들은 가고 나 혼자 남아 술을 마셨다. 바에는 남자 1명과 여자 1명이 일하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보스라고 말했다. 첫인상에 둘의 나이 차이가 많아 보여 남자에게 "저 여성분이 네 엄마냐?"라고 묻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사실 여자는 26살, 남자는 25살.


번듯한 가게와 고생한 얼굴, 인생의 대차대조표.


여사장은 부끄럼쟁이라 구석에서 술병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가 작업 건 것도 아니었는데.. 남 종업원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더 눈이 반짝인다. 서로 안 되는 영어를 하니 더 피곤해져 술만 마셨다. 나중에는 코로 마시는지 입으로 마시는지 모를 정도로 부어 넣다가 집에 왔다. 아침에 깨보니 그래도 용케 망고스틴 봉지는 들고 와서 술기운에 두 개는 까먹고 잤더라.



이 날 밤을 생각할 때마다 또렷하게 남아 있는 음성 하나.


바에서 만난 낯빛 어두운 오스트리아 놈이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껴들어서 이런 추임새를 넣곤 했다.


"Are you sure?" 더 취해서는 악센트를 넣어서 "Are! You! Sure?!"


이런 개개끼를 봤나… 야 임마! 속고만 살아왔냐.


그런데, 지금에서야 되돌아보니 그 말에 어떤 울림이 느껴진다. 그 당시 그 울림을 음미할 수 있었더라면 또 다른 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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