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친목의 밤을 기획하다"

by 블랙베어

산울림의 "더더더"를 듣고 있다.

"속삭여 주세요, 들릴 듯 말 듯 그 말을 더, 더~더~ 그냥 앉아 있어요, 지금 만난 것처럼 조금만 더, 더~더~~ 짓궂게 생각 마세요, 이 마음은 더해요, 언제나 아쉬움이 남아 있어요, 내게 날개가 있다면 그리움을 그릴 수 있다면, 날아가겠어요, 보여드리겠어요~"


동화 같은 가사다. 후반부의 몽환적인 기타 반주도 좋고.

동화 같은 로맨스를 꿈꾸며 여행을 떠났다. 디즈니 동화 같은 것 말고 어른을 위한 동화. 이를테면, 흠... 천일야화?


운이 좋게도 여행지에서 몇 번의 수수하지만 발그레한 로맨스가 있었다.


잠깐! 로맨스? 로맨스라구? 에이, 거기까진 너무 나간 거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쉴 새 없이 들이대다 개같이 까이는 패턴 속에서 진흙 속의 연꽃처럼 피어나던 몇 번의 미적지근한 호감.. 설렘.. 만남이 있었다.


결국 동화는 옘병, 실질적으로는 싸구려 커피에 가까웠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하고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그래, 딱 이 정도 분위기다. 딱.


그치만 설렜고 아름다웠다. 추억을 생각하며 가끔, 씨익 웃을 수 있어 좋다. 설령 그 추억이 희미해진다한들 그대로 흘려보낼 수 있으니 더 좋고.




라오스 3일째.

'숙박비엔 조식이 포함되어 있지, 숙박비엔 조식이!' 눈을 뜨자마자 이 말을 되뇌고 신발만 신고 그대로 식당으로 향했다. 비싼 숙박비를 지불했으니 악착같이 먹어야 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아침식사는 훌륭했다. 그중에 볶음밥이 베스트! 곁들여 마신 커피도 훌륭했다. 옆 테이블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올 정도. 흐으음...비음이 잔뜩 섞인 이 소리는 커피맛에 반했을 때 내는 소리.

아쉽게도 이 훌륭한 조식에 대한 사진이 없는데 네팔 여행 이후로 사진 찍는데 질려버려 라오스 여행기에는 사진이 별로 없다. 나란 놈은 근본은 있는데 근성이 없다.


아침을 먹자마자 방을 빼야 했다. 오늘, 이곳의 모든 방은 이미 예약이 꽉 찬 상태. 숙소가 마음에 들어 이틀 후에 오기로 예약하고 같은 골목의 숙소 하나를 잡았다. 2층으로 지어진 정갈하고 아담한 곳이었다. 특히 앞마당의 너른 평상이 마음에 들었다. 가격도 이전 숙소의 2/3 정도니 대만족.


대충 짐을 풀고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 뒤쪽에는 주방이 있었는데 서너 명이 분주히 오가며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마치 우리네 김장 담그는 분위기. 조금 지켜보다 왔다 갔다 하며 시누이처럼 이것저것 물어도 보고 참견도 했더니 옆에 앉게 해 준다. 그런데, 하필이면 앉은자리가 생선 굽는 곳. 매캐한 연기와 꼬릿한 냄새에 에잉~하면서 뒤로 물러서니 다들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렇게 주인네랑 웃고 있는데 주인집 딸네미 '라'가 등장했다. (라오스에는 '라'라는 이름이 많다. 내가 만난 '라'만 3명!) 내가 마치 여기 주인인척 아무말 없이 바나나의 반을 뚝 잘라 건네주자 라가 까르르 웃는다. 귀여웠다. 춘향이보다는 심청이에 가까운 인상과 미소. 라와는 영어가 통하니 자연스레 대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라는 대학생이었는데 보통 오후에 수업이 있고 오전에는 집안일과 무슨 사회활동을 한다고 했다. 라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문득 빠이에 있는 폴, 댄, 엘, 미, 숙이 생각났다. 이 놈들을 이곳으로 소환하려면 그럴듯한 떡밥이 필요하긴 한데...


"라! 이제 곧 내 친구들이 루앙프라방에 온다!!"


"쏘 왓??"


"니 친구들, 내 친구들 모여 함께 노는 건 어때?"


라의 침묵. 까인 건가?... 하고 꼬리를 내리려는데 라의 입에서 조그맣게 자기 수업이 어쩌구... 시간이 어쩌구...한다. 라라라!! 싫지는 않구나~


"그래!! 라오스-코리아 프렌드쉽 나이트!"


급조된 이름까지 지어가며 애 많이 썼다. 그제서야 확실하게 오케이하는 라. 라도 은근 기대하는 눈치다.


그래~~ 내 얼굴 보지 말고 잘 생긴 내 친구들을 상상해 보라구!!


라와 약속을 하고 동네 마실을 위해 길을 나섰다.



▲ 우리 동네는 내가 지킨다!!



▲ 루앙프라방에는 서양식으로 지어진 게스트하우스들이 꽤 많다. 라오스가 프랑스 식민지였단 사실만 알고 있는 나는 프랑스풍이 저런 거겠구나.. 짐작만 했다.



숙소에서 받은 지도를 펼쳤다. 루앙프라방에 대해선 깜깜 무식. 갈 곳을 찍어보다가 일단 시장으로 가보기로 했다. 난 딱히 갈 곳이 없으면 시장에 간다. 구경거리가 많기 때문. 사람 구경, 쌈 구경, 음식 구경 (및 시식)에 운 좋으면 소매치기 구경까지. 건물 두 동에 들어서 있는 평범해 보이는 시장으로 들어간다. 시장 이름은 푸시마켓.


더위에 지쳐 있는 개마냥 헥헥거리며 걷고 있는데 개그우먼 김미연을 닮은 한 처자와 눈이 마주친다. 그런데 이 처자, 심상치 않다. 마주치던 눈길도 피하지 않고 나를 향해 살랑 웃어주기도 한다. 자신의 매력을 알고 이를 적극적으로 어필해 본 경험이 많은 여자의 미소다.


아항~ 마침 물어볼 것도 있어 말을 걸어보니 쏟아지는 청산유수. 니사정 내사정 이야기하다 보니 우린 이미 친구. 언니가 운영하는 신발가게에서 일하는 김미연은 얼굴뿐만 아니라 몸매도 김미연을 쏙 빼닮았다. 25살이라고 했는데 일찍 결혼하는 라오스의 문화에 비추어보면 올드미스인셈. 자기가 일하는 곳으로 안내하는 김미연. 자신의 언니 및 옆 가게 사장님에게도 날 소개해 준다. 커피 한 잔까지 타 주니 내 마음이 더 업!된다. 커피를 다 마시고 전화번호를 교환한 뒤 헤어지려는데...


"5시쯤 여기 오지 않을래? 그때 여기 일이 끝나는데."


"엉? 으... 응..."


나도 모르게 뜨뜻미지근한 대답이 튀어나와 버렸다. 오늘 일정도 없고 시간도 많은데 그냥 시원하게 간다고 하면 될 것을... 혹여 '나는 남, 너는 여'라는 괜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거나 그녀의 단순한 호의를 호감으로 오해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호기롭게 '세계 곳곳의 처자들과 짧고 찐한 로맨스를 하겠노라!'며 설치고 다녔는데, 마음속 어딘가에는 '그건 말만 번지르르할 뿐, 결국 망나니 짓 아냐?!"라는 제동장치가 작동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미적지근한 나의 대답에는 이런 복잡 미묘한 심경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것 같았다. 내 한계이자 매번 쪼그라들고 뒤돌아서는 비겁함의 원천. 즐기고 누리고 싶으면서도 마음의 짐은 지고 싶지 않은 비겁함 말이다.

어쨌든 느슨한 약속만 한 채 시장에서 나왔다. 오롯한 기분 이어야할지 난감한 기분이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두어 시간을 정처 없이 헤맸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를 발견, 들어가 보았다. BC 게스트하우스. 간판에 'A'자가 떨어졌는지 살펴봤는데 그런 흔적은 없었다.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었고 건물의 외양도 아담하고 정갈해 보였다. 로비에 신발이 많이 있길래 사람들이 많이 있냐고 물으니 다들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조금 실망해서 라면이나 먹고 가려고 정원에 나와 주문했다. 옆 테이블에는 중년 아재 두 명이 소주를 까고 계셨다. 꽁술이 아쉬웠지만, 둘 만의 대화가 무척 심각해 보여 말을 건넬 수는 없었다. 한참 라면을 먹고 있는데 2명의 한국인 처자가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온다. 가볍게 목례만 하고 라면을 먹으려는데 한 처자가 내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며 말을 붙인다.


"우와! 카메라 디게 좋아 보인다..."


개뿔! 내 카메라는 디에쎄랄도 아니고 그전 싸고 흔한 미러리스 카메라. 아마도 카메라에 달린 85미리 렌즈가 좀 있어 보였나 보다.


"아! 요게 요게 여친렌즈라고 인물 사진 전용이에요. 함 찍어드릴까요?"


어휴. 지 버릇 개 못 주지.. 라면을 팽개쳐두고 그 여성분을 모델로 사진 몇 방을 찍었다. 적당히 포즈를 취해 보는 그녀. 자신의 매력을 알고 그걸 어필할 줄 아는 여자를 오늘 벌써 두 명이나 만나네.. 그녀는 자신을 찍은 사진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이내 다 삭제시켜 버렸다. 그러더니 이전에 내가 찍은 사진을 혼자 돌려본다. 메모리 카드에 남아 있는 네팔 사진들. 이어지는 네팔에 관한 폭풍 질문.


야! 내가 너의 아라비안 나이트냐? 그만 물어봐...


라는 생각은 잠시 뿐, 네팔 트레킹 이야기를 하니 자신도 라오스 여행 이야기를 한다. 그 와중에 옆에 있던 새초롬한 여자는 방에 들어가 버리고 이 여자와 나만 남아 여행에 대한 이야기의 합을 주고받았다. 서로 간의 여행 이야기에 시간이 줄줄줄 새 버린다.


그런데, 이야기가 좀 지루했다. 좀도 쑤셨고. 사실은 내 모습에 스스로 지루해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게다. 이쁜 (매우 이쁜!) 이 한국인 처자에게 잘 보이려고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하려 애쓰다 보니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된 모양. 그게 스스로 꼴보기 싫었다.


"우리 못다 한 이야기는 이따가 하는 게 어때요?"


"그럴까요? 이따가 저녁에 맥주 마시러 놀러 오세요! 여기 한국 사람들 많고 좋아요"


이렇게 대충 마무리하고 게스트 하우스를 나섰다. 이날 저녁에 결국 이 게스트하우스에는 가지 않았다. 귀찮은 것도 있었겠지만 떼지어 앉은 무리속에서 무척 즐거운 듯이 과장되게 촐랑대는 내 모습을 보기도 싫었거니와 어디 갔냐느니 어디가 좋다느니 무엇이 맛있었으니 하는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건 상상만으로 피곤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그 피곤함은 이쁜 한국 여자 두 명만으로는 극복이 안 된다. ㅎㅎㅎ


▲ 라오스는 전통적인 불교 국가



▲ 스님들이 영어 공부하는 칠판




▲ 메콩강의 지류인 남칸강. 메콩과는 달리 물빛이 맑고 수심이 얕아 물놀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 남칸강을 건너 계속 걷다 보면 여행자들은 거의 볼 수 없는 현지인 마을이 나온다. 숯불에 구워진 꼬치는 어딜 가든 기본빵은 한다.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ㅎㅎ



숙소에 돌아와 대충 씻고 푸시 마운틴에 올랐다. 오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 포기하려 했는데 오늘 안 가면 아예 안 갈 것 같아서 없는 근성 쥐어짜며 올라갔다. 루앙프라방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는데 과연...?


정상에는 사람 반 카메라 반.

카메라에 풍경 담는 것엔 취미도 없고 젬병이라 고개만 돌려가며 눈으로만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황토색 메콩강과 연둣빛 숲의 조화가 눈에 편안했다. 그대로 마을에 엎어져 내 사지를 마을 곳곳에 용해시켜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별생각 없이 올랐지만 루앙프라방의 풍광이 내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저 연둣빛에, 피할 수도 어쩔 수도 없는 장차의 내 소멸을 녹여버리고 싶은...


마음속에만 담기에 아쉬워 루앙프라방 전경을 한 방 담으려는데 렌즈에 계속 걸리적거리는 한 사람이 있다. 젊은 중국 여자였는데 바위 위에 앉아 계속 포즈를 취했다. 어떤 각도로 카메라를 들이대도 그년이 사진 속에 등장했다. 나뿐만 아니라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열 받은 듯 보였다. 그런데, 아무도 이 여자를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난 평소에 이런 일에 참견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뻑큐!! 겟어웨이!! 는 일단 목구멍에만 담아두고 좋은 말로 살살 말하니 조금 삐죽하고 물러선다. 중국 여자가 물러서니 이젠 한 서양 꼬마가 그 자리를 냉큼 차지하더니 원숭이처럼 재롱을 피우며 엄마 아빠에게 자기를 찍어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에혀... 포기.

이 날에 대한 여행기를 쓴 세계 각지의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이 중국년과 서양 꼬꼬마색히 이야기를 썼을 것이라고 감히 장담한다. 간신히 피해 가며 찍은 사진 몇 장을 품고 허겁지겁 내려왔다.


▲ 푸시산은 산이라기보다는 작은 동산에 가깝다. 저런 계단으로 10분만 올라가면 바로 정상.





▲ 루앙프라방 전경





▲ 메콩!! 이젠 좀 친해보자꾸나~~













▲ 다시 가고 싶은 루앙




산에서 내려와 야시장을 어슬렁거리다가 비어 라오와 바게뜨 샌드위치를 먹었다. 따가운 햇볕을 받아가며 먹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고립되고 쓸쓸한 맛이 났다. 역시 저녁엔 뜨뜻한 국물이 있는 라면이나 국수지.

김미연에게 전화를 할까...라에게 전화를 걸까...BC에 가서 놀까.. 하다가 이도 저도 귀찮았고 취기도 많이 올라 그냥 누워버렸다. 9시쯤에 김미연에게서 잘 자라는 문자가 온다. 흐음.. 오롯한 기분 이어야 할지 난감한 기분 이어야 할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겠다..


잠들기 전 무언가 꽉 붙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잠드니 깨지도 않고 내내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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