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당포 주인을 죽인 다음 날 아침, 라스콜리니코프가 눈을 떴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신의 무의식에 가장 근접할 수 있는 시간, 즉 의식의 반수면상태가 되는 이른 아침에 느끼는 감정이야말로 행복의 척도를 가늠하는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프 청년이야 지은 죄가 있으니 죄책감, 착란, 변명, 투쟁심, 아집, 막다른 논리가 뒤엉킨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침을 맞겠지.
어떤 죄책감이나 (꼭 구체적인 죄를 지어야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불행하다고 느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회한, 망상, 착란 없이 또렷하게 아침이 선사한 현실을 바라보고 맞아줄 준비가 되어있을 때 그 사람은 행복한 하루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난 여행지에서 맞는 아침이 좋다. 행복하게 눈이 떠진다. 아니, 눈이 떠졌을 때 행복하다고 하는 편이 정확한 말이겠다. 눈이 떠졌을 때 제일 먼저 보이는 벽지의 색깔들과 첫 들숨에 훅하고 들어오는 눅눅한 담요 냄새와 목이 말라 급하게 들이키는 생수 한 모금. 이 모든 것이 즉각적이고 명징한 현실의 단편들인텐데, 그 안에 유머도 있고 슬픔도 있다. 참 좋다.
라오스 4일째. 12월 31일이다.
이 숙소는 아침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앞마당에 바나나며 말린 과일, 차 등을 구비해 놓고 알아서 각자 먹도록 한다. 바나나와 땅콩만으론 성이 찰 리가 없다. 그득하게 배를 채우고 싶어 골목 초입에 있는 조마 베이커리로 갔다. 조마 베이커리는 여행자 거리의 중심이자 자랑거리. 빵 맛 좋고 분위기 좋고. 이곳에서 아침마다 여행일지를 정리한다. 추천 음식은 바게뜨 샌드위치 & 밀크셰이크. 열흘 남짓한 체류기간동안 이곳의 모든 빵을 거의 다 먹어봤으니 내 추천은 믿을만하다. 꽤 이른 아침인데도 바지런한 여행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옆 테이블에서 한국인 여햏자(여자 여행자) 2명이 수다를 떤다.
"야! 그 년이 죽일 년이지. 어쩌구 저쩌구..."
"근데 왜 쓸데없이 다른 년은 껴가지고 어쩌구 저쩌구..."
"니 년은 왜 그 년을 다른 년하고 엮이게 해서 어쩌구 저쩌구..."
다 듣지는 못했지만 여행 와서 만난 한국인 여햏자들 간의 트러블 쓰나미가 주요 줄거리. 아! 나도 저 뒷담화에 끼고 싶다. 걸쭉하게 장단도 맞춰 줄 수 있었을 텐데.. 죽일 년! 씨앙년! 해 가면서.
이런 한심한 생각까지 할 정도였으니 어지간히 심심했나부다.
문득 빠이에 있는 친구들 생각이 났다.
-숙, 미, 엘, 댄, 폴.
나까지 포함해 우리 6명은 홀로 여행을 다니다 치앙마이에서 만났다. 죽이 잘 맞기보다는 박자가 잘 맞았던 우린 각자의 여행이 끝날 때까지 별다른 트러블 없이 웃고 즐기다가 쿨하게 헤어졌다.
여행을 마치고 난 뒤 돌아보니 우리가 잘 지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그 사람이 어딜 가고 뭘 하든 내버려 뒀던 것. 무엇보다 우린 각자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했다. 둘째, 함께 있을 때는 하나라도 더 양보하고 배려해 준 것.
격하게 아낀다 친구들아!! 생각난 김에 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심해! 왜 일루 안 와?"
"형!! 새해 지나고 갈께요"
"빠이 좋아?"
"좋아요"
"나보다?"
"끊어요!!"
그들은 빠이에서 한참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며 놀고 있는 중. 훗날 빠이에 대해 물으니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는 폴은 빠이가 그저 그랬다고 했고, 짱 박히기 좋아하는 댄은 너무너무너무 좋았다고 했다. 둘의 이야기만으로도 빠이의 분위기가 대강 짐작이 갔다.
아무 생각 없이 김미연이 있던 시장을 향해 걷다가 갑자기 멈춰 돌아섰다. 생각해보면 가서 씩씩하게 들어가서 싹싹하게 인사하고 커피 한 잔 마시며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며 안면도 트고 우정도 쌓으면 되는 것인데 뭘 그리 놀래서 가던 길을 멈췄는지.. 혹시 내가 밀당을 하고 있거나 (본능적으로??) 김미연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건가? (김미연이 어제 보낸 문자의 뉘앙스가 조금 '그랬다'..) 김미연은 전혀 내 취향도 아니고 우린 만난 지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인데.. 뭐지? 라오스의 강렬한 태양볕을 너무 많이 쬐다보면 망상도 심해지고 머리가 조금 이상해지기도 하는 법이니까, 하하. 어쨌든 오늘은 발길을 돌려 남칸강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침의 남칸강변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고즈넉하니, 호젓하게 산책하기에 좋아 보이네...
다리를 건너 마을로 가려던 계획을 수정하고 강변길을 따라 걸어보기로 한다.
▲ 동자스님과 마주친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강 옆을 따라 걸었다.
1분 정도 걸었나..
악!! 은근 빡쎄다. 그리고 무섭다. 백사장이 거의 없어 경사진 바윗길을 따라 걸어야 했는데 보기보다 경사가 급하고 이끼가 낀 바위 표면은 미끄러웠다. 게다가 난 쪼리를 신고 있어 중심잡기가 쉽지 않았다. 당구 치면서 단련된 엄지발가락의 힘으로 겨우 버텼다.
어이쿠, 산책이 아니라 등반이네..
호젓함은 이제 물 건너 감 셈. 어디를 밟아야 미끄러지지 않을지 발 밑만 살펴가며 걸어야 했다. 긴장감에 온 몸에 털이 곤두섰다. 그렇다고 강변길 위로 갈 수는 없었다. 강변 위쪽은 검은 입을 벌리고 기괴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어두운 숲.
숲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야시장에서 본 코브라 담금주가 생각났다. 그 놈들이 대가리 바짝 세우고 기다릴 숲으로는 절대 갈 수 없었다. 내 주머니엔 피리도 없고.
결국 씨봉, 몇 번 미끄러져 넘어졌다. 손바닥과 발목 주위에 생채기가 났다. 피를 보게 되니 심박수가 더 커졌다. 혹여 크게 자빠지기라도 한다면 머리 - 눈알 - 고추 순서로 소중한 내 몸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첫 설악산 암벽등반 때의 일화가 생각났다.
수차례 추락하며 온 몸에 피칠갑을 한 채 하산한 나를 보고 한 등산 선배가 한 마디 했다.
"넌 혼자 청계산 다녀왔냐?"
그즈음, 한화 회장 김승연이 지 아들 건드린 놈들에게 아구를 돌렸던 사건이 있었다. 어디 가서 흠씬 두들겨 맞았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캐불쌍한 몰골을 보면 그런 생각도 당연했다. 이후로 암벽 근처도 안 갔다. 근성 제로.
하지만, 오늘 바위길은, 피는 좀 봤지만 적당한 긴장감도 생겨나고 점점 재미졌다. 여유가 생기니 입에서 노래도 흘러나왔고.
다만 몇 차례 난감한 코스를 만났을 때는 차라리 남칸강물에 뛰어들어 수영으로 우회해서 가면 어떨까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어찌어찌 걷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땡볕에 걷는 것도 지쳐 마을로 연결되는 사잇길을 따라 올랐다. 수많은 평행우주 중 어딘가에는 분명 미끄러운 바윗길로 가기 싫어 헤엄쳐서 가고 있는 내가 있을 텐데 상상만으로도 바보 찐따 같고 우스웠다.
▲ 아침의 남칸강
▲ 보기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무시무시한 길이다.
▲ 강변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 개구리 소년 혹은 남칸강 헌터
▲ 완벽한 위장술이었지만 30초 후엔 비극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고. 후...알 수 없는 인생.
좁은 길을 따라 강둑 위로 올라선 곳엔 공터가 하나 있었고 그곳에선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공사현장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일하는 모습을 보며 실실 쪼개고 있는데 한 젊은 놈이 쳐다보지만 말고 뭐라도 나르라고 소리치며 손짓을 한다. 뿌리 깊은 노예근성에 젖어있는 나, 재빨리 배낭을 던져놓고 짚단을 하나 집어 드니 다들 껄껄 웃는다. 내가 짚단을 들자마자 런치타임을 선언하는 대빵.
옹기종기 모여 새참을 준비한다. 당연하다는 듯이 딱 3초 동안만 일했던 나도 껴준다. 우선 시원하게 얼음을 재운 비어라오 한 잔을 건네받았다. 꿀떡꿀떡 잘 넘어갔다. 무서운 강변길과 사투를 벌이느냐 목이 탔기 때문이다. 쫘악 들이키고 잔을 비우니 또 채워준다. 얼음 탄 비어라오는 황홀경.
맥주 몇 잔에 머리가 맑아지고 열이 식었다. 맥주와 함께 먹은 점심 메뉴는 찰밥과 생선찜. 찰밥을 꼬마 주먹밥만 하게 뭉쳐 생선찜에 찍어 먹었는데 찍는 과정에서 국물과 생선 살점이 밥에 묻어왔다. 나도 따라서 손으로 몇 번 먹었는데 간을 거의 하지 않은 생선찜이 입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매운 고추와 함께 먹으니 희미한 비린내와 고소함이 입안에 맴도는 게 시골 할머니들이 말하는 물고기의 얕은 맛이 느껴졌다. 그렇게 느끼고 있는 내 모습이 흥미로워 몇 점 더 찍어먹었다. 전통과 자존심이 강하게 느껴지는 맛이었다.
맥주를 마시다 보니 자연스레 공사장의 젊은 청년 3명과 어울리게 되었다. 나에게 쿨하게 일 시킨 남자 놈은 툰. 그리고 툰의 여사친인 티나와 노이. 툰은 대빵 아저씨의 친척이었는데 친구들을 불러 대빵 아저씨네 식당 공사하는 일을 돕고 있던 중이었다. 유리잔에 넣은 얼음 세 개 위로 쏟아지는 비어라오의 황홀한 노란 물줄기와 우연히 만난 친절한 사람들. 얏호!! 기분 좋게 취해 간다.
▲ 툰.
▲ 티나.
▲ 노이.
▲ 대빵. 세렝게티 초원을 누비는 숫사자 같은 포스가 느껴졌다.
▲ 숫사자를 컨트롤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을 가진 분.
▲ 대빵 아저씨의 동생. 붙임성도 좋고 잘 웃었다.
▲▼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누군가의 딸. 어느 분의 따님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미안.
▲ 햇살을 살짝 피해 마련된 점심 테이블. 세상 젤 시원한 곳.
한참 마셔대다 보니 술이 동났다. 내가 사야 될 것 같은 분위기. 대빵 여동생분께 6만 5천 낍 정도 드렸다. 우리 돈으로 8~9000원 정도? 그거면 된다길래 한 댓 병 사 올 줄 알았는데 대박 짱짱!! 한 짝을 사와버렸다. 거기다가 얼음도 한 통! 입이 쩍 벌어졌다. 오늘 노났다. 그렇게 한참을 마시다 어른들은 가고 툰, 노이, 티나만 남아 계속 술파티. 오늘 공사는 이대로 시마이 치려나?.. 혹시 나 때문에? 이거 민폐 아닌가?.. 싶다가도 이 친구들을, 이 시간을 그냥 놓고 싶지 않아 그대로 눌러앉아 버렸다.
툰은 23살. 티나와 노이는 21살. 툰은 태국에 몇 번 오가며 잡다한 일을 했다고 하고 한국에도 한 번 왔다고 한다. 연예인 생활을 했다고도 하는데 그게 진짜 연예인을 말하는 건지, 연예계 관련 종사자를 뜻하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확실한 것은 이 놈이, 잘 생긴 데다 똘똘하다는 것. 영어로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필요한 설명을 해 준다.
티나와 노이는 루앙프라방에 있는 사판누어 여대를 다닌다. 여대생? 내게 별 의미 없는 말이었지만 그냥 한 번 속으로 히죽 웃었다. 헤헤.
장난기 많은 툰이 자꾸 티나와 나를 엮으려 한다. 티나도 나도 싫지 않은 (척???) 표정으로 즐겁게 받아주니 우리 둘이 커플 되는 분위기가 형성. 취하는 와중에 그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간다. 역시 세계 어딜 가나 젊은이들의 관심사는 연애, 이성일 수밖에 없다. 물론 장난기 다분한 일종의 연극? 역할극? 정도였지만 술자리의 분위기를 이어가는 데는 큰 일조를 한 셈이다. 이렇게 티나와 백년가약을 맺기로 하고 또 한 잔.
얼큰하게 취해가니 모든 게 평화롭다. 또한 사람들이 나를 이쁘게 봐주니 온 몸이 뜨뜻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4개월간의 이번 여행에서 특히 그랬는데, 현지인이건 같은 여행자건 나를 좋게 봐주는 이들을 많이 만났다. 내가 인생의 어떤 고점에 올라선 얼굴을 하고 있어 호감을 불러 있으켰거나 나의 시그니처인 캐불쌍한 몰골이 동정심을 유발했거나. 어찌되었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봐주니 그게 고맙다. 사실은 내 안에 킹코브라 열 마리가 또아리 틀고 있는데도 말이다.
야~~ 행복? 파랑새? 그까이것 메콩강변에 널려 있다아!
맥주 한 짝도 어느새 동이 났다. 티나와 노이는 일이 있어 먼저 가고 남아 있는 툰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에 다시 놀러 오기로 하고 숙소로 컴백. 완전 취했다. 헤롱 대며 다리를 건너 메콩강변을 따라 걸었다. 걷다 보니 미용실이 있어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다. 미용실 안에는 꽤 많은 미용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손님은 고작 서양 남자 한 명. 무슨 생각이 들어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리에 앉아 노랑머리로 염색!을 외쳤다. 원래도 갈색끼가 도는 머리색이 더 노래졌다. 노래지니 얼굴이 더 부~~해보인다. 빈티 나게 부우~해져버린 얼굴.. 거울을 수없이 쳐다봐도 영락없는 실패. 빠져 죽고 싶어 메콩강을 쳐다봤는데 강물 색이 똥색이라 용기가 안 났다.
머리를 감겨주던 수습 미용사 언니와 재미난 이야기를 나눴다. 뜬금없이 자기는 결혼하고 싶어 죽겠다고 하며 신랑은 나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 생김새가 마음에 들어 그런 거라고 믿어버렸다. 믿음에서 소망 나고 사랑 나니까.
대화가 재밌어서 아침에 급조해 낸 라오스-코리아 친목의 밤 이야기를 꺼냈다. 니캉 내캉 친구들 모두 모아 파티하자고. 이 언니, 처음에는 씬나서 오케이라고 말은 하는데 점점 말꼬리에 힘이 없어진다. 어느새 우리 이야기에 끼어든 주위 다른 미용사 언니들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하면서. 그래서, 농담선에서 끝내기로 하고 계산을 하고 나왔다. 커트 비용에 비해 염색 비용은 넘 비쌌다.
취기가 사라지자 강물을 바라보고 싶어 강변가에 야외테이블을 차려 놓은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커피랑 아이스크림을 얹은 브라우니를 시켰는데 그 자체로 달콤한 인생. 커피&브라우니에 맞는 눈빛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크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었지만 나를 봐주는 것은 메콩강뿐. 다시 눈에 힘을 풀고 망연히 강물만 바라보았다. 꽤 오랜 시간 앉아 있었는데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여행일지에 적혀 있지도 않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앉았던 자리, 마셨던 커피맛만 희미하게 기억할 뿐이다. 그것만으로 추억은 족하다.
숙소에 돌아와 늦은 낮잠을 잤다. 낮과 밤의 구분이 없었던 방콕에선 일주일 동안의 수면시간을 모두 합쳐도 10시간이나 되었을까 싶은데 이 곳에선 낮잠을 포함하면 하루에 10시간도 더 자는 것 같다. 일어나 보니 벌써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파티를 위한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출동. 올해 마지막 날이니 대차게 놀아야지!
사람이란 참 이상하다.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길을 나섰건만 점점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다. 무겁고 쓸쓸해지는 기분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아무 이유 없이. 감정이 엄습한다기보다는 내가 일부러 쓸쓸한 감정을 느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숙소에서 툰이 있던 곳까지는 걸어서 30분. 30분도 안 되어 이런 급격한 감정의 변화라니.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나란 놈이 이상한 종자일 것이다. 기분이 바뀌자 발길을 돌릴까도 했는데 약속도 약속이고 기대하는 마음도 남아 있어 그냥 갔다.
툰과 처음 보는 한 청년이 모닥불을 피우고 밥을 먹고 있었다. 청년은 툰의 친구 노. 여긴 다들 이름이 짧아 외우기 좋다. 시크한 툰에 비해 노는 친절하고 떠들썩한 남자였다. 난 툰보다는 노 같은 사람들과 더 잘 맞는다. 통성명을 한 뒤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시니 금방 친해진다.
툰과 노는 이곳에서 밤샘을 한다고 한다. 도둑들이 건축자재를 훔쳐갈 수도 있기 때문. 파티를 기대하고 온 나는 조금 맥빠지긴 했다. 그래도 새로운 친구 노를 만나게 되어 기뻤다. 평소 같았으면 난장 까고 밤새 재미나게 퍼마셨겠지만 오늘 밤은 혼자 있고 싶은 생각이 들어 두어 시간 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간다고 하니 미안해하는 툰과 노. 아마도 기대했던 씬나는 곳으로 데려가지 못해서 그런가 싶었다.
얌마! 니들과 함께면 충분히 즐겁다!!
내일 다시 만나서 놀자고 제의하는 툰. 당근 오케이지.
노가 오토바이로 숙소까지 태워다 줬다. 껌껌한 밤에 인적 없는 강변길 (수풀이 우거져 좀 무섭다.) 을 되돌아갈 생각을 하니 짜증나고 무서웠는데 노의 친절과 배려가 새삼 고마웠다. 노의 허리를 꼬옥 껴안으려다 말았다. ㅎㅎ 이건 농담. 암튼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노의 등짝이 듬직했다. 노가 숙소에 내려주며 원하면 오늘 밤 어디 가서 놀자고 했는데 혼자 있을 툰도 생각나고 무엇보다 내가 내키지 않아 사양했다. 오토바이를 간지 나게 타고 가는 노. 내일도 너의 등짝을 보리라.
숙소에 들어가려다가 발길을 돌려 나이트마켓으로 가본다. 새해맞이에 들떠있는 왁자지껄한 분위기. 나의 새해맞이는 비어라오 한 병이면 충분할 것 같아 한 병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앞마당에는 젊은 라오스 청년 십여 명이 화로 같은데 고기를 구우며 파티 중이었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같이 먹자고 한다. 친절함이 고마웠지만 사양하고 방에 들어가 어둠 속에서 맥주를 마시다 보니 폭죽 소리와 환호성이 들렸다.
졸음을 겨우 참고 일지에 소원을 적었다.
'새로운 만남과 이별을 기다린다'
되돌아보면 소름 돋고 찢어발기고 싶은 멜랑꼴리 흑역사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때 그랬다면 그런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