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날 "한 살 더 머꼬?!"

by 블랙베어

2011-2012 유에파 챔피언스 리그 챔피언은 첼시였다. 털 색깔도 바래진 늙은 개들의 마지막 발악이었는데, 그게 통했다! 극적인 우승이라는 결과보다는 찬란한 영광을 가슴 한켠에 새기고 떠나는 영웅들의 쓸쓸한 퇴장에 더 감동했다. 승리했지만 이제 그만 역사 속으로 퇴장해야 한다고, 그렇게 세월이 말하더군.


'늙은 개를 무시하면 안 된다'라는 구절이 들어있는 시를 읽은 적이 있다. 감성 충만한 어느 수의사가 쓴 시는 아니고 꽤 명망 있는 시인이 쓴 시였는데 마음을 움직였다.


내 생각은 이렇다. 젊은이는 상대방이 자기에게 위해를 가하더라도 자기 정강이뼈를 뽑아 상대를 후려치지는 못한다. 젊은이는 목숨을 걸면 걸었지, 자기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는 짓은 절대 못 한다. 젊을 때는 목숨보다 일상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늙은이는 어떤가? 이미 도가니에는 연골이 다 빠져 너덜너덜해지고 기력이 쇠해 서서 걸으나 앉아서 기나 매한가지. 사정이 그러하니 최후의 일격으로 '너 죽고 나 병신 되자'란 심정으로 자기 정강이뼈를 뽑아 상대를 후려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팔힘이 빠져 빗맞을 수는 있겠지만. 고로 늙은이의 반격에는 절박함에 그로테스크까지 더해져 맞던지 피하던지 모두 끔찍해진다. 고로 늙은이를 무시하면 안 된다.

시에 대한 나의 해석. 옆길로 또 샜군.


하여간 늙음에 일 년씩 바짝 다가감을 느끼게 되는 날, 1월 1일을 이곳 루앙프라방에서 맞았다. 이날엔 남은 사진 한 장 없고 여행일지에도 간략하게 행적과 생각을 적은 단어 몇 개만 있을 뿐이다. 신기한 것은 그 몇 가지 키워드만 보더라도 이날의 행적과 느낌아 잘 떠오른다는 것이다. 좌향좌 우향우는 못해도 기억력은 좋은 것 같다. 사진 한 장 없이 키워드만을 좇아 여행기를 써 본다.


라오스 여행 5일 차.



"강변 산책과 라면의 맛"


외로움을 찾아 숙소에 처박혀 새해를 맞이했다. 일어나 보니 젠~장! 입속만 바싹 말라 있다. 살면서 철저히 외롭고 싶어서 동굴로 기어들어갈 때가 있었는데, 늘 머쓱함은 외로움보다 앞섰다. 동굴 속에서 나왔을 때면 우주를 삼킬 것 같던 고독이나 불안도 탕수육 궁물 한 숟갈보다 못한 시시함이더라..


해서, 물 한 잔 들이키고 무작정 걸었다. 메콩강변을 따라 1시간가량 어슬렁댔는데 인터넷에서 봤던 한국 음식점 생각이 나서 그리로 찾아갔다. 새해 첫날이니 무슨 이벤트라도 있겠지라는 기대를 품고. 가게 이름은 '빅트리'. 사장은 한국인 여자였고 사진작가인 남편도 식당일을 돕는 것 같았다. 음식점이라기보다는 카페에 가까운 내부장식과 분위기. 남편이 찍은 사진 몇 점을 가게 안에 전시했는데 다소 하품 나오는 사진들. 하지만, 인테리어는 주변 어느 카페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주인장도 친절하고 인테리어도 마음에 들어 눈도장을 찍어뒀는데 결국 이 곳에서 며칠 뒤 라오스-코리아 친목의 밤을 열게 된다.


메뉴를 살펴봤는데 정통 한식보다는 라면이 땡겨 주문했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이틀 전 BC게하에서 먹던 라면과는 차원이 다른 맛. 라면 한 젓가락 먹고 주먹을 들어 탁자를 쾅 내려치고 싶었다. 기분이 좋아서. 웬 폭력성인가 싶었지만 괜히 그러고 싶었다. 간밤의 꿀꿀한 기분 다 좆까라 그래! ㅎㅎ


기분이 좋아진 나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약속을 어긴 툰"


백년가약 맺은 티나에게 먼저 한 통,,,긴 신호음, 결국 불통.


시장언니 김미연에게 했더니, 받는다. 지금 집이라길래 일 안 나가냐고 하니까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아차! 오늘은 새해 첫날이구나. 어제 늦게까지 파티했다고 말하는 그녀.


흠...파티라? 즐거웠겠네? 신났겠네?


파티로 즐거운 밤을 보냈다는 말에 괜한 심술이 일었다. 당장 나오라고 말하니 길게 한숨을 내쉰다. 술병이 단단히 난 상태인가 보다. 그 술병 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 ㅋㅋ. 그러더니 오늘 저녁에 보자고 말하는 김미연. 됐구, 다음!


빠이에 있는 폴에게 전화거니 불통. 자고 있었다고 나중에야 연락이 온다.


다음은 툰... 기대 없이 걸었는데 웬걸! 받자마자 함께 놀자고 한다! 어제 만났던 친구 노와 함께. 온갖 아양과 찬사를 바치며 툰에게 찰싹 붙었다. 툰은 오늘 언제든지 어제 만났던 곳으로 오라고 한다.


오늘은 툰, 노와 함께 성난 하마들처럼 날뛰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단 숙소에 귀환했다. 숙소에는 새로초롬한 표정의 라가 있었다. 라도 어제 친구들이랑 숙소 앞마당에서 놀았다는데 술병 증세 중 하나가 새침함인가 싶었다.


숙소를 옮기기 위해 짐을 싸서 체크아웃하니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라에게는 내가 오랫동안 루앙프라방에 머문다고 했는데, 벌써 숙소를 옮긴다고 하니 그게 조금 서운했지 싶다. 평소 같았으면 다른 곳도 경험해보고 싶다느니, 친구들이 이미 예약해버렸다느니, 숙소는 이 곳이 제일 좋다느니 하며 에둘러쳤을 텐데, 오늘은 손가락으로 골목 끝을 가리키며 "쩌어기~~ 있는 뉴다라펫 빌라로 간다!" 라고 말해버렸다. 새침하게 있던 라가 살짝 흥분하더니 저기는 비싸니 어쩌니 궁시렁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라와 약속한 미팅 계획은 성사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흘러갈 것은 흘러가게 냅두자. 섭섭함과 아쉬움이 남았지만 라와 작별하고 뉴다라펫 빌라로 입성. 역시나 비쌌다. 하지만, 마음에 쏙 든다. 여행을 시작한 후 두 달 동안 늘 제일 싼 곳만 찾아다녔는데 이곳에선 비싸고 좋은 곳에서 묵고 싶었다.


푹신한 침대에 잠시 몸을 던졌다가 목욕재개하고 자전거를 빌려 타고 툰에게 갔다.


그런데, 어라? 툰이 보이지 않는다. 대빵 아저씨와 아저씨 여동생 가족들만 모여 있다. 물어보니 툰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고 여기 없다는 것. 에이~ 설마! 나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놀래킬려고 하나? 요런 생각을 하며 실실 웃고 있는데 반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투~운!!"


"여기 꽝시 폭포야! 가족들이랑 놀러왔당"


야 이 호랑말코 같은 놈아! 오늘 언제든지 놀러 오라며?!


한국말도 꽤 잘 아는 툰에게 우리말로 된 욕은 차마 못하겠고, 알겠다고 한 숨 한번 쉬고 통화 종료.


전화를 끊고 화를 삭여 본다. 땡볕 받아가며 열 내면 나만 손해. 이럴 땐 상대방의 입장을 차근차근 생각하며 머릿속으로나마 상대방을 변호해 주어야 한다.


- 오늘은 새해 첫날.

- 이곳에서 가족들과 살아가는 툰에게는 가족들과 함께 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 혹은 싫어도 함께해야 하는 날.

- 나는 일개 여행자. 게다가 툰과는 어제 우연히 만난 사이. 친밀감의 '친'자도 꺼내기 힘든 관계.

- 게다가 어찌 보면 나만 혼자 중요하게 생각했던 약속. 즉 우리 둘만의 느슨한 약속일뿐.

- 오! 단박에 정리 끝.


암튼 이왕 갔으니 대빵 아저씨 가족들과 노닥대려고 자리를 깔고 앉았다. 바로 비어라오 한 잔 따라주는 가족들. 이 가족, 술 인심 하나만은 기가 막혔다.




"꼬꼬마들에게 캐발리다"


자전거를 타고 훌훌 돌아다녔다. 루앙프라방은 그리 큰 도시는 아니라 자전거만 있으면 웬만한 곳은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당구장이 보여 다리도 쉴 겸 구경하러 들어갔다. 당구대 하나에 청소년들 여럿이 모여 갠뻬이를 치고 있길래 유심히 쳐다보니 은근 나에게 적의를 드러낸다. 확실히 여행자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현지인 마을의 분위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기본적인 영어 한 마디 못 하는 것도 다른 점 중의 하나. 플레이? 굿? 정도의 기본적인 단어만 몇 개 던졌는데도 계속 갸우뚱 혹은 으르렁. 라오스 말로 뭐라 뭐라 하는데 좋은 말 같지는 않다. 시비 거는 듯한 분위기도 형성되고. 까딱하다간 큐대 든 성난 승냥이들과 혼자 맞설 판이다. 하기사 저들은 한참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을 테니 내가 물러서야지.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꼬꼬마들을 발견. 난 어디로 여행 가든 축구하는 모습만 보면 만사 제쳐두고 껴달라고 조른다. 아이들은 순순히 나를 껴준다. 새로 팀을 만들기로 했다. 난 제일 어린 꼬마 5명만 뽑아서 팀을 만들겠다고 하니 상대팀에서 덩치 큰 놈 2명을 보내준다.

짜식들아.. 나 사실은..메시야.. 니들 후회할텐데..


...


안 되는 날은 뭘 해도 안 된다.

시작한 지 10분 정도 지났나.. 점수를 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우리 팀 멸망. 상대팀 놈들, 어찌나 족제비들처럼 빠르던지 도저히 못 따라가겠다. 난 강아지처럼 공만 쫓아다니며 중심도 못 잡고 미끄러지며 탈춤만 춰 댔다. 굴욕은 계속되고 우리 팀원들은 이미 의욕상실. 운동장에 토를 하든 똥을 싸던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그만두고 싶은 심정. 그나마 상대팀에서 건네 준 덩치 큰 두 놈 덕분에 간신히 영패는 면했다.


경기 후 대장격인 놈과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라오스에 관한 이야기부터 자신에 관한 이야기까지 막힘 없이 술술 이야기하는데 그 똘똘함과 당당함이 위압적으로 느껴질 정도. 짜식, 그릇의 크기가 남다르군.


콜라와 환타 몇 병을 사서 갖다주니 안 받겠단다. 코리아에서는 어덜트가 주면 차일드는 받아야한다고 하니 그제서야 받는 녀석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였지만, 민망함과 미안함을 줄여 줄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였다.


자기들은 거의 같은 시간에 볼을 찬다고 또 오라고 하는데... 조까! 니들하곤 안해!

이 운동장엔 늙은 개가 낄 자리는 없었다.



"17세 포이의 서투른 마사지"


숙소에 돌아오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성난 하마처럼 놀지는 못했으니 배고픈 하마처럼 먹기는 해야겠다. 저녁은 역시나 나이트 마켓의 만낍뷔페. 소화도 시킬 겸 산보 좀 하다 숙소에 돌아왔다. 이대로 오늘 하루는 끝나나.. 했는데 게스트하우스 내 마사지 샵이 눈에 띄었다. 오늘, 자전거와 축구(탈춤?)로 몸이 축났는데 마사지는 좋은 선택일 것 같아 과감히 1시간 30분짜리 풀코스 선택. 마사지사는 17살 소녀 포이.


피로가 가장 많이 쌓인 발부터 먼저 시작해주길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따라오라고 하며 빈 방으로 안내한다. 그러더니 샤워부터 하라고 수건을 건네준다.


포이야....


난 마사지를 원한 것이지 마싸이를 원한 것은 아니란다.


여기서 잠깐! 케니베어 여행사전(출간예정)을 살펴보고 가겠다.

마사지 - 인간의 몸 구석구석을 지압으로 눌러가며 근육의 피로를 푸는 행위.

마싸이 - 인간의 특정한 몸의 부위를 다양한 방법으로 놀려대며 피로를 더하는 행위.


수건을 받아 들고 당황하여 우물쭈물하다가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다 갖춰 입고 나와 앉아있는데 팬티만 빼고 나머지는 다 벗으라고 한다. 물론 태국에서도 아로마 마사지를 받을 때 망사팬티만 받고 받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방 안 야릇한 아로마 향과 낮은 조도의 붉은 조명을 보니 조금 걱정되기도...


에라..모르겠다. 하고 팬티만 입고 누워버렸다. 혹시 마싸이 동작이 들어가면 어떻게 태클을 걸까 궁리하고 있는데 걱정과는 달리 내내 등판만 주무르는 포이.


아..마사지구나..다행이네. 라고 편안히 마사지를 받을 태세로 돌입하는데...


해도해도 너무 못 한다. 못 하는 정도면 괜찮은데 포이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무지하게 따갑다. 손마디 끝에 적당한 압을 주어 근육을 살살 풀어줘야 하는데 이 서투른 초보는 그저 꼬집듯이 주물러대기만 하니 그녀의 손톱이 할켜버린 내 살갗은 따가웠고 꼬집힌 살덩이는 뻐근했다. 게다가 영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포기하고 그냥 받았다. 그나마 발로 등을 밟아줄 때 살짝 시원했을 뿐.


그러고 보니 새해 첫날부터 일진이 좋진 않았구나. 오늘 하루가 올해의 예고편인 것인가? 혹은 액땜이 될 것인가? 를 생각하다 보니 마사지는 어느새 끝.


<마사지 후기> 다음 날 거울에 비춰보니 상처가 여러 군데 났다. 포이의 손톱이 닿을 때마다 따끔거리는 느낌이 영 좋지 않았는데 이렇게 상처까지 날 줄이야.. 날이 더워서인지 상처가 잘 낫지 않았다.



마사지를 마치고 방으로 와 침대에 누워 내일부터는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주문을 걸었다. 반신반의하면서.


그런데, 내일부터 정말 좋은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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