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날 1/2 "여대생 기숙사"

by 블랙베어

한밤중에 목이 마르니 비어라오 한 병이 간절했다. 침대 머리맡에 생수가 있었으나 이걸로는 채울 수 없다. 오직 비어라오뿐.


로비에 내려가 한 병 구입해보기로 한다. 인근 가게보다 훨씬 비싸지만 이런 야심한 시간에 비어라오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숙소 로비뿐이다. 랩탑을 챙겨 들고 로비에 나와 비어라오를 마시며 여행일지를 쓰고 이메일을 확인했다.

혹시나 하고 들여다본 메일, 온라인 카페, 각종 포털 사이트. 그러면 그렇지.. 역시나 나의 부재로 인해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다. 여행자로서는 축복, 다 큰 남자로서는 불안 (혹은 불만).

이런 양가의 감정과 생각으로 잠시 입을 벌리고 맹하게 있었다. 내 모습이 재밌었는지 로비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뉴다라펫 신입 여직원이 말을 건넨다. 몇 마디 소소한 말들을 주고받는다. 온도를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는 그런 말들. 이 곳에서는 신입직원 교육을 위해 베테랑 직원 한 명을 붙여 야간 근무를 서게 하는데 오늘은 그녀가 당번. (며칠 있지도 않았는데 별 사정을 다 알게 되네..)

대화를 하고 있는 이 직원뿐만 아니라 이곳의 젊은 직원들은 진짜 다 예쁘다. 뉴다라펫 사장 놈은 필시 소도둑놈 같은 인상에 변태끼가 다분할 거라는 다소 질시 섞인 망상이 들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 식당으로 가는데 간밤의 그녀가 웃어주니 아침밥이 쑥쑥 잘 넘어갔다. 오늘 날씨 같은 한심한 이야기다.



라오스 여행 6일 차.


아침부터 자전거 렌털 샵 아저씨와 티격태격하니 기분이 꼴꼴하다. 어제 빌린 자전거 비용 때문이다. 어제 저녁, 반납하려고 갔더니 아저씨는 이미 칼퇴근. 뭥미? 할 수 없이 숙소로 가지고 와서 방문 앞에 묶어두고 노심초사 지켜보다가 오늘 아침 반납했는데 늦었다고 하루 비용을 더 내란다. 아저씨의 억지주장이라고 하기에는 반납 시간을 어긴 나의 불찰이 크긴 했다. 하지만, 이 아저씨, 까칠해도 너~~무 까칠. 평소 같았으면 귀찮아서라도 '리즈너블' 하고 혀 한 번 차며 대충 합의 보고 지불했겠지만 오늘은 걍 싸우고 싶다. 원기옥 끌어모아 여차하면 웃통 벗고 배라도 내밀며 싸우려고 하는 순간, 띠용띠용~~ 아침부터 걸려오는 전화소리에 전투력 급상실. 급방긋 모드로 "암소소리, 베리 리즈너블" 이라 말하며 하루 비용 내고 다시 자전거를 빌렸다. 예상치 않았던 티나로부터의 전화였다. 받자마자 새해 인사를 하는 그녀.

이 뇬이!! 새해가 밝은 지가 언젠데 해피 뉴이어야?..라고 내 입으로 말할 리는 없겠지.. 내가 누군데? 호갱인데! ㅎㅎ


"티나! 해피 뉴이어 & 해피 투게더, 포에버"


호갱이가 여자를 만나보니 그렇더라. 그녀가 그년으로 격하되기까지는 온갖 복잡다단한 속마음들의 이전투구와 소주 100병이 필요했지만, 그년이 그녀로 복귀하는 데는 그년의 전화 한 통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사는 게 좋냐구? ㅇㅇ


자전거를 하루 더 빌리게 된 것은 오후 1시에 자기네 대학으로 놀러 오라는 티나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런데, 통화 중에 '도미토리'라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 엉? 그럼 그냥 캠퍼스가 아닌 여대생 기숙사로 놀러 오라는 거? 정말? 여대생 기숙사는.. 에로스계의 양대 산맥 중 하나잖아. (다른 하나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다름 ㅎ)


뭐 사들고 가면 돼?.. 아, 건강한 몸만 챙겨가면 된다구? (농담!!!!)


특별히 배낭 속에 여벌의 티셔츠를 넣었다. 뜨거운 땡볕을 받으며 자전거를 타다 보면 땀이 많이 난다. 물론 땀은 수고와 노동의 상징. 하지만, 농활이라면 모를까 여긴 무조건 풋풋해야 하는 자리. 땀에 흠뻑 젖은 채 겨드랑이 가린 채로 신성한 초대 자리에 앉을 수는 없다. 난 옷의 날개라도 입지 못하면 바닥으로 추락한다.


어제와 다른 방향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시장언니 김미연과도 통화해보니 오늘은 가게에 나와있다고 한다.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놀러 오라고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그녀. 흠칫하며 물러설 정도로 그녀는 적극적이었다. 나중 일이지만 루앙을 떠날 때 김미연한테 절절한 문자를 받기도 했다. 우리에겐 시간과 만남, 고통이 필요하고... 사랑에 대한 준비와 다짐, 현 상황에 대한 분석, 남자란 족속에 대한 자신의 경계 등이 주 내용이었는데 방비앵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그걸 읽으면서 처음엔 푹! 하고 웃었다. 아무 스파크도 일어나지 않은 우리에게 사랑을 위한 시간은 대체 왜 필요하다는 건데? 왜?.. 내 처신의 문제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정말 그런가? 잘 모르겠다.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려 했으나 다시 문자를 보며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연결지어 곱씹으니 씁슬하고 부끄럽고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 감정의 종착지는 쓸쓸함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지도 못하는, 한 줄 의미도 새기지 못할, 잊혀질 촌극일 뿐.


어쨌든, 김미연에게 오후에 들른다고 하니 자기 친구도 소개시켜 준다고 한다. 이 친구 때문에 나중에 약간의 소동이 있게 된다.


독립기념탑을 지나 현지인 마을로 들어가 계속 자전거를 몰았다. 중심가에서 살짝만 벗어나도 여행자 거리와는 딴판인 열악한 가옥들과 생활환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옆 나라 베트남에 비해 확실히 경제활력은 떨어져 보였다. 캄보디아만 하더라도 지금 투자하면 5년 뒤에는 꽤 괜찮은 수익이 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라오스는 인접국가들에 비하면 발전할 만한 요인을 찾기가 어려웠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이고 뚜렷한 주력산업이 없어 투자유치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자본이 들어오더라도 투기목적의 토지구매나 기존 산업의 흡수 병합을 위한 투기성 자본이 날뛰기 좋은 환경이라 근본적인 산업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듯싶었다. 아직 규제도 심하고 산업의 근간을 일으킬 시스템도 구축되지 못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궁금해서 여기저기 인터넷을 뒤져보니 비록 인접국들에 비하면 더디지만 라오스도 해마다 의미 있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더라. 하... 이 나라에 쥐뿔도 모르는 내가 몇 개의 건물, 도로, 사람들의 인상만 보고 대충 머릿속에서 결론 내린 뇌내 망상이었던 것. 차라리 궁예의 관심법이 더 낫겠지 싶다.


경제는 전문가에게 맡겨 두고 나는 여대생 기숙사에 집중하자.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사판누어 여대를 찾기 시작했다.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 같은 길을 몇 번씩 돌며 헤매기를 수차례. 길을 물었을 때 모르면 모른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괜찮은데 모르면서 아는 척 가르쳐 주는 사람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특히 애새끼들은 더 무섭다. 설명하는 도중 조금이라도 눈동자가 흔들린다면 의심해봐야 한다. 사람들이 가르쳐 준대로 왔다 갔다 쌩쇼를 하다가 내가 묵는 숙소까지 오게 되었을 때의 허탈한 심정이란. 페달 밟을 의욕이 뚝 떨어졌다. 그러나, 에로스를 생각하며 다시 페달질. 어찌어찌 사판누어에 도착했다. 알고 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끌끌끌.


사판누어 대학 캠퍼스는 꽤 컸다. 학교 정문을 향해 시원하게 뻗은 길을 따라가다 보니 좋은 향기가 났다. 한 학생에게 기숙사를 물으니 방긋 웃으며 친절하게 방향을 가르쳐준다. 마침내 기숙사에 도착하니 티나와 친구들이 나무 그늘 아래의 평상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가만히 다가가니 그제야 알아보고 나를 향해 씨익 웃는다. 나도 한 번 웃고 시크하게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모델이 나만 아니었다면 빈폴 광고로 써도 손색이 없을 그런 낭만적인 장면? ㅎㅎ


내려서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려는데 초면이라 다소 어색. 나에게 친구들을 소개하긴 했는데 그다음 말이 안 나와 우물쭈물.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나라도 무언가 해야겠다 싶어 그녀들 옆으로 끼어들어 앉아 사진도 같이 찍고 숙제도 도와주며 친해지려고 안간힘을 썼다. 여학생들만 모여 있는 기숙사 앞 공간에 남자 혼자 있으니 삼삼하니 어지럽다. 다른 무리들이 우리를 힐끗힐끗 훔쳐보는 것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끌리면 와라... 마음속으로 외쳤으나 티나와 친구들에게 인사만 하고 지나갈 뿐, 자리에 끼려고 하진 않았다.

숙제도 도와가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처럼 자전거 탄 서양 남자 2명이 이곳을 기웃거린다. 티나 말로는 프랑스 사람들이라던데 오늘만 해도 몇 번씩 와서 기웃거린다고. 딱히 아는 사람을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이곳 학생들에게 말을 건네려고 하는데 반응이 신통치 않은지 어정쩡하게 웃고 가버린다. 서양놈들은 상황이 곤란하거나 물러서야 할 때 어정쩡하게 웃는 거, 참 잘한다.


세계 최초, 유일무이, 전무후무한 사판누어 여대 기숙사에 초대받은 유일한 남자 방문자는 나야 나!!






▲ 분홍색 옷을 입은 그녀의 이름은 빠위. 나중에 친목의 밤 멤버가 되었는데 인기가 좋았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고 말도 귀엽게 잘했다.






▲ 학교에서 보니 진짜 학생처럼 보였던 티나.




▲ 여대생 기숙사에 웬 수컷 곰 한 마리가 들어오니 신기해서 쳐다보는 무리들.




▲ 족구 비슷한 걸 하는 남학생들. 사판누어 대학은 여대가 아닌 공학이었나 싶다. (확실치는 않음)




기숙사를 구경시켜 달라고 하니 다들 깔깔대며 웃는다. 그녀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Yes도 깔깔, No도 깔깔. 난 그저 농담이라고 하며 캠퍼스를 한 번 둘러보겠다고 하면서 천천히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녔다. 우연히 기숙사 안도 잠깐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여기서 충격 한 방을 맞았다.


큰 방 하나에 사람이 겨우 걸어 다닐만한 작은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로 대략 30~50명분의 이층침대가 이어져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 방에서 생활하는 기숙사는 상상조차 못 해봤다. 게다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침대뿐이니 침대와 그 주변에 각자의 짐이 흐트러져 있어 지저분해 보이기도 했고 조명조차 어두워 마치 수용소 분위기를 느낄 정도. 같은 환경을 두고 사람마다 느끼는 체감의 정도는 다르기 때문에 내가 뭐라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 제대로 못 먹는 거, 노인들 잠자리 불편한 거, 여대생들 비좁게 생활하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다.


산책에서 돌아와 그녀들이 하는 숙제를 도왔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를 만드는 작업이었는데,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에 색칠하는 것이 전부였다. 대학생들 숙제 치고는 좀 단순해 보이기는 했다. 어려운 전공 책을 후벼 파고 최첨단의 연구에 몰두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조금 더 나은 교육적 환경이 주어지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긴 어려운 공부를 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나와 웃고 떠들면서 과제를 병행할 수는 없었겠지.


다들 졸업하고 멋진 선생님이 되길!!


다시 만나길 기약하며 일어났다. 조금 더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여행자가 현지인의 일상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이렇게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아쉬운 마음은.... 음... 시장으로 가서 달래자. '시장에 가면' 이란 노래도 있잖아? 하하.

시장에 가면 김미연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냉커피도 있고!

그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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