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날 2/2 "In da club"

by 블랙베어

티나 일행과 작별하며 '라오스-한국 친목의 밤' 약속을 잡았다. 일단 날짜만 내일 밤으로 잡고 시간과 장소는 추후 결정하기로 했다.


"티나! 내 친구들은 정말 핸섬해!"


티나게 좋아하는 티나. 장난 같고 실속 없는 백년가약 따위는 저 멀리. 그렇지! 이제부터 본 게임이다! 내일이 기대된다.


대학 정문을 나가기 전, 캠퍼스를 둘러본다. 분명 같은 장소일 텐데 좀 전에 들어왔을 때와는 다른 냄새가 난다. 지지직 햇볕에 타들어가는 흙냄새가 자전거 바퀴를 타고 올라온다. 수많은 생명이 묻힌 자리에서 피어나는 비릿하고 따스한 냄새.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만드는 그 냄새. 길게 호흡하며 자전거를 탔다.

이제 사람 냄새, 고무 냄새, 음식 냄새가 나는 시장으로 가보자.


김미연이 일하는 신발가게엔 언니, 김미연의 친구, 그 친구의 친구가 있었다. 키가 큰 김미연과는 달리 친구는 무척 작았다. 당돌한 첫인상. 이쁜 척도 잊지 않고 시전 해주는데, 얄미우면서도 귀여운 동생 느낌.


시원한 라오스 커피 정도를 기대하고 왔는데 특별한 메뉴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미연과 친구가 시장 바깥에 위치한 포장마차로 날 데리고 갔다. 김미연의 지인이 운영하는 간이음식점. 뭐 먹을지 묻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까르르 한참을 웃다가 썩썩 칼질을 시작했다. 보아하니 쏨땀을 만드는 것 같았다. 내가 사랑하는 쏨땀! 어느새 내 앞으로 접시를 쑥 내밀며 "핫! 핫!" 입에 손을 갖다 대는 사장님. 맵다는 거겠지.. 그간 맵다는 동남아 음식 잘만 먹어왔기에 "노 프라블럼!" 외치며 한 입 먹어보는데, 이런 쓰으...너무 매웠다. 내 반응에 다들 한 번 더 까르르.

쏨땀은, 첫맛에 맵다고 버릴 음식이 아니다. 오늘의 쏨땀 역시 반전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먹으면 먹을수록 청량감이 올라왔다. 태국에서 먹은 여타의 쏨땀에 뒤지지 않는, 날아오르고 싶은 맛이었다. 주위의 그녀들이 엄마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았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아기가 되나부다.


▲ 로켓 엔진보다 더 강력한 맛의 쏨땀을 만들어주신 포차 사장님.



친목의 밤이 연달아 성사되는 듯싶었다. 내 친구들이 내일 루앙프라방으로 온다고 말하니 함께 뭉치자며 먼저 제의하는 그녀들. 모레쯤 보자고 약속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나가 놀고 싶은데.. 나가 놀고 싶어!!

숙소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는데 노에게서 전화가 왔다. 데끼리!!


얼마 후 노가 오토바이를 끌고 숙소 앞으로 왔다. 여전히 믿음직한 이 녀석의 등짝! 믿음직한 데다 다가가기도 쉬우니 세상에 이만한 친구, 별로 없을걸?!


"케니, 어디 가고 싶어?"


"일단 시원하게 한 잔 하자!"


노가 나를 태우고 데리고 간 곳은 이곳의 젊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는 펍. 술집 앞에는 형형색색의 오토바이 수십여대가 세워져 있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은 이미 바운스 바운스. 들어가 보니 전부 다 현지 청춘남녀들. 외국인은 나밖에 없을 정도로 관광객들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로컬 펍! 벽에 걸려있는 티비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엠티비 화면과 음악. 이야~ 신난다. 아싸 아싸!


"짬쫑"

짬쫑은 라오스 말로 건배란 뜻. 벌컥벌컥 들이키니 뱃구레가 시원해진다. 이 곳의 분위기는 킹왕짱. 빈자리가 거의 없이 라오스 선남선녀들로 꽉꽉 채워져 있다. 내 안의 에너지 게이지도 점점 채워진다.


"노! 니가 짱이야"


엄지를 세워 치켜세워주니 노도 기분 좋은 듯,


"케니! 며칠 후에 여대생 기숙사에서 파티가 있어!"


"노! 너와 함께라면 정말, 지옥이라도 간다아~"


사나이들간의 우정에는 매개물 따위는 필요 없지만, 매개물이 있다면? 확실히 돈독해진다!



화장실도 들락날락하면서 안의 분위기도 살피고 다른 사람들과 눈과 마주치면서 놀던 와중에 바로 뒤테이블에 엄청난 미녀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 - 나 || 미녀의 친구 - 미녀


이렇게 앉아 있었다. 슬쩍 뒤를 돌아봤는데, 미녀와 눈이 마주쳤다. 날 보고 살짝 웃은 건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믿어야 했다. 이미 나는 미친 멍멍이. 말을 걸고 싶었다. 노에게 양해를 구했는데 노는 씩 웃기만 했다. 좋다는 건가?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믿어야 했다. 이미 나는 미친 멍멍이. 맥주잔을 들고일어나 미녀에게 말을 붙히려는 순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번 여행에서 '깜짝 놀랄만한 일 베스트 5' 안에 드는 일이 발생했다. 미녀 앞에 앉아 있던 친구는 바로 티나였던 것. 너무 놀라 고막이 터질 정도. 이에 반해 티나도 날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이내 특유의 침착한 미소로 맞아준다. 나도 위기에는 약하지 않다..기보다는 인두겁이 두껍다. 재빨리 미녀에게 시선을 거두고 티나를 발견한 척, 반가운 척 너스레를 떨었다. 그것도 모자라 티나 옆에 풀썩 앉아버렸다. 이내 테이블을 합쳐 놀게 된 우리 네 사람.


티나가 친구를 소개해 준다. 이름은 라. (라는 진짜 흔한 라오스 이름인 듯) 티나와 같은 대학에 다닌다. 내가 라에게 관심 있어하는 것을 본 티나, 곧 라의 남자 친구 이야기를 꺼낸다. 곧 라를 데리러 올 거라고. 라의 남자 친구는 체육교사라고 했다. 체육교사=힘쎈남자. 한심한 생각이지만, 라에게 관심을 더 가졌다간 남친한테 두들겨 맞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온다는 남친은 끝까지 오지 않았다. 맞을 일도 없겠지만, 맞을 일은 애당초 하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쎈 남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ㅎㅎ


여섯 개나 되는 안주를 곁들여 진탕 마시고 텐션이 오른 우린 클럽으로 향했다. 끼야호! 계속 계속 신난다!! 나는 노의 오토바이를 타고 티나와 라는 각자 오토바이를 탔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안 했다는 말은 여기선 충분히 통하는 말. 멋들어진 운전 솜씨를 뽐내며 클럽 입성! 루앙프라방에서 가장 물 좋은 곳으로 소문난 곳이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내부는 낡고 촌스러웠다. 클럽 중앙에는 스탠딩으로 즐길 수 있도록 테이블 역할을 하는 드럼통 십여 개가 세워져 있었고 양쪽 옆면에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나는 노에게 스탠딩으로 즐기자고 했다. 사실 인테리어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술, 술이 나왔고 춤이 시작되었으니.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 '겁'은 100년마다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루앙프라방만한 큰 바위의 표면을 자신의 옷고름으로 딱 한 번 스치듯 닦아낸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반복하여 그 바위가 닳아 없어질때까지의 시간 단위를 뜻한다. 순진 난만한 체조 동작만 반복하는 티나에 비해 애교와 교태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춤을 추는 라. 펍에서는 새침한 표정으로 술만 마셨는데 이곳에 오니 확연히 달라졌다. 라는 많이 웃었고 나를 자주 쳐다보았다. 우리는 겁이 작동하는 세계 안에 살고 있지만 실상은 겁이 작동하는 세계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간다. 100년이 아니라 1초에 한 번 문지른다 한들 그게 우리네 인생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우리네 삶은 우주의 운행과는 무관하다. 라의 눈빛과 몸의 동작이 점점 'ㅇ..ㅑ..' 해진다. 내가 취한 건가? 분명, 아니다. 오랫동안 눈을 마주치며 가벼운 스킨십까지 섞어가며 춤을 춘다. 그녀의 몸이 스치고 지나갈때마다 인적없는 해변에 널려진 수초 냄새가 났다. 기어코 바닷물에 발을 담그게 만드는 그런 냄새. 이렇게 무작정 좋을 수만은 없을 거야..라는 띨띨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우리는 가끔 바위를 한 번 문지른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 위에 머물며 몇 번씩 바위를 닦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걸 보며 사람들은 행복을, 희망을, 사랑을 느낀다. 나는 그것을 '겁의 일탈'이라 부르겠다. 물론 백 년마다 나타난다는 선녀가 같은 자리에서 수억 번을 문댄다한들 시공과 섭리가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넷은 음악에 맞춰 계속 춤을 췄다. 부끄러움 없는 순전한 기쁨이 잠시 왔다, 갔다. 잠시 일탈한 겁도 어느새 사라지고 기쁨으로 가득 찬 자리에 회한이 반쯤 차 오를 때면 사람들은 사랑의, 인생의 찬가를 지어 부른다.


정신없이 놀다 보니 시간은 이미 자정 근처. 기숙사 생활을 하는 두 명의 신데렐라는 가봐야 한다고 말하며 클럽을 떠났다. 노가 더 있고 싶어 하는 눈치라 가볍게 인사만 하며 그들을 보냈다. 내일 있을 친목의 밤에 라를 데리고 나왔으면 했지만, 나의 바람일 뿐 이후 라는 볼 수 없었다. 티나 페이스북을 타고 들어가 페이스북에서 근황을 보긴 했다. 찌질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한 시간 정도 더 클럽에서 놀았다. 우리에게 관심을 표한 앞 테이블의 처자들도 있었고 몇 번 건배를 제의하러 온 이들도 있었으나 크게 관심이 가진 않았다. 그녀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클럽에서 갑자기 다른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만일 세상에 종말이 온다면 그 원인이 무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클럽의 모든 이들은 하나의 음악에 같은 리듬을 느끼며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른다. 심지어 표정도 같다. 욕망까지도 같을 것이다. 다양함을 갖춘 세계는 외부의 침입에 대해 건강한 방어기제를 만들고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낸다. 반면 획일화된 세계는 한 번 무너지면 도미노처럼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다소 과장일지는 몰라도 이 곳의 음악, 손짓, 몸짓, 표정 등을 보며 세계가 점점 똑같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인간의 욕망이 같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점점 다양화되어가는 세계’ 란 말은 대량생산화 시대의 전략적 비즈니스 구호일 뿐이라는 생각. 실상은 점점 더 닮아가고 같은 욕망을 가진 세계로 변모할 것이라는 것. 그 끝은 어디일지..



클럽에서 나와 배고프다고 하니 노가 국수집으로 데리고 갔다. 라면 맛이 기가 막혔다. 더 기가 막힌 것도 있었는데 그건 나중에. 세 번 더 오게 되니까.


노에게 오늘 너무 고마웠다며 악수를 청하니 이 멋진 청년, 웃으며 나중에 또 놀자고 말한다.

나야 뭐 언제든지!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감사했고, 이제야 루앙프라방의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일은 폴 일행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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