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 "바꾸시겠습니까?"

by 블랙베어



호주 사막여우


Circular Quay에서 페리를 타고 왓슨스 베이로 갔습니다.

▲ 서큘라키에서 출발한 배를 타고 왓슨스 베이로 향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왓슨스 베이뿐만 아니라 시드니 주변의 여러 마을을 오가는 여객선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합니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모래사장을 거닐다 바닷물에 발도 담가보고, 잔디밭에 앉아 피쉬앤칩스도 먹으며 망중한을 즐겼습니다. 바다에 떠 있는 수십 대의 하얀 요트, 멋진 바와 카페, 손에 잡힐 듯한 시드니 시티의 다정한 스카이라인. 이런 천국 같은 천국에는 누가 살까 궁금해 마을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 왓슨스 베이 마을의 한 언덕에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그림 아니고요~


현기증 나게 멋진 집들이 가득하더군요. 어머, 저건 사야 해!라는 탄성이 절로 나더군요. 그렇게 감탄과 부러움 속에 마을을 거닐던 중, 새하얗게 단장한 멋진 저택의 정원에 서 있는 한 노신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노인의 막대한 부와 평안한 삶을 파악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곰님! 저 노인의 삶과 지금 당신의 삶을 바꾸라고 한다면 바꾸시겠습니까? 재산과 나이를 비롯한 모든 조건을 바꾸는 조건입니다.



호주 검은곰


똑같은 질문을 저 노신사에게 했다면 어떨까요?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저 노인네, 좋다고 방방 뛰며 웃다가 틀니가 빠질지도 모르겠군요. 제 대답은 ‘네버 에버’입니다.

▲ 왓슨스 베이의 선착장에서 내리면 잔디가 넓게 펼쳐진 공원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피쉬앤칩스를 먹으며 망중한을 즐겼지요.


왓슨스 베이는 매력적인 곳이더군요. 선착장에 내려 공원을 따라 오르면 깎아지른 절벽이 발밑에 나타나고 그 절벽을 향해 쉴 새 없이 파도가 들이닥칩니다. 밀려오는 파도의 근원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탁 트인 바다, 끝이 안 보이는 바다, 남태평양이 나옵니다. 그야말로 ‘뻥’하고 가슴을 치는 풍경이지요.


선착장을 중심으로 펼쳐진 작은 해변은 고요하고 평화로워 할머니들이 아이스크림을 핥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지요. 사닥사닥 걷는 개들의 발걸음 소리까지 더해지면 낮잠이 몰려와 자연스레 공원 잔디밭에 눕게 되지요. 반면에 절벽 쪽은 어떤 소리도 구체적으로 들려오지 않더군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웅~하는 정체불명의 소리만 나지요. 철썩대는 파도소리가 모두 절벽의 갭(gap) 속에 들어갔나 봅니다. 탁 트인 시야와는 어딘가 맞지 않는 기분 나쁜...

‘소리 없는 아우성’이란 닳고 닳은 싯구가 딱 들어맞는 것 같아요.



▲ 갭 파크 위에서 내려다본 절벽과 남태평양. 시원하나요? 아니면 서늘하나요?



절벽을 따라 걷다 보면 고인을 추모하는 꽃다발과 사진 등이 보여요. 아! 이곳은 관광의 명소뿐만 아니라 자살의 명소이기도 하답니다. 그러고 보니 소리 없는 아우성이란 말이 왠지 섬찟하게 느껴지네요. 어쩌면 이곳, 대저택의 노신사도 집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시퍼런 저 바다로 퐁당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도 있겠네요. 햇볕도 지겹고 가든 파티도 지겹고 딱딱해진 등가죽 긁는 것도 지겨워지면 말이에요. 불행하게도 우리 시대의 부와 테크놀로지만으로는 늙음의 연약함과 슬픔을 극복할 수가 없어요.


인간 삶의 대부분은 멍한 상태로 보내게 된다고 어느 작가가 그러더군요. 전적으로 동의해요. 당연히 제 삶도 예외일수는 없을 거예요. 몇몇 빛나는 기쁨의 순간과 격렬히 투쟁하는 시기를 제외하면. 그렇다면 저 노인과 내 나이차는 대략 20년. 20년의 대부분은 멍하게 지낼진대 앞으로 멍때릴 20년 정도따위는 노인의 막대한 부와 바꿔도 괜찮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노신사는 이제 낮잠을 즐기러 안온한 자신의 대저택으로 들어갈 거예요. 아니면 아름다운 자신의 집 주위를 산책하며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잠시 행복한 감정에 빠져들 수도 있겠죠. 그러다가 산해진미가 가득한 저녁 만찬을 즐기거나 파티를 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파도가 일으키는 물보라 자욱한 저 멀리 태평양 건너의 세계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게 싫어요. 나는 아직도 저 너머의 세계가 너무나 궁금해서 지금보다 더 나대고 싶고, 더 즐기고 싶고, 더 싸우고 싶어요. 그러니, 평안하게 잘 살고 있는 저 노인에게는 여생을 무탈하게 보내기를 기원해주면서, 허우적대기도 하고 때론 두려워 움츠려들 때도 있지만 변화와 희망을 찾아 헤매는 제 삶의 남은 시간은 보장해주는 걸로, 그렇게 결론을 맺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