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표에게 배웠다
(앞 글에서 계속)
https://brunch.co.kr/@arachi15/98
- 첫 번째 문을 열려고 했더니 안 열렸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문 앞으로 갔습니다. 또 열려고 했는데 또 안 열렸습니다. 그래서 돌아서서 가 버릴까 하다가 세 번째 문까지 마지 못해 갔습니다. 합격은 세 번째 문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문이 열리지 않은 것은 실패입니다. 실패는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정해준 것입니다. 세 번째 문 앞에서 내가 그냥 돌아섰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포기입니다. 포기는 스스로 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포기할지 말지 정했더니 내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주1)
차인표의 ‘실패’와 ‘포기’에 대한 경험이 마음에 남았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8개월 동안 백수 생활을 했단다. 아침마다 벤치에 앉아 어디 가서 일자리를 구해 볼까 궁리를 했다.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탤런트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MBC 공채 탤런트를 뽑는데 전국에서 온 수만 명 중 남자 7명, 여자 18명을 뽑았고 남자 중 1등으로 합격했다.
KBS, SBS 다 떨어졌는데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MBC에서, 그것도 1등으로 뽑혔을까 이상한 일이었겠지. 먼 훗날 한 PD가 얘기를 해 주었단다. 1993년, 그 해엔 탤런트 뽑는 심사위원들이 모여서 지침을 만들었다. '올해는 연기력이 조금 떨어지고 정식으로 연기 공부를 안 했더라도 좀 특이한 사람들을 뽑아 보자. 외국에서 공부를 해서 외국어를 한다거나, 운동을 많이 해서 몸이 좋다거나, 다른 직장 경험이 있거나.' 세 가지가 다 그였다. 이것을 그가 미리 알았을까? 아니다. MBC에서 1993년에 이런 사람을 뽑는다는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전혀 몰랐다. "돌이켜 보면 내가 한 일은 딱 하나, 포기하지 않은 거였다."
나에게도 낯선 것에 대한 도전의 경험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책을 내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때.
4년 전. 막 석사 논문을 써서 통과되고 난 직후였다.
교수님들은 논문도 칭찬을 해주셨지만 특히 여성들 14명을 만난 인터뷰가 너무 좋다고 하셨다. 인터뷰를 모으면 좋은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꼭 책을 냈으면 좋겠다고 조언을 해 주셨다.
나는 또 엉덩이가 가벼운 사람이므로 당장 출판사 투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서치를 시작했다. 며칠 서치를 하니 어떻게 써야 할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시키는 대로 내 글과 유사한 책이 나왔던 출판사들을 몇 개 추렸다. 한꺼번에 여러 출판사에 동보 메일 보내는 것은 출판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위라 하니 하나씩 보내기로 했다. 출판사 순위를 매겨 두고 첫 출판사에 출판을 희망하는 투고 메일을 보냈다. 기획 의도를 쓰고 목차도 구성해 적었고 왜 해당 출판사를 골랐는지 참고했던 도서에 대해서도 적었다. 마지막으로 원문 파일도 첨부했다. 정성껏 메일을 썼다.
곧 첫 번째 답신 메일이 왔다.
안녕하세요. OO 출판 편집부 원고투고 담당자입니다.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메일 잘 받아보았습니다.
귀한 원고를 검토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해당 팀에서 검토하여 원고 검토 결과에 대한 답변은 보통 2주 정도 걸립니다.
해당 팀의 사정상 조금 늦어질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우왓! 내 원고를 검토한단다.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2주 후 두 번째 메일이 왔다.
안녕하세요 OO 출판 편집부 OOO입니다.
보내주신 원고를 검토하고 연락을 드립니다. OO 출판에 원고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측면에서 원고를 꼼꼼히 살펴보고 논의해 보았습니다.
OO 출판에서 원고를 출간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원고를 무척 재밌게 읽었고 공들여 쓰신 원고라는 사실을 대번에 느꼈어요.
다만 저희 능력이 부족한 탓에, 단행본으로서 매력적인 콘셉트를 구상해내지 못했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편히 알려주세요.
평안한 하루 보내시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윽. 탈락이다.
만약 내가 아닌 누군가는 두 번째, 세 번째 출판사의 문을 계속 두드렸을 것이다. 언젠가 운전하며 라디오를 듣는 중에, 이기주 작가가 라디오 인터뷰에 나온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수백 곳의 출판사에 투고를 해 보았다고 했고 그래도 모두 실패해서 스스로 그냥 책을 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러고 나니 책이 ‘떠서’ 유명 출판사에서 재출판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나는 그걸로 끝이었다. 겨울에 한가할 때 투고를 한 번 하고는 업무가 바빠지는 시기가 되고 나니 그냥 핑계김에 잊고 말았다.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는 또 투고해도 실패할까 봐 그냥 지레 포기하고 말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는 포기의 반대말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 단어는 ‘도전’이라 했다. 끌어낼 도, 싸울 전. ‘틀에 박힌 내 삶 속에서 나의 가능성을 끌어내기 위해서 싸우는 것’, ‘나를 감싸고 있는 그 틀과 싸우는 것’. 그것이 도전이라고.
나에게 도전은 무엇이었나? 내 삶에서 나의 가능성을 끌어내기 위해 싸운 적이 있던가?
아이 낳은 후로는 도전다운 도전을 했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뒤늦은 나이에 대학원을 간 것도 도전이라면 도전일 수 있는데 그 시간을 충실하게 보냈지만 그저 그걸로 끝이었다. 그것을 발판이자 기회 삼아 한 발 더 나아갈 것을 생각지 않았다. 지금도 어렵게 박사과정을 끝냈는데 논문은 시작도 못 하고 있다. 내가 쌓은 어느 하나를 붙잡고 다음 차례의 도전을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그는 읽기, 쓰기가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들’이라 했다. 배우에 도전하고 또 작가에도 도전할 수 있게 했던 것은 이러한 좋은 습관이 기초 체력이 되어 주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했다.
배우로 데뷔해서 그대로 더 유명한 배우가 되어갈 수도 있었는데 갑자기 배우 일을 중단하고 3년 간 해외봉사를 다녀왔다고 했다. 계속 글을 읽고 쓰다가 50이 넘은 나이에 작가로 데뷔한 그가 너무 존경스럽다. 세속적인 성공만을 희망하는 사람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이다. 읽고 쓰며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고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끝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했겠지. 새로운 도전을 하려면 의심의 마음도 들었겠지만 그럼에도 믿고 계속 걸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어떤 인생을 써 내려가고자 하는가. 나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이번에는 읽고 쓰면서 나만의 답을 찾아가 보고자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의 인생을 써 나가는 작가들입니다. 누구도 대신 써 주지 않습니다. 온전히 스스로 써 내야 하는 책입니다. 여러분이 고독하고 힘들 때, 지치고 어려울 때, 좋은 습관은 친구가 되어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지가 지쳐서 포기하고 싶어할 때, 좋은 습관이 대신 나가서 여러분을 대신해 싸워줄 것입니다. (주2)
# 주1, 주2: https://youtu.be/iN9mlxRsS04?si=ii0i9LThOSV0wCJ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