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솔직히 고백하자면, 엄마는 20대의 언제쯤이 되기 전까지는 부모님, 그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께 감사한 마음보다는 원망과 애증의 마음이 더 많았어. 네가 알고 있듯이, 특히 청소년기에 엄마의 꿈에 대해 지지받기는커녕 반대를 통해 엄마를 좌절시켰다고 생각했기에 원망이 많았어. 그것이 아마 부모님에 대한 주된 엄마의 정서를 형성했을지도 몰라. 그 외에도 어린 시절 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몇 가지는 엄마에게 정말 별로였거든. ㅎㅎㅎ
10대 때도, 20대 초반까지도 엄마는 늘 대들고 싸웠어. 특히 할아버지와 격렬하게 부딪혔지. 그때마다 할머니는 늘 '둘 다 똑같아서 저렇게 싸우지.'라고 하셨어. 그러다가 20대의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싸움을 하지는 않게 되었어. 말싸움할 필요 없이 그냥 엄마 뜻대로 하면 된다는 걸 알아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엄마가 대들어야 하고 싸워야 했던 건 아마 엄마가 그로부터 벗어날 힘이 없어서였던 거야. 엄마가 스스로 힘을 갖게 되고 엄마가 뜻한 대로 걷게 되니까 점점 싸울 일이 없어지더라고.
그러다 결국 27살에 엄마는 어떤 계기를 통해 집을 나오게 되었어.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마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을지도 몰라. 무엇보다 걱정이 크셨지. 고생하는 삶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하셨을 거야. 두 분의 걱정과 마음을 조금은 느끼게 되었고, 할머니, 할아버지께 긴 편지를 썼어. 내용은 두 가지. 첫째, “이렇게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잘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째, “이제 저는 성인이고 제가 뜻한 바에 따라 저의 길을 가겠습니다.”
오래전에 보낸 편지라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아. 그런데 7장인가, 10장인가, 엄청 길게 썼던 건 기억나.
그때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전해주신 정신의 유산이 있다는 것을 느꼈거든. 할머니는 살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챙기셨지. 그렇게 살아오셔서인지, 온 가족과 친구들이 무슨 일이 있으면 엄마를 찾더라.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어. 그냥 조금 손해 보고 살라고. 엄마는 그렇게 너그럽게 좋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걸 배워서 감사하다고 썼어.
할아버지가 법대를 나와서 법조인이 되지 않으셨는데 그게 너무 감사하다고도 쓴 것 같아. 집안이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부정의하게 살고 싶지 않아 그 길로 가지 않으셨다는 것이 진심으로 감사했어. 엄마가 가진 정의감이 결국 할아버지께 온 것이라는 걸 알았거든.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것들 몇 가지를 떠올리며 감사의 편지를 썼어. 두 분이 만들어 주신 토양으로 그 덕분에 이렇게 제 인생의 길을 만나서 가게 되었으니 감사하다고 썼어. 바르게 성실하게 사는 부모를 만난 것은 엄마의 행운이라고도 썼어.
엄마의 길을 가게 되니까 엄마를 있게 한 할머니, 할아버지께 감사할 수 있었어. 두 분이 무어라 하시든 그게 더 이상 엄마를 흔들지는 않았어. 걱정하시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어. 엄마의 길이 마음에 드니까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그냥 사라지더라고. 엄마의 존재 자체를 가능하게 한 할머니, 할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 이런 뜻과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엄마의 토양을 잘 가꾸며 키워 주신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결혼을 하고, 또 몇 년이 지나 너를 낳았지.
갓 태어난 너를 데리고 집에 와 할머니가 한 열흘쯤 할머니와 함께 머물렀을 거야. 그때 할머니와 함께 너를 돌보면서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할머니에 대한 원망이 모두 사라졌어. 아이 키우는 게 처음이라 쩔쩔매는 엄마를 안타까워하는 할머니의 모습, 또 할머니에게도 엄마가 첫 아이이니, 이렇게 애쓰면서 이렇게 정성스럽게 키웠겠구나, 하는 걸 느꼈기 때문일 거야.
또 그렇게 너를 키우던 어느 여름날, 할아버지가 너를 업고 재워 주시겠다고 어설프게 포대기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시는 모습을 보는데 왠지 마음이 뭉클하더라. 그 더운 날, 네가 너무 예뻐서이기도 하지만, 엄마를 쉬게 해 주려고 널 업어주신다는 게 느껴졌거든. 그제야 할머니, 할아버지의 그 모든 행동들도 결국 엄마를 사랑하시는 두 분만의 방식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널 사랑으로 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두 분에 대한 원망과 애증이 다 날아가 버렸어. 할머니가 미국에 있는 삼촌을 만나러 가게 되어 오래 집을 비우셨을 때, 엄마는 할아버지께 매일 전화를 드릴 수 있었어. 엄마가 아빠의 부모님과 잘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아빠를 낳고 키워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 때문이야. 그렇게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던 어떤 종류의 감정이 사라지면서 진짜 자유의 문이 열리는 기분이 들었어.
부모로부터 독립한다는 게 뭘까? 물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정서적 얽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 진짜 독립이고 자유가 아닐까 싶기도 해.
부모에게 인정받으려고, 사랑받으려고 사는 게 아니어야 진짜 자기의 길을 갈 수 있거든. 부모의 자식이라는 ‘역할’이 자기 인생의 전부가 아니어야 진짜 자기의 길을 갈 수 있거든. 부모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관계를 끊는 것도 아니야. 그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
부모로부터 태어나 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의연하게 걸어가는 것. 그것이 태어나게 해 준 부모에 대해서도 나를 있게 한 세상에 대해서도 진정한 보답이 되는 것일 거야.
지금은 어떠신지 아니?
엄마가 독립한 이후 할머니, 할아버지는 많이 변하셨어.
마지못해 인정하셨던 게 언제부터 바뀌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ㅎㅎ 지금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마가 하는 모든 일을 응원하셔. 아이가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면 결국 부모는 아이를 이길 수는 없는 거야.
요즘 엄마는,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께 소중한 가치들을 물려받았듯, 엄마의 삶을 통해 너에게 물려줄 것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해. 그것을 물려주려고 엄마의 삶을 사는 건 아니겠지만, 엄마의 삶을 통해 의미 있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너도 이제 어른이 되었네. 넌 어떤 삶을 살고 싶을까, 넌 어떤 꿈을 품고 있을까?
어떤 삶이든 어떤 꿈이든 때로는 어려움도 겪고 때로는 기쁨도 있고 때로는 심심할 때도 있는 게 삶이겠지. 삶의 의미를, 삶의 재미를 매일매일 한껏 느끼며, 우리 그렇게 각자의 길을, 때로는 손 잡고 때로는 외롭게 그렇게 가 보자.
표지 이미지> Image by Taras Lazer from Pixabay
이렇게 아이에게 쓴 글이 책이 되었습니다.
# 상세 내용 보기: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1556
# 일정 : 2025. 8.23(토). 1:00-5:00 (1차 - 온/오프라인 동시)
2025. 8.30(토). 7:00-9:00 (2차 - 온라인)
# 장소 :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강남학습관 대강당(서울 송파구 오금로 101)
# 대상 : 글을 좋아하는, [엄마의 유산]공저자가 되고 싶은, 개인책출간을 원하는 누구나.
# 참여방법 : 참가비(1,2차 모두 합쳐 3만원)
# 신청: 링크 클릭 위대한 유산 2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