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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May 19. 2022

애 보는 것보다 밭 매는 게 쉬웠다

저만 그런 건 아니겠죠

나는 사적이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꺼이 나누려는 태도가 있어야만

여성들이 세상에 대한 집단적인 묘사를 할 수 있고

그때 이 세상이 진정으로 우리의 세상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에이드리언 리치,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 13쪽)


여자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사적인 이야기로 취급 받고 무대가 아닌 무대 뒤에서 벌어진 이야기처럼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출산과 양육을 둘러싸고 아기를 낳은 여성도, 아기를 낳지 않은 여성도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이 있다. 여성들은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으로부터 하고 싶은 또는 할 수 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 경험 하나하나가 뒷 이야기가 아니라 본 무대의 이야기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여성들이 살면서 겪은 이야기 하나하나가 공적인 자리에서 논의될 가치가 있다.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들의 이야기도, 아기를 낳은 여성의 이야기도 경험한 여성의 숫자와 상관 없이 같은 무게로 다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한 명의 여성으로서 나는 출산을 경험했고 나의 이야기 보따리는 이렇다.


나는 자연분만을 했고 출산 직후에는 내가 출산 체질인가 싶었다. 수십 시간 진이 빠지도록 진통한 후에야 아기를 만난 분들의 ‘수기’가 인터넷 맘카페에 넘쳐 났는데 글로 배우며 비장하게 준비했던 나의 마음가짐에 비해 실제 출산은 어렵지 않았다. 단계 단계 미처 몰랐던 굴욕적(?) 프로세스들이 유쾌하지는 않았던 것을 제외한다면.

진통이 오기 전, 양수부터 새고 있었지만 터진 건 아니었고 아프지도 않았다. 병원에 전화하니 천천히 씻고 짐 싸서 와도 된단다. 이른 아침부터 준비해 병원에 갔다. 마침 예정일 즈음이고 여름휴가 첫날이라 남편의 동행과 협력에도 문제가 없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도 여전히 진통이 없어 촉진제를 맞았지만 1시간에 한 번씩 인증샷을 찍을 정도로 진통이 가벼웠다. 오전 9시쯤 촉진제의 힘으로 진통이 시작되었는데 진통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병원에서 무통주사를 맞을 수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나의 고통을 걱정한 것이든, 병원의 상술이든 상관 없었다. 타이밍 최고. 고통이 얼마나 경감되는지 물으니 80프로는 경감될 거라 해서 1초도 더 생각하지 않고 “맞을께요!” 했다. 아기는 진통 시작 후 채 3시간이 되기 전에 태어났다. 날 때부터 효녀(?)였다.

처음에는 가슴에 받아든 아기가 꼬물꼬물대는 게 마냥 신기했다. 출산 직후 내 첫 마디는 “와~ 신기해!”였다. 이런 생명체가 내 몸에서 나왔다니.

그런데 그 직후부터는 몸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아기 낳다 찢긴 회음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팠고 오로와 상처로 상당량의 혈액이 몸에서 빠져 나가는 중이라는 걸 눈으로 시시각각 확인 가능했다. 출산 체질이라는 건 오만이자 착각. 수월하게 아기를 낳았다 해도 몸의 큰 변화임이 틀림 없었다. 아기를 안으려고 하는데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아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모유수유를 위해 모자동실을 선택했는데 아기가 종일 잠만 잔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문제는 이틀 후 퇴원해 집으로 왔을 때부터였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여서 걸음걸이조차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아기는 더 이상 병원에서처럼 종일 잠을 자지 않았다. 짧게 짧게 자고 틈나는대로 울었다. 잘 나오지 않는 젖을 빨다가 얼굴 빨개지며 우는 아기를 안고 어찌 해야 할 지를 몰랐다. “도대체 왜 우는 거야?” 알아듣지 못하는 아기에게 물으며 나도 울었다. 한여름에 아기를 낳았는데 날은 너무 덥고 몸은 따뜻하게 해야 한다 하고 기온과 체온과 몸 상태가 전혀 조화가 되지 않았다. 아기와 닿는 부위마다 아기도 나도 땀띠가 났다. 보다 못한 남편이 나가더니 두부 사 오듯 에어컨을 사 왔다. 여름 주문 성수기라 에어컨이 매장에 없었다는데 고를 여유도 없었고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전시품만 살 수 있다길래 아무거나 사 왔다고 했다. 더우면 에어컨 켰다 추우면 긴팔 입었다 하는 가운데, 몸도 마음도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탔다. 내가 상상했던 엄마된 모습은 평화롭게 잠든 아기를 품에 안고 흐뭇하게 웃는 모습이었는데 그건 전혀 현실이 아니었다. 전쟁도 이런 전쟁이 없었다.

아기가 울기면 하면 “얼른  줘라”, "빨리  먹여라말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고  말씀을 하시는 엄마가 미웠다. 어느   뜨니 남녀의 몸이 바뀐 드라마 주인공이   같았다. 아기 낳고 나니 어느  갑자기  몸이 남의 몸이   같았다.  몸이 차라리 남자로 바뀌었으면 좋으련만, 젖소로 바뀌어 있었다. 그냥 영혼까지 온전히 젖소가 되었으면 나았을 텐데,  영혼은 인간이었던  문제라면 문제였다. 갑자기 동물(인간도 동물 맞는데) 다시 태어난  몸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뭔가 모를 모멸감이 느껴졌다. , 정말 기분이 너무 더러웠다. (다른 적절한 비유와 표현이 있는  같은데 나의 어휘력과 표현력의 한계가 안타깝다.)  뿐인가. 제일  고통은 따로 있었는데 밤에   없다는 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밤에 연이어 6시간이든 7시간이든  수가 없었다. 나는 아기의 패턴을 맞춰 아기가 배고프다  때마다 2시간에  번씩 깨어나야 했다. 아기 낳기 전에 누구도 아이를 낳으면 밤에 2시간마다 깨게  거라 말해주지 않았다. 상상도 못한 현실이었다. 2시간마다 깨서 우는 아기를 두고 진심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고문하면 동지고 기밀이고 술술 불어 버리는 영화를 봤었는데   재우는  고문이라는  알게 되었다. 잠 못 자고 사람의 몸과 마음이 정상이기 힘들었다. 그렇게 기밀을 술술 불어 버리는  당연한 거였어! 남의 고통을 그렇게 쉽게 보면  되는 거였어! 잠시나마 주인공을 욕했던 나를 욕하고 싶었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나는 잠 못 자서 죽을 거 같은 상황인데 또다른 생명체는 생존이 오직 나에게 달려 있었다. 전적으로 나에게 의존한 생명체의 존재, 그건 정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었다. 너무 무거워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아이 낳고 한 달쯤 되었을까. 친구가 와서 하루 아이 없이 외출했던 날이 있었는데 이 날이 뚜렷이 기억난다. 밖에 나가는 순간, 햇빛에 반짝이던 나뭇잎이 눈에 확 들어오고 천국에 온 것 같았다. 잠 못 잔 현실은 그대로인데 몸이 날아갈 것 같았고 마음도 경쾌해지고 즐거워졌다. 친구가 나를 구원해 준 듯 고마웠다. 이 때 나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타고난 모성애는 적어도 나에게는 환상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만 낳으면 모성애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정말 뻥에 가깝다는     느낀 적이 있는데 그건 아이 백일 즈음이었다. 나는 아이와 백일을 보내고 곧바로 직장에 복귀했다. 복귀하기 직전 아이를 모유가 아닌 젖병에 적응하게 하고 유축을 연습했다. 당분간 아이를 돌보아 주시겠다  주신 엄마와 아이의 일과를 공유했다. 엄마가 계신 상태에서 아기를 돌보아 주실 출퇴근 시터 면접도 보았다. 하나하나 출근할 준비를 했다. 출근하기 전날, 백일상을 차리고 사진도 찍었다.  작은 아이를 두고 나가야 하다니 아이를 안고 눈물도 찔끔 흘렸다. 왠지 아이에게 미안했다. 아빠는 절대 느끼지 않는 미안함일 것이다.

그리고 101일째 출근을 했는데 퇴근할 때 깨달았다. 일하는 동안 거의 아이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오랜만의 출근이니 동료들과 인사 나누느라 바쁘기도 했고 업무 상태를 파악하느라 정신 없기도 했을 거다. 집에 가려고 사무실을 나설 즈음에야 아이 생각이 났다. 내 자신이 뭔가 우습기도 하고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어제는 울다가 오늘은 아이를 잊고 지낼 수도 있다는 게 우스웠다. 직장에서 일하며 오히려 나로 돌아온 것처럼 느끼는 내가 엄마가 맞나 싶어 죄책감이 들었다.

이런 나에게 어느  엄마가 지나가며 하신 얘기가 귀에  박혔다. “ 맬래,  볼래?” 하면 다들  맨다고. 그만큼 아이 키우는  어렵다고. ?   얘기를  맘대로 해석해서  매는  쉬운 여자는 모성애가 없다는 건가, 생각했었는데 그런 뜻이 아니었던 거다!  얘기에 죄책감을 털었다.  보는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라는 !


아기 낳고 너무 힘들었던 시기. 그 동안 남편이나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특별한 다른 도움을 받은 곳이 있다.

아기 낳은  두달쯤 되었나? 어느  몸도 회복되고 아기와의 하루도 조금씩 적응되어 가고 있었는데 여전히 아기 ‘' 재우기가 너무 어려워 인터넷으로 폭풍 검색을 했고 어떤 온라인 사이트를 만나게 되었다. ‘아기와의 즐거운 속삭임.’ 아기를 처음 키우며 느끼는 낯설음, 어려움, 고립감과 나홀로 싸울 때였다. 이제  세상에  아기를 받아 안고 어쩔  모르던 시기였다. 양육자(주로 엄마)들이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곳이었고 응원과 위로가 있었다. 아기 재우는 방법을 배울  있을까 했는데 이제  세상에  아기를 관찰하며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유용하고도 즐거운 교류였다. 급기야 9개월  아이를 안고 남편까지 대동해  휴양림에서 열린 오프라인 모임에도 가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분들과의 교류가 온라인을 바탕으로 아이가 10 후반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자그마치 16년째. 조동(=조리원 동기) 아닌데 온라인에서 만나 이렇게도 관계를 이어갈  다니!

나는 육아를 배우러 들어 갔던 사이트에서 육아하는 여성들 간의 특별한 교류와 연결을 경험했고 지금도 매일 새롭게 경험하는 중이다. 아이 이야기도 많이 나누지만 엄마들의 이야기도 많다. 누군가 책을 냈을 때, 이사를 할 때,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사업을 론칭했을 때 등등 서로의 잘됨을 응원하고 서로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위로한다. 식물을 키우고 동물을 돌보고 뮤지컬과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각자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듣는 이도 말하는 이도 즐거워한다. 모든 대화와 교류를 통해 스스로를, 서로를 격려하고 힘을 준다. 지금도 매일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고 매일 새로운 자극과 직간접의 격려, 나를 풍요롭게 하는 에너지를 받는다.

나는 여성들 간의 교류와 연대에서 조금은 다른 세상을 본다.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다. 여성들은 서로의 비빌 언덕이다. 내가 고립된 방구석에서 홀로 육아하며(남편이 있지만 우리는 시간으로 육아를 분담했기 때문에 각자 육아의 순간은 둘 다 혼자였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은 건 다 다른 여성들 덕분이었다. 그들 덕분에 나는 천천히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가 되어갈 수 있었다. 엄마라는 역할에만 나를 가두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딸을 위해서라도 ‘엄마’로서보다 ‘여성’으로서 내 삶을 잘 살아가고 싶다는 작은 꿈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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