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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Aug 19. 2022

흑역사에는 이유가 있다

여자의 안전 감각

20대 중반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한창 늦은 귀가를 하던 시기였다. 그 날도 간신히 막차 심야버스를 타고 들어온 늦은 귀가길. 버스정류장에서 재빨리 집을 향해 걸어 출입구에 도착, 엘리베이터에 혼자 안전하게 탑승. '휴.'

그런데 헐레벌떡 뒤따라와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탑승하는 남자. 한밤중에 이런 상황에서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함께 탄 남자가 허튼 짓을 하지는 않을지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잠깐의 정적 후.

 

"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뒤꼭지를 신경 쓰며 빠르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집 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재빠르게 꺼낸다. 그런데 뒤에 느껴지는 인기척. 엘리베이터에 따라서 탄 남자가 나를 따라 내렸다. ‘아니, 왜?’ ‘왜 나를 따라 내리지?' 머리를 굴림과 동시에 손도 돌린다. 재빨리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어 돌린다고 생각하지만 원래 열쇠는 마음이 급하면 열리지 않는 법.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이 때 뒤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


- 여기 4층인데요.

- 네?


아아니, 여기는 우리집인 5층이 아니라 4층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남자의 집인 것이다! 나는 남의 집에 우리집 열쇠를 쑤시며 당당하게(?) 그 남자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쪽팔려서 재빨리, 이미 올라가 버린 엘리베이터 버튼을 막막 누르는데 뒤에서 한 마디를 더 하는 남자.


- 계단으로 가시는 게 빠를 텐데요.


으아아아악!!!!!!! 나는 계단으로 후다닥 뛰어 5층인 우리집으로 올라왔다……….


- 으아아악! 망신망신 개망신!!!!!


아 이건 정말 흑역사다. 그 날 집에 들어와 이불킥하며 육성으로 외치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개망신의 기억.


혹시 나의 흑역사 스토리를 보면서 “쯔쯧, 괜한 피해 의식이지.” 라고 생각하는 분들 계시다면 이 부분이 결코 ‘괜한 피해의식’은 아니라는 점을 꼬옥 밝히고 싶다. 피해의식이란,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 명예 따위에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감정이나 견해.’를 말한다. 그러니까 실제로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피해를 입었다고 느낄 때, 피해의식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거다. 나는 20대 중반이 되기 전에도 대중교통에서 또 길거리에서(고발까지 하지는 않았으나) 성추행에 노출된 적이 있고, 어쩌면 성범죄가 될 수도 있었을 범죄적 행위를 당할 뻔한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많은 여성들이 유사한 경험이 있다. 그러므로 이는 사실과 경험에 근거한 나를 지키려는 꼭 필요한 위험 감지 시스템이지 결코 피해의식이 아닌 거다. 나 외에도 사례가 아주 풍부하여 근거가 무궁무진한 일이다. 이걸 그냥 피해의식이라고 치부하면 있는 범죄, 일어나는 사건을 부정하는 거다. 그러지는 마시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사례가 차고 넘치는 사건을 없는 것으로 취급하려는 것, ‘사실 관계’를 보지 않고 ‘피해 의식’이라고 치부하는 그 발언이 훨씬 더 문제적이다!


실제로 해마다 발생하는 강력 범죄의 80% 이상은 그 대상, 즉 피해자가 여성이었다. (혹시 정말인지 의심하는 분들을 위해 기사를 붙인다. 캬, 얼마나 의심을 받았으면 기사 제목도 ‘팩트체크’다. (“[팩트체크] 이수정 “강력범죄 피해자의 80%가 여성이다”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2323) 


한 사람의 주장을 어떻게 믿느냐고 할까 봐 밤길 여성 대상 범죄를 다룬 기사를 시기별로 뽑아 3개만 제시해 둔다. 직접 검색해 보면 정말 사례가 많이 나온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밤길이 무서운 여성들… ‘귀갓길 범죄’ 잇따라(2016)

https://news.kbs.co.kr/mobile/news/view.do?ncd=3267988

귀가길 여성 뒤따라가 집안 엿본 40대, 징역 6월(2021)

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3409

여성안심귀가길 특별순찰활동 전개(2018)

http://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5504


오죽하면 이미 몇 년 전부터 여성의 안전한 귀갓길을 위해 지자체마다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까. 위의 기사처럼 밤늦은 주택가를 특별히 순찰하기도 하고 길에 로고젝트로 경각심을 일깨우며 CCTV를 추가 설치한 곳도 있다. 서울시에는 “안심이”라는 앱도 있다.


혼자 살면서 집에 귀가할 때마다 누가 뒤따라 오지 않는지 살피고 집 대문을 열 때마다 뒤에 사람이 없는지 살펴야 하는 삶, 배달 음식을 시킬 때도 현관에 두고 가게 하고 현관에는 여러 개의 신발을 꺼내 놓거나 남자의 신발을 놓아두어야 하는 일상, 늦은 귀가길 택시를 탈 때마다 졸리고 피곤한 눈 부릅뜨고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이 맞는지 살펴봐야 하는 밤. 남자친구와 혹은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 혹시 나에게 해꼬지하러 오지 않을지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

이렇게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여자와 남자는 일상의 조건이 너무나 다르다. 그리하여 많은 남자들은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일상을 보내던 중 보게 된 '강남역 살인 사건'. 아, 그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도 있구나, 라는 것을 알려 주는 사건이었다.


세상은 남자들이 억울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세상은 여성들이 이런 위험에 처하지 않고   있는 조건을 함께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남자들의 억울함을 해결하는 것과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개선하는 것,   가지  하나를 한다면 후자여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남자들도  이상 억울할 일이 없어질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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